“내가 너희만 할 땐…” 잔소리가 폭력이 되는 시대
“가장 야한 채소는?” 아재개그라도 배워 소통하길
편식하지 않는 건전한 식습관을 가졌을 뿐인데 다짜고짜 아재로 낙인찍다니. 울컥 억울한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뒤져봤다. 요즘 뜨는 가요나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ㅇㄱㄹㅇ(이건 레알)’ 따위 유행어를 얼마나 아는지 묻는 비슷비슷한 판별법이 난무한다. 입맛이 아니라 노래나 말을 잣대로 자가 진단을 해 봐도 결과는 거기서 거기.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래, 기를 쓰고 아닌 척했지만 실은 아재 맞다”고.
그래도 아재는 양반이다. 연식이 좀 오래돼 감이 떨어진다는 것뿐 심각한 비호감의 대상까진 아니다. 청년들 입장에선 자기들과는 다른, 그래서 배려가 필요한 ‘옛날 사람’ 정도랄까. 문제는 꼰대다. 단지 나이만 많은 게 아니라 그 많은 나이를 흡사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시대착오적 족속을 칭하니 말이다. 젊은 세대에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불통의 대명사다. ‘설마 난 아니겠지’ 하면서도 내친김에 시중에 나도는 ‘꼰대 테스트’까지 도전해 봤다.
‘"내가 너희만 할 땐~”이란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누굴 만나면 대뜸 나이부터 물어본 뒤 어리면 말을 놓는다/"솔직하게 말하라”고 해 놓곤 막상 후배가 그렇게 하면 기분이 상한다/회의 때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자”고 한 뒤 결국 먼저 답을 제시한다…’
이 리스트를 보며 가슴이 뜨끔한 건 과연 나뿐일까. 그나마 판정 결과가 ‘꼰대 경보 발령’에 그친 게 불행 중 다행이다. 아직은 만회할 여지가 남아 있단 소리니까. 할 수 없는 건 빼고, 급한 대로 할 수 있는 것부터 고쳐 보기로 했다. 우선 “내가 너희만 할 땐~”으로 시작하는 잔소리라도 줄여 볼까 한다. “난 신입 때 소주 한 잔도 못 마셨는데 선배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마시다가 주량을 두 병까지 늘렸잖아.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는 거야” “칼퇴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옛날엔 야근한 뒤에도 ‘집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겨우 갔거든”… 1988년이면 모를까 2016년엔 폭력이 될 수도 있는 얘기들 말이다.
‘권력간격지수(Power Distance Index)’란 말, 혹시 들어 보셨는지? 네덜란드 사회학자 기어트 홉스테드가 만들었는데 특정 집단이 권위나 위계질서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를 나타낸다. “직원들이 상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데도 무서워서 말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나” “나이 많은 사람이 두려움의 대상인가” 등의 질문을 던져 측정했다고 한다. 다들 짐작할 수 있듯 한국은 이 지수가 높은 축에 속하는 나라다. 그런데 이 지수가 절대 높으면 안 되는 대표적 조직이 바로 항공사다. 조종사들 간의 원활한 소통 부족이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비단 항공사뿐일까. 어디든 젊은이들은 입을 다물고 기성세대만 목소리를 높이는 조직의 미래가 밝을 턱이 없다(얼마 전 멀쩡한 검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검찰 조직만 봐도 뻔하지 않나). 더욱이 기상천외한 상품과 서비스를 속속 내놓지 않고는 삼성이 아니라 삼성 할아버지라도 살아남기 힘든 시대다. 요즘 기업마다 창의력을 높인다며 앞다퉈 조직 문화 바꾸기에 나선 건 그래서다. 오랜 세월 수직적인 질서에 안주해 온 꼰대들로선 무시무시한 퇴출 위기를 맞은 셈이다. 좋든 싫든 청년 세대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이 살길이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앞서 소개한 꼰대 테스트 속에 답이 있지 않나 싶다. 상대가 듣기 싫은 말 안 하고, 하고 싶은 말 들어 주란 얘기다.
이도 저도 힘들면 틈나는 대로 아재개그라도 날려 보시라. “항상 미안한 동물은? 오소리” “새우가 출연하는 사극은? 대하사극” “가장 야한 채소는? 버섯”… 소통을 위해 이 정도까지 망가질 수 있다면 비웃음을 살망정 적어도 꼰대 소리는 면하지 않을까.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