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주곡-김 미현(케서린) 피아노 듀엣 연주회
청야/김민식
빅토리아 데이 연휴가 겹친 토요일 오후,
모두가 빠져나간 듯 캘거리 시내가 한적하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모처럼의 봄비다운 봄비, 얼마 만인가. 일정에 쫓겨 이곳저곳 들리느라 아침도 거르고 허겁지겁 돌아다 기진맥진이다. 오늘 마지막 일정인 오후 2시, 피아니스트 김 미현 교수의 <봄의 전주곡 ; Prelude to Spring> 피아노 듀엣 연주회가 열리는, 마운트 로얄 대학 콘서버토리 구내의 Trans Alta Pavilion Hall로 향한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다.
봄비를 맞고 싶다. 한 맺힌 여인의 눈물을 맞고 싶다.
로키산맥 동쪽에서 실컷 울어 눈물이 메마른 아낙네 들이 캘거리로 넘어올 즈음이면, 지쳐서 더 울 기력이 없는 여인들이, 찔끔 뿌리고 가곤 하더니, 오늘은 무엇이 이들을 서럽게 만들었는지 부슬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주차장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를 봄비를 맞으며 걷는다. 여유롭다, 빠르게 걷다가, 때로는 두리 번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는 또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기이하다.
어느새, 춤추듯 걷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일본 영화 노다메 칸타빌레의 OST 배경음악을 연상하며 알레그로에서 안단테로 다시 알레그로 리듬으로, 얼굴에 내려앉는 물방울은 또르르 피아노 건반 소리, 아스팔트 위의 고인 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피아노 건반 위의 4손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 피곤이 싹 가시며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봄을 알리는 듯 귀에 익숙한 피아노 전주곡들이 귓전을 울린다. 여인들이여 실컷 우소서, 펑펑 눈물을 이고 가리다. 그대의 눈물을 열정으로 데워 희망을 뿜어 내리리다.
며칠 전부터, 오늘 연주할 피아노 듀오 파트너 린 뉴엔 (Linh Nguyen) 교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 대를 위한 소나타(모차르트), '판타지(슈베르트)'를 동영상과 해설을 반복해서 들은 탓이리라.
나는 김미현의 피아노 연주를 좋아한다.
그동안 다섯 번의 연주회에 참석했다. 'Fate', 'An Evening of Chamber Music', 'Prelude to Spring' 등 연주 제목들이 주로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내용을 품은 자선공연 콘서트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피아노 듀엣 연주를 좋아한다. 홀로 고독 속에서 힘겹게 연주하는 것 같은 안타까운 느낌으로 감상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음악적 교감을 나누는, 서로 음악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배려하며 재 창조를 하는 활력을 유발하는 연주를 좋아한다. 아주 긴밀한 신뢰 관계가 없으면, 연주에 몰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시종일관 몰려오며 긴장감을 더하게 한다. 그것이 듀오의 연주가 지닌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누가 음악 연주회가 지루하다고 했는가.
어림잡아 2.000스퀘어 피트 정도 되는 소극장, 나는 피아노 옆, 한 키 남짓 거리에 바짝 붙어서, 15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한 맨 앞자리에 자리 잡았다. 서로 호흡을 맞추느라 파트너 린 유엔의 샐룩거리는 입술과 눈망울을 깜박거리며 서로를 신뢰하는 표정들을 관찰하며 연주 곡에 푹 빠진다. 어느새 1시간 30여 분이 빠르게 지나간다.
신기하다.
나는 몇 년 전, 캘거리 잭싱어 콘서트홀에서 캘거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하모닉 합창단과 베토벤 교향곡 9번 공연에, 한인합창단원으로 합창단에 합류했다. 합창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서 깜박 조는가 하면, MRI 자가공명 뇌 촬영을 할 때는 그 요란한 굉음 속에서도 누운 채로 코를 골며 졸고 있었다. 옆에 있던 동료나 촬영기사들이 혀를 내두르며 이런 모습을 것을 처음 본다고 했다. 시간 쪼개며 바삐 움직이는 이민 생활, 지루한 순간에는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점점 정신이 맑아진다. 가게 일이 끝난 오후 늦은 밤,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 같은 밤, 창공의 별들이 총총하게 빛났더라면, 나는 다시 가게의 뒷마당으로 돌아가 피아노 소나타 CD를 틀어 놓고 하얀 막걸리 사발에 백포도주를 따라붙고는 별들을 가득 담아 흥건하게 마시며 취했으리라.
