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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네 별장
안유환
‘승조는 지금쯤 그림 같은 별장에 살고 있겠지. 그것이 그의 꿈이었으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네 집을 찾아가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겨울 법평리 마을은 적막하리만큼 조용하다. 마을 앞 정자나무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비탈길 외길로 1km 정도 더 차를 몰았다. 황매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잘 닦여 있었다. 15년 전에는 등산로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1시간 가까이 걸어서 올라갔었다. 그 길이 이제는 두 대의 차가 교차할 수 있도록 넓어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계속 차를 몰아가면 정상 부근의 영화촬영장 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중간쯤 계곡 쪽으로 들어간 승조의 별장지역까지는 아직 찻길이 제대로 나있지 않았다. 12월 중순 다랑논에는 젖소 사료용으로 하얗게 포장된 볏짚 곤포사일리지가 여기 저기 굴러 있고 산자락에는 낙엽이 진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낙엽송들이 하늘은 향해 떨고 있다. 승조의 별장 쪽으로 가는 급경사 오르막길에는 울퉁불퉁한 돌부리가 박혀있었다. 힘센 트럭이나 사륜구동 지프차라야 올라갈 수 있는 길이었다. 나는 한차례 시도를 해보다 승용차를 그 비탈길 입구에 주차했다. 목적지 까지는 아직 500m는 더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멋있는 별장을 지어 놓았을까?’
나는 승조의 삶이 참으로 궁금했다. 처음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갑기는 했으나 한편으로 괘심한 마음과 배신감이 머리를 쳐들었다. 승조가 그렇게 변할 줄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귀국한 지 8년이 지났는데도 왜 나에게 한 번도 연락을 주지 않았을까? 지난 달 내가 송도에 있는 옥포 가든에 갈 때까지만 해도 승조는 미국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주인마담은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혹, 거제에 살지 않았어요?”
나는 마담에게 물었다.
“어머-, 이게 누구신가요. 박 사장님 아니세요.”
마담은 반색하며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십여 년 전 장승포에서 다방을 열고 있었다.
“여기 온지 얼마나 되었나요?”
나는 J마담에게 그간의 소식을 물었다.
“진주에서 한 3년 살았어요. 부산에 온지도 벌써 5년이 넘었네요. 김 사장과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까?”
J마담은 뜻밖에 승조의 이야기를 꺼냈다.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잘 지냅니까? 미국으로 가고 나서 한두 차례 연락이 있었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워싱턴에 살고 있겠지요.”
나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승조를 떠올렸다.
“김 사장이 귀국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니,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마담은 김 사장의 귀국을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진주에 살 때 우연히 거제에서 한번 뵌 적이 있는 김 사장의 누나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고도 7,8년이 흘렀네요.”
승조의 연락처를 물었으나 J마담은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살기 바쁘다보니 지난날의 인연들을 챙겨볼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8년 전에 그가 귀국했다는 말을 듣고 모른 체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혼자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나만큼 승조와 가까웠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필경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급한 것은 그의 거처를 찾는 일이었다. 3남매 가운데 승조의 누나는 진주 교외에 살고 있고, 여동생은 남편과 함께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나는 그의 친척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제는 승조도 60대에 접어들었으니 새로운 사업을 펼치기 보다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창 잘 나갈 때 황매산 중턱에 별장 부지를 마련해놓았다.
틈나면 함께 즐겨 등산을 하던 승조와 나는 십여 년 전 철쭉꽃이 만발한 황매산에 올랐다. 5월초 온 산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합천 쪽에서 오르는 길은 시골장터처럼 붐볐고 산 아래 입구 주차장에는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빼곡히 넘쳐나고 있었다. 승조와 나는 황매산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 할 때는 반대편 법평리 쪽으로 내려왔다. 붐비기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였다. 늘어선 포장마차 뒤쪽으로 뚜렷이 눈에 들어오는 광고간판이 있었다. ‘별장 부지 매매’. 그때는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은 유행처럼 한적한 곳에 별장 부지를 마련하고 있었다. 승조는 그곳이 산세가 너무도 아름답고 물도 좋기 때문에 마음이 끌렸다. 그때는 영빈관 식당이 한창 잘 되던 때라 식당을 확장하고 주차장을 넓혀가는 것 외에 노후를 편히 보낼 장소를 물색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고, 진주까지는 한 시간 거리입니다. 교통이 편리해서 외지인들이 이용하기에 딱 좋습니다.”
