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1 - 안유환
끼룩끼룩기럭이 외짝기럭이/ 하날맑은가을밤 달은밝은대/ 끼룩끼룩어대로 울고가느냐/
달밝은가을밤에 어마생각고/ 풀은하날놉흔대 울며서가내/
끼룩끼룩기럭이 외짝기럭이
서리오고바람찬 가을달아래/ 디망읍시어대로 울며서가나
위 글은 올해로 산수(傘壽)를 맞으시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2살 때 지은 「기럭이」라는 제목의 동시이다. 그때는 일정시대로 늦게 학교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이 동시가 실린 등사판 문집은 학교에서 만든 것이며 3·4학년의 글 중에는 일본어로 쓴 것도 보인다. 내가 이 낡은 문집을 처음 대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것 같다. 아버지가 법조공무원으로 멀리 의성으로 전근을 했기에 어머니도 어린 동생 하나를 데리고 함께 가셨다. 얼마 후에는 나보다 두 살 위인 형도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하여 부모님과 합류했다.
나도 진작부터 부모님을 따라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유환이는 젊잖지-”라는 말로 달 래면서 나를 할아버지 집에 남겨 두었다. 아버지는 노 부모님을 고향에 두고 자식들을 다 데려가는 것이 불효인 것 같아 할머니 말벗으로 나를 혼자 남겨놓은 것일까?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것이 몹시 싫었지만 내색은 하지 못하고 젊잖게(?) 고향에서 살았다.
그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지내던 나는 부모님이 쓰던 아랫방을 내가 혼자 쓰도록 허락을 받았다. 어느 날 공부를 하다 외롭고 심심하여 아버지의 책을 뒤져보다 나는 아버지의 동시를 읽게 되었다. 홀로 있던 어린 시절은 많은 생각을 하게했고 그 ‘외짝 기럭이’는 나의 모습 같았다. 다른 책갈피에서는 어머니의 독사진을 발견하고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리움을 달랬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의 글이 오늘까지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것은 그때 나의 외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룩룩기럭이 외기럭이-”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마에 주름이 늘어가는 아버지 생각이 떠오르면 이 ‘기럭이’ 첫 소절을 한 번씩 되뇌어 보곤 했다. 그동안 아버지는 경주로 전근하여 근무하다 5·16직후 퇴직한 뒤에는 포항으로 돌아와 정착을 했다. 그때까지 나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는 공업단지 조성에 밀려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고향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 마을이 오늘도 하얀 김을 계속 뿜어대는 제철단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포항으로 돌아오신 후 할머니와 나는 아버지 집으로 합류 했다. 포항은 옛날의 인구 5만에서 오늘날 50만이 넘는 도시로 커져버렸고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을 세월이 흘러갔다. 내가 결혼을 하고 고향을 떠나 따로 가정을 이루어 생활한지도 어언 30년이 가까웠다. 고향산천이 변하고 어릴 적 친구들이 나를 떠나갔지만 아버지의 외짝 기러기는 오늘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내 마음속을 날고 있다. 그러나 그 문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연초에 아버지가 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실 때 병문안을 갔다가 혹시나 하고 ‘기럭이 문집’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아버지는 서슴없이 “그것 내 서재에 두었다.”고 대답했다. 그해 추석에 고향에 갔을 때 아버지는 간직하고 있던 그 문집을 내게 건네주셨다.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의 편지를 대필해주기도 했다는 얘기를 할머니로부터 들었으나 아버지가 글을 썼다는 말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혼을 불어넣는 일이다. 열두 살 때부터 오늘까지 70년이 가까웠는데도 아버지는 이 기러기 동시가 실린 문집을 분신처럼 고이 간직하셨던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문집을 펴놓고 마치 한편의 설교를 준비할 때 성경을 읽는 것처럼 아버지의 「기럭이」를 열 번도 더 읽어보며 생각에 잠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서쪽하늘에 외로운 기러기 한 마리를 보았을까? 가을밤 부모님의 심부름을 가다가 울면서 날아가는 외짝 기러기를 보았을까? 달 밝은 가을밤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옛날 화장실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하늘을 쳐다본 것인가? 아니면 가을밤이 그저 좋아 혼자서 달을 쳐다보고 앉았는데 짝 잃은 기러기가 외롭게 날아가고 있었을까?’
나는 한창 부모님이 필요한 시기에 외짝 기러기처럼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런 삶은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 멀리 있는 외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것 같았고 나는 차츰 할머니가 부모님보다 더 좋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때를 맞아 심한 고독을 느꼈으며 이것이 내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는 맨 먼저 나와 함께 고향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어머니를 비롯해 형제들까지 차례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좀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음 얼마동안은 추석이나 설 명절에 차례를 지낼 때 아버지는 내게 절을 해야 한다고 말씀했으나 나는 순종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싫어지고 멀게 만 느껴졌다. 그러던 아버지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실 때 하신 유언으로 인해 주님을 영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가 내게 더없이 가까이 느껴진 것은 종교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산에서 일주일에 한 두 차례씩 문안 전화를 드릴 때면 나는 아버지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한두 마디 안부를 묻고 나면 아버지는 곧 바로 “너희 엄마 바꾼다.”고 말씀하시고는 수화기를 어머니께 넘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는 아버지가 나의 전화를 계속 받게 되었다. 보청기를 이용하는 어머니의 귀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머니가 전화 음성이 잘 안 들린다면서 수화기에 대고 우셨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전해 듣고 나는 다음날 새벽에 포항으로 달려간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사군자와 서예를 취미로 하고 계셨고 여느 새벽처럼 서재에서 붓글씨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아버지는 필체가 좋다는 찬사를 들어왔다. 아버지는 계속 운필을 하시면서 어머니의 귀가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몹시 걱정했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전에 없던 수심과 외로움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마음이 아팠다. “룩룩 기럭이 외 기럭이/ 서리오고 바람찬 가을달 아래/ 디망읍시 어대로 울며서 가나”. 두 분이 더 건강하시고 더 오래 사셔야 하는데-.
나는 그날 아침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신문에서 읽은 노인건강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노년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언제나 미래를 설계하며 하고 싶은 일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서예와 사군자 작품을 미리부터 하나씩 준비하여 언젠가는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형님과 함께 ‘부자 개인전’을 열도록 하면 좋겠다는 말씀도 드렸다. 아버지는 동호인들의 한일교류전에도 출품하며 부지런히 서예에 정진하셨고 우리 집에도 한 폭의 ‘죽’이 걸려있다. 아버지 서실에는 붓글씨 연습지만 수북이 쌓여갔다. 나는 뵈올 때마다 개인전 준비를 말씀을 드렸으나 아버지는 “아직 멀었다.”고 늘 겸손해 하셨다.
p.s-미수(米壽)에 소천하신 아버지는 ‘개인전’을 영원한 숙제로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