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현대시작법-시적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
시는 일정한 거리에 오면 행갈이를 하고 신문은 행갈이 없이 계속 진행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다음은 행갈이의 보기.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이 시를 산문으로 표기하면 이렇다.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그리고 무릎까지 시려오면 부치지 못할 기인 편지를 쓴다.
"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표기하지 않고 왜 행을 갈아가며 표기했을까?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리듬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리듬이 함축하는 의미 때문이다.
" 손발이 시린 날은 / 일기를 쓴다"는 시행을 읽는 경우 무엇이 다른가?
전자의 경우 우리는 중간에서 쉬지 않고 비슷한 속도로 리듬 없이 계속 읽어 나간다.
예컨데 "손발이 / 시린 날은 / 일기를 / 쓴다"처럼 중간에서 쉬고
동시에 이런 휴지에 의해 우리는 "손발이"와 일기를"을 강조하게 된다.
이 두 부분, 특히 "손"과 "일"에 강세가 놓인다.
한편 이런 읽기는 산문과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산문의 경우 의미는 "손발이 시린 날", 그러니까 추운 날은 일기을 쓴다는 사실,
곧 하나의 정보뿐이지만 시의 경우 "손발이 시린 날"은 독립적인 의미를 띠면서 다음 행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행은 단순히 부사구의 기능, 말하자면 "일기를 쓴다"는 중심 문장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2연의 "무릎까지 시려 오면"과 대립되고,
따라서 추위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시린 손발과 일기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가?
손발이 시린 시간에 어떻게 일기를 쓴다는 말인가?
물론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손발이 시리면 따뜻하게 녹여야지 무슨 일기인가?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아이러니이고 이런 표현이 시적 효과를 준다.
요컨대 행갈이 때문에 "시린 손발"은 추위에 대한 감각, 삶의 추위, 가난, 고독을 의미하고
"일기" 역시 자기 성찰, 자기 고백, 지기와의 만남 같은 여러 의미를 함축한다.
이런 의미는 가슴이 시린 밤이면 시를 찾아 나서고(3연), 등만 보이는 사람을
보이는 사람을 부르고(4연) 마침내 자신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서리꽃으로 인식하는(5연) 전체 시와 관계된다.
중요한 것은 리듬 때문에 행갈이를 하고 이런 행갈이가 독특한 시적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
그렇다면 리듬rhythm이란 무엇인가?
리듬이란 흔히 율동 혹은 운율로 번역한다.
그러나 좀더 세분하면 첫째로 율동이라는 일반적 개념,
둘째로 운율이라는 문학적 개념,
셋째로 음의 강약을 나타내는 박자라는 음악적 개념,
나는 다른 책에서 리듬을 광의 율동 개념과 협의으의 운율 개념으로 나누어 살핀 바 있다.
율동이란 주기적인 반복 운동이고 운율이란 시의 경우 소리에 의한 주기적 반복 운동을 뜻한다.
따라서 광의의 개념인 율동은 시를 포함하여 일제의 우주현상, 자연현상, 생명현상에 두루 나타난다.
율동은 좀더 부연하면 상이한 요소들이 재현하는 주기적 반복 현상을 말한다.
우주의 경우 일출 / 일몰의 반복, 자연의 경우 바다는 썰물 / 밀물의 반복,
생명의 경우 인간의 호흡이 그렇다.
내쉼/ 들이쉼의 반복이 삶이고 이런 반복이 머추면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숨쉬기이고 숨쉬기는 호흡이 암시하듯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일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호흡은 숨결을 거느리고 그것은 숨쉬는, 호흡하는 속도나 높낮이를 뜻한다.
요컨대 호흡과 숨결은 생명의 본질이고 시, 음악, 회화의 리듬도 비스한 의미르 띤다.
시의 고향이 리듬이고 리듬이 숨결이라는 것은 이런 사정을 전제로 한다.
시의 경우 리듬은 크게 정형시와 자유시로 나누어 살필 필요가 있다.
정형시는 말 그대로 리듬이 일정한 형식을 소유하고, 자유시는 그런 형식에서 자유롭다.