부동산 소개업자는 침이 마르게 권유했다. 부지 위치는 황매산 중허리였다.
“오르기 힘들고 너무 높지 않습니까?”
승조가 비탈진 등산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해발 600m 지역이 건강을 지키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학자들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부동산 소개업자는 자신 있게 말했다.
부지를 둘러본 승조는 마음에 흡족하여 더 이상 다른 것은 물어보지 않았다. 부지 대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승조의 사업규모에 비하면 그것은 떡값에 불과했다. 15년 전 땅값은 평당 700원, 100만원을 주고 1500평을 구입했다. 동남향인 부지 바로 옆에는 황매산 정상 쪽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의 맑은 물, 언제나 철철 흐르는 물은 마르는 때가 없다고 한다. 땅 주인이 심었다는 낙엽송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고 상수리나무, 물푸레나무, 개똥나무가 우거지고, 철쭉꽃이 비탈을 장식하고 있었다. 펀펀하게 경사진 한쪽에는 누군가 이미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고 있었다. 승조와 나는 한차례씩 황매산을 등산할 때마다 이 별장 부지를 찾아왔고 승조는 노후생활의 꿈을 키웠다. 아직도 승용차로 오르기는 어렵지만 비탈길은 걷기에 그렇게 힘 들지 않았다. 사업수완이 있는 승조가 귀국했다면 그는 분명히 돈을 많이 벌어왔을 것이고 지금쯤 별장부지에 하얀 집을 짓고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승조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황매산 별장 부지를 찾아가고 있다. 내가 승조의 은혜를 입은 것은 오늘까지 잊을 수 없다. 나보다 3년 앞서 승조는 장승포에 식당을 열었다. 그가 식당을 열기 전에는 잠시 같은 회사동료로 지낸 인연 밖에 없었던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의 주선으로 나도 조그만 식당을 열었고 생계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때는 죽도 삼성중공업과 함께 옥포조선소가 문을 열고 있을 때였다. 옥포조선소가 종합준공을 하고 선박수주가 세계1위를 달성하는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직원가족들의 이사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지역발전은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 양대 조선소에서 일하는 인원이 약 5만 명이며 여기에 납품하는 각종 중소기업들까지 더하면서 인구는 더욱 많아졌다. 승조의 식당 영빈관은 시설을 두 배로 확장을 했고 제2, 제3의 분점도 열었다.
시설이 확장되면서 어려움도 함께 따랐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방장의 이동이었다. 식당을 다시 찾는 고객들에게는 주방장이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종업원들이 아무리 친절해도 주방장이 바뀌면 용하게도 고객들은 달라진 음식 맛을 알아차리고 차츰 외면했다. 손님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방장의 처우도 좋아져야 한다. 그러나 주인이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계절이 바뀌거나 새해가 되면 주방장은 다른 업소로 자리를 옮겼다. 음식점의 수준을 유지하려면 부득불 멀리 부산이나 진주 또는 마산에서 주방장을 스카우트해야 했다. 승조는 주방장이 새로 오면 사장인 본인이 직접 시다바리처럼 일하며 비위를 맞추어갔다. 이런 뒤치다꺼리를 통해 주방장이 음식을 조리하는 법을 어깨너머로 조금씩 익혀갈 수 있었다. 어쩌다 주방장이 몸이 불편하거나 갑자기 이직을 해도 잠시 동안은 승조가 응급조치를 할 수 있었다. 승조의 음식솜씨는 주방장의 부재를 고객이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익숙해져갔다. 승조는 새로 오는 조리사로부터 새로운 노하우를 배웠고 같은 음식에서도 그 조리사만의 독특한 비법도 조금씩 터득할 수 있었다.