캐서린 김의 피아노 듀엣 파트너 린 뉴엔 교수와는 지난 헤 10월 공연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어 오늘 그 절정의 순간순간을 감상하는 행운의 기회가 온 것이다.
<모차르트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K.448>
나는 이 곡에 익숙하다. 그의 여자 제자 아우어른 하머와 듀오 연주를 위해 작곡한 곡이고, 어린아이가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여 한때 '모차르트 효과'라고 소개되었다.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만화와 드라마로 더욱 유명한 곡이다. 2악장을 틀어 놓고 눈을 감고 있으면 신기할 정도로 머리가 맑아지며 피로가 가시는 체험을 한다.
오늘 피아노 바로 옆에서 두 연주자의 얼굴에 시선을 맞추며 감상하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유할까. 지금 꿈속에서 들려오는 모습들을 그린다.
<슈베르트 ; 4손을 위한 판타지 D940>
피아노 한 대로 4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서로 어깨를 밀착한 채 연주하는 두 교수의 모습이 이렇게 다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가 하면 이내 환한 모습으로, 때로는 어깨를 밀착한 채, 물결이 인다. 완벽한 호흡으로 연주가 끝났을 때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그칠 출 모른다. 완벽한 호흡을 이뤄낸다. 선남선녀 의 아름다운 자태란 이런 것일 것이다. 인생은 모름지기 예술에 몰두하며 서로를 배려할 때 감추어 두었던 아름다운 모습이 발현되는 것, 나는 몇 년 전 한국 드라마 '밀회'를 보면서 배경 음악으로 무수히 들었던 친숙한 곡이 오늘 연주자에 의해서 재현되는 행운을 얻고 있는 것이다.
쉬는 시간 없이 연주는 계속 이어간다.
<구아스타비노 ; 세 개의 로맨스> <루토슬라비스키 ; 파가니니 변주곡>
. 마치 낙엽이 또르르 구르는 표현 같기도 하고 겨울을 이겨낸 민들레가 꽃을 피우며 소슬 소슬바람에 춤추듯 약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한, 아르헨티나의 정열적인 음악에서 벗어나 잔잔히 흐르는 영화 음악을 감상하는 듯하다.
파가니니 변주곡도 20세기 현대 음악이지만 별 부담 없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감상했다.
앙코르곡으로
<슈베르트 ;군대 행진곡>이 끝나자 청중의 박수 소리가 그칠 줄 모른다.
나는 김미현의 연주를 접한 이후, 지금 클래식 듀오 피아노 연주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다.
김미현 교수(B. Mus, M. Mus, D.M.A, Piano Faculty, Mount Royal University Conservatory)는 캘거리에서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줄 곳 피아노 연주자, 교육자로서 한 길의 목표를 세우고 정진했다. 언제인가 주일 날 아침, 교회 학생 예배 시간에 늦을 세라 운전을 해 준 기억이 있다.
"나의 꿈은 음대 교수로서 훌륭한 교수가 되는 것이에요"
미네소타 주립대학 피아노 박사과정을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한 수재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극복하고 외길을 달려왔다. 그리고 미국에서 좋은 조건의 직장들을 마다하고 당당히 캘거리의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캘거리 음악 교단의 젊은 주류로서 선두를 지키고 있다.
그게 쉬운 길인가.
나는 김미현의 깊은 철학적 사유가 베인 연주를 듣는다. 어느덧 그의 연주에 점점 함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제자를 육성하고 가족과 함께 지내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그를 곁에서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