정형시의 리듬은 율격meter과 각운rhyme이 대표적이고
자우시의 경우도 작운은 존재하고우리 시의 울격은 흔히 음수율, 음보율,로 나타난다
자유시의 리듬은 정형시의 울격이나 일상어의 억양를 변형시킨 경우와
리드의 단위로 이런 소리 요소를 포기하고 형태소,
낱말, 어귀, 이미지, 어절, 통사 및 그 형식의 반복에 의해 성취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리듬의 단위를 소리에 두는 경우와 소리가 아닌 문법적 요소에 두는 경우이다.
전자를 전통적 리듬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현대적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는 김소월, 박목월, 등이 후자에는 이상, 김수영 등이 포함되고,
나는 자유시의 리듬이 보여주는 이런 양상을 다른 책에서 살핀 바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른 문제들을 살피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리듬, 곧 형태소, 낱말, 어구, 어절, 이미지, 통사 형식의 반복에 대해서는 내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이미 발표한 <반복, 반복, 반복>에서도 말한 바 있다.
물론 그때는 리듬이 아니라 시적 효과를 강조했지만 아무튼 반복이 문제이다.
글쓰기도 반복이고 히쓰기도 반복이고 사랑도 반복이고 식사도 반복이고 감기도 반복이고 우울도 반복이다.
반복이 삶이고 삶은 호흡이고 숨휘기이고 이 호흡과 숨결이 강조되면 리듬이 된다.
먼저 어절의 반복에 의한 리듬의 보기.
나는
쿠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만져보고 싶었고
모든 것을
느끼고 싶었고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_ 체게바라,<쿠바>(이산하 엮음)
어절의 반복이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반복을 말하고,
이 시의 경우 '모든 것을 /만져보고 싶었고' 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내용의 반복이 아니라 ' -고 싶었고'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이 시의 내용은 아르헨티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쿠바로 건너가 카스트로와의만남을 계기로 게릴라 혁명 투쟁에 임한 게바라의 쿠바에 대한
애정, 물론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반복되는경우도 있다. 다음은 문장의 내용이 반복되는 경우.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운동주, <8복 --마태복음 5장 3~12절>
시인은 동일한 문장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반복하고
한 행을 비운 다음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문장으로 시를 완성한다.
완성인가?
다시 생각하면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문장은 '슬플 것이다'가 아니기 때문에
침묵을 내포하는 진술 형식에 가깝고,
그러므로 앞에서 반복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 대한 아이러니의 효과가 강조된다.
물론 이런 형식은 리듬과 함께 8복이라는 내용을 전제로 한다.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자유시에도 운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형시뿐만 아니라 자유시의 경우도 각운rhyme에 의해 시의 음악성이 강조된다.
각운은 흔히 낱말의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는 현상,
한국어의 낱말은 일반적으로 초성, 중성, 종성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각운은 초성이 반복되면 두운alliteration, 중성이 반복되면 요운internal rhyme,
종성이 반복되면 말운rhyme이 된다.
각운이란 말은 운율을 맞춘다는 의미와 머리, 허리, 다리에서 다리가 되는 운,
곧 말운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각운은 광의로 두운, 요운, 말운을 포함하고 협의로는 말운에 해당한다.
물론 각운은 낱말과 낱말 사이에도 적용되고 시행과 시행 사이에도 적용된다.
다음은 낱말과 시행 양자에 걸쳐 두운이 나타나는 경우.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려볼까
- 김소월 <천리만리>
먼저 낱말의 경우 1행에는 "말리지 / 못할 / 만치 / 몸부림치며"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낱말의 머리에 "ㅁ"이 반복되는 두운 현상이 나타난다.
"만치"를 독립된 낱말로 읽지 않는 경우 1행은 "못할 만치 / 몸부림치며"가 되고 이 때는 "못할 / 몸부림"의 두운 현상 "-만치 / -림치며"의 요운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1행의 첫소리, 2행의 첫소리, 3행의 첫소리는 모두 ㅁ으로 시작되는 두운 효과를 준다.