마침내 승조는 그 어려운 조리사 자격증까지 따내며 승승장구했다. 승조는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석 달 동안 씨름을 했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끊고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 나는 그를 거의 만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을 땐 일주일에 한 두 번은 함께 술을 마셨다. 승조는 애주가이면서 때로는 폭주를 했다. 그래도 이튿날 식당운영은 차질이 없을 만큼 건강이 좋았다. 내가 쉬는 날 만나고 싶어 전화를 하면 그때마다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이렇게 어느새 석 달이 흘러갔다.
“동우야-, 한 잔 어때?”
어느 날 뜻밖에 승조가 전화를 걸어왔다.
“어떻게 되었어?”
나는 먼저 그의 조리기능사자격 시험 결과를 물었다.
“어떻게 되긴, 한다면 하는 거지!”
승조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모처럼 통영으로 나갔다. ‘달빛 다찌집’은 오랜만에 찾아간 우리를 반가이 맞았다. 그 집에는 정해진 메뉴라는 게 따로 없었다. 다찌집의 맛을 제대로 보려면 술을 많이 시키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언제나 술의 양에 비례해 안주는 엄청나게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값은 서민수준으로 비싸지 않고 고객이 되면 별미를 덤으로 얹어준다. 승조와 나는 그런 다찌집 음주문화가 그리워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갔었다.
“오랜만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주인아줌마가 우리를 보고 반색을 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승조와 나는 충무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방에 자리를 잡았다. 다찌집에서 낮술을 하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승조의 잔을 가득 채우고 승조도 나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정말 힘 들었어! 머리에 잘 들어가지는 않고―.”
승조가 첫잔을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대 영빈관 사장이 새삼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엇다 써 먹으려고?”
나는 승조의 빈 잔을 채우며 물었다.
“그 놈의 조리사들이 하도 자주 바뀌니-! 내가 뭘 알아야 사람을 부릴 수 있지 않겠어. 야구나 축구 감독처럼 음식점의 감독도 전문가 수준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
승조는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필기시험도 어려웠지만 실기시험은 더했다. 어떤 과제가 출제될지 감을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필기시험을 합격하고 실기시험을 치르기 위해 마산 K대학에 갔을 때는 60여명의 응시자들이 몰려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들이었고 남자는 열 명도 안 되었다.
“어떤 문제가 출제 되었어?”
나는 그가 어떻게 합격했는지 궁금했다.
“잡채와 북어찜. 그 많은 한식 가운데 다행히 우리 집 명품 메뉴가 출제되었어. 실기시험에 있는 한식종목만도 50~60가지가 넘는데 어느 것이 나올지 아무도 모르지. 내가 오전 10시 시험을 위해 9시쯤 현장에 도착했는데 먼저 시험을 치른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어.”
승조는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야-. 만둣국이랑 무생채, 망쳤어!’ 라는 말을 듣고서 8:00 시험과목이 만둣국과 무생채가 출제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승조가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합격통지를 받은 것은 바로 하루 전이었다. 승조는 합격 자랑도 할 겸 그동안의 회포를 풀기위해 다음날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승조와 나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다찌집을 찾았다. 그만큼 승조는 술을 좋아했고 나도 그에 못지않은 주량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마음껏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귀가할 때는 대리운전기사를 부르지만 승조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마무리는 내가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그의 아내로부터 늘 곱지 않은 눈총을 받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이 독실한 그의 아내에게는 나 때문에 남편이 술을 더 마시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승조의 음식점은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1990년부터 1996년 까지는 우리나라가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기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잃어버린 10년’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반적인 경기는 매우 좋았다. 그때까지 가계는 멋모르고 과소비를 했고 기업은 문어발식 확장만을 일삼았다. 실업률은 더 이상 통계가 필요 없을 만큼 낮았고, GNP가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서는 것을 계기로 1996년에는 일명 경제 선진 국가단체인 OECD에 가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는 것을 홍보를 했다. 그러나 실제로 외환보유액은 바닥이 나고 1700억 달러의 막대한 외채가 우리나라 경제를 옥죄며 마침내 ‘1997년 외환위기’가 들이닥쳤다. 어려움은 현실로 나타났다. 눈부신 성장을 이루며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던 한국경제가 곤두박질을 하면서 사회는 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살률이 급증하고 이혼으로 인한 가족해체현상이 봇물을 이루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지 않고 방만한 경영을 해온 결과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자증가로 인한 경기확장은 과열이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진단도 있었다. 승조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설을 확장하고 체인점을 늘렸던 것이 타격을 입었다.