문제는 말운이고, 정형시의 경우도 우리시에는 말운 현상은 없고 운 대신 형태소나 낱말이 반복된다.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가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것은 무슨 사상의 깊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성 때문이고,
그것도 두운과 요운 현상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중략)......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먼저 "하늘을 우러러"가 문제이다. "하늘을 우러러"란 무슨 뜻인가?
정확하게 표기하면 "하늘을 쳐다보며"이거나 "하늘을 공경하며"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라고 표현한다.
"쳐다보며". "공경하며"가 아니라 "우러러"라고 표기한 것은 무엇보다 요운의 효과 때문이다.
"하늘을 / 우러러"의 경우 "-ㄹ-/ -ㄹ-"이 반복되므로써 요운 현상이 나타나고.
따라서 "하늘을 쳐다보며"나 "하늘을 공경하며"가 단순한 의미 전달을 목표로 한다면
이런 표기는 미적 효과를 목표로 하고 시가 예술일 수 있는 것은 이런 미적 책략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 점"도 문제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
결코 부끄럼이 없기를" 혹은 "죽어도 부끄러움이 없기를" 이라고 말한다.
혹시 일부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하는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서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말에는 시간을 알리는 경우나 점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아니면 "한 점"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그것도 한 점 부끄러움이라니?
그렇다면 두 점 부끄러움도 있고 세 점 부끄러움도 있단 말인가?
이런 표기는 앞에 나온 "하늘"과 관계되는 바.
두 낱말 모두 첫 소리가 ㅎ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두운 효과가 있다.
요운 현상은 2행 "부끄럼이 없기를"에도 나타난다.
"-ㄲ-/-ㄱ-"의 반복이 그렇다. ㄲ과 ㄱ은 다르지만 이 시행이 경우 비슷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이 아름다운 것 역시 "-밤-/-별-/-바람-"의 요운 현상 때문이다.
결국 윤동주의 <서시>는 사상이 아니라 소리 효과, 음악성,
그것도 섬세한 운의 효과가 감동을 주고 그의 시가 명시인 것은 이런 예술성 때문이다.
우리시에는 정형시든 자유시든 말운 현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각 시행의 끝이 비슷한 혹은 같은 소리로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말운은 아니지만 각 시행의 끝에 비슷한 혹은 같은 소리가 음으로써 미적 효과를 낳는 경우는 많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각운rhyme은 각 시행의 끝소리가 같은 소리로 조직되는 것이고,
따라서 협의로는 말운을 뜻한다.
그러므로 두운 역시 각 시행의 첫 소리가 같은 소리로 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 가운데 김소월의 시가 두운 현상에 적합하고
윤동주의 경우는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운 현상 역시 각 시행 중간에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경우이고
한 시행 속에 나오는 경우는 요운의 변형,
혹은 자음조화consonance나 모음조화assonance로 읽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말하자면 "팔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는 자음조화,
"마치 천리 만리나"는 모음조화로 읽을 수 있다.
우리시의 경우 각 시행이 끝이 같은 소리가 오는 이른바 말운 현상은 없지만 비슷한 소리(?)가 오는 경우는 있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듯 눈엔 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말운의 정확한 보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시의 미적 효과는 각 시행의 끝에 비슷한 소리가 오기 때문이다.
1행, 3행, 7행은 "끝없는 / 뻔질한 / 끝없는"의 ㄴ소리가 반복되고
2행, 4행, 8행은 "-네 / -네"의 같은 모음이 반복되고
5행, 6행,은 "듯 / 곳"의 ㅅ소리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런 소리의 반복은 말운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의 경우 각 소리들은 각 낱말의 종성에 위치하는 소리가 아니라
낱말이거나 어미 활용에 속하고(끝없는, 흐르네,인 듯)
굳이 종성에 위치하는 소리를 찾자면 "곳"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ㅅ소리를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소리는 운이 아니라
"곳"이라는 낱말의 반복이기 때문에 말운이 아니다.
여컨대 우리시의 경우 말운이 아니라 같은 어미나 낱말이 반복되고 이런 반복이 미적 효과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