조선소가 해외수주를 제때 감당하지 못하고 기업이 부도가 나자 납품 업체들도 줄줄이 도산을 했다. 승조의 영빈관도 예외일 수 없었다. 종업원을 대폭 감원하고 구조조정을 해도 밀려드는 빚 독촉은 해결할 길이 없었다. 음식점은 밀려드는 어음을 막지 못해 개점휴업 상태였다. 마침내 승조는 어느 날 야반도주로 집을 떠났다. 그 후 서울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그는 노숙자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 기울어진 삶은 걷잡을 수 없었다. 한창 호황 때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차량들이 물결을 이루던 고속도로에 산업차량은 자취를 감추었고 나들이 승용차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해 가을에 접어들면서 나는 승조의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 있는 여동생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도미 한다고 했다. 얼마 후 그는 여동생이 경영하는 음식점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조리사 자격증을 따놓은 것이 참으로 요긴하게 쓰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빈관이 문을 닫고 나자 나의 음식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음식점을 헐값에 넘기고 언양 부모님 댁으로 들어갔다.
산새소리가 들리는 호젓한 산길을 오르며 나는 승조의 별장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통나무집일까? 벽돌집일까? 나지막한 목책 안으로 잔디가 곱게 깔린 마당을 지나면 회양목으로 둘러진 화단이 있고, 빈단 잉어가 노니는 연못도 있을 것이다. 연못에는 빗줄기 같은 분수가 솟아오르고 정원수들이 잘 손질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겨울에도 허전하지 않으려면 동백, 황매나무, 남천 등을 심어야 추울 때도 꽃과 잎을 볼 수 있다. 나는 봄부터 가을, 겨울까지 승조의 전원주택을 디자인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오르는 산길은 을씨년스런 풍경이며 겨울의 한가운데 서있었다. 낙엽송을 비롯한 활엽수는 나목이 되어 있고 여기 저기 한 그루씩 서있는 소나무들이 사라져간 초록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름철이면 숲에 가리어 10m 앞도 보이지 않을 숲속이 저쪽 건너편까지 환히 내다보인다. 승조의 별장은 더욱 뚜렷하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은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불과 300~400m정도의 오르막길을 오르면서도 숨이 가쁘고 등은 땀에 젖었다. 이제 조그만 마루를 넘으면 내가 승조와 함께 찾아가 보았던 별장부지가 있는 곳이다.
가까스로 고갯마루에 올라섰지만 승조의 별장은 보이지 않았다. 능선을 넘자 길은 잠시 평지처럼 두 개의 차바퀴 자국으로 이어져 있었다. 와본지 오래되어선지 지역이 낯설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굽어진 트래킹코스 같은 길로 내려갔다. 이제 곧 승조의 별장이 나타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여겨 살펴보아도 집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을까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방향을 바로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버적버적 했다. 잠시 후 갑자기 개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승조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빨리 했으나 별장은커녕 농막 같은 집도 보이지 않았다. 수소문해서라도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지 않고 무턱대고 찾아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나는 개짓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잠시 후 커다란 개집이 보이고 개 두 마리가 길 양쪽에 묶여 있었다. 한 마리는 덩치가 큰 맹도견이었다.
왼쪽에는 언덕 아래로 움막 같은 것이 절반쯤 형체를 드러내고 맞은 편 산자락에는 층이진 넓은 과수원이 보였다. 과목은 이제 묘목 수준을 벗어난 것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전지를 하던 한 남자가 개 짓는 소리를 듣고 아래로 내려와 내게로 다가왔다. 두툼한 아웃도어복장을 한 남자는 승조였다. 나는 그가 나를 알아보는지 시험해보려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누구야? 동우 아닌가!”
승조는 반갑게 소리 지르며 내게로 다가왔다.
“잊어버리지 않았군. 오랜만이야.”
나는 흥분을 감추고 그의 모습을 살폈다.
“어떻게 여기까지―.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승조는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J마담을 만났어.”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우선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양지다방 J마담 말이지? 지금은 어디 있는데?”
승조는 장승포의 J마담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산 송도에서 가든을 열고 있어.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러 갔는데,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지.”
“J마담이 내가 귀국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진주에서 3년간 음식점을 내고 있을 때 우연히 누님을 만났다고 말했어.”
나는 승조의 누나를 ‘누님’으로 불렀다.
“내가 귀국한 것은 누님밖에 몰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어. 귀국해서 한동안은 누님의 농장에 있었지.”
“J마담은 형이 귀국한 것만 알았지 연락처는 모르고 있었어.”
“누님에게 내 연락처는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거든. 여러 사람이 알게 되면 자네를 비롯한 친구들을 멀리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미국에서 무슨 죄를 짓고 왔기에 이렇게 숨어서 살지?”
나는 자기를 감추려는 그의 태도가 더욱 궁금했다.
“숨어 사는 건 아니야! 이제야 제대로 사는 것이지. 하루 밥 세끼 먹으면 되는데 무엇 하려 그렇게 욕심을 부리며 쉬지도 못했는지 지난날이 후회스러워.”
승조는 외환위기를 맞은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개울가 언덕에 놓여있는 커다란 통나무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한겨울이지만 황매산 정상 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햇볕은 따스하고 날씨는 봄날처럼 포근했다.
“어떻게 지냈어. 나처럼 노숙자가 되지는 않았겠지?”
승조는 웃으면서 나의 소식을 물었다.
“나는 형이 거제를 떠난 뒤에 부모님 댁으로 들어갔어. 달리 도리가 없었어.”
“언양에 계시는 부모님 말이냐? 지금은 연세가 많으시지?”
“아버님은 5년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님만 시골에 계셔. 올해 여든 둘인데 부산으로 모셔오려고 해도 살던 곳이 편하다면서 홀로 사시지.”
“부산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승조는 나의 삶이 더 궁금한 것 같았다.
“부산 공동어시장 중도매인으로 일하고 있지. 아버님 돌아가시고 이듬해에 부산으로 이사를 했어.”
내가 고향에 갔을 때는 친구들도 다 떠났고 마땅히 찾아갈 곳도 없었다. 어릴 적 다녔던 교회는 마을 한가운데 그대로 있었다.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 풍요로울 때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고 교회와 멀어졌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교회를 찾아들었다. 외환위기 때 번성한 곳은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교회밖에 없었다. 나는 고향을 떠난 뒤에는 교회를 외면하고 살았다. 그러나 실업자로 고향교회에 다니면서 인생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느 설에 고향에 다니러 온 친척 한분이 부산 공동어시장의 경매사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안내로 중도매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한 스팩이나 시험도 없고 성실함만 갖고 있다면 누구나 가능한 일자리였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농토를 붙들고 시골에 눌러 있을 수는 없었다. 새벽 일찍부터 일이 시작되는 공동어시장에서는 내가 고향교회에서 부지런히 새벽기도회에 다녔던 것이 미리 훈련을 한 것처럼 큰 도움이 되었다. 공동어시장은 새벽 6:00부터 경매가 시작되기 때문에 나는 4시경에 일어나 준비를 해야 했고 오후 3시 이후에야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 10월~12월 성어기에는 휴일도 없었다. 주일을 지키려면 일요일 위판장엔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승조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주변을 두루 살펴보았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별장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앉아있는 맞은편에는 내가 들어올 때 절반의 형체만 보이던 낡은 비닐하우스가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포근한 날씨인데도 황매산 중턱의 공기는 차가웠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왕년의 승조가 어떻게 저런 움막에서 살고 있을까?’ 승조에 대해 궁금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승조는 나에 대해서, 나는 승조에 대해 서로 많은 궁금증이 꿈틀거렸다.
“형수님은 어디계시지?”
나는 진작부터 궁금했던 것을 이제야 물어보았다.
“하늘나라에 있지!”
승조는 쓸쓸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는 두 분이 별장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알다시피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이 땅을 마련해 놓았지만 인생이 자기의 계획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내가 쫓기다 시피 집을 떠난 후 아내는 빚 독촉에 밤낮으로 시달리다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밤늦게 전화를 걸면 내 전화도 받지 못할 만큼 병약해 있었지만 노숙자 처지에 어쩔 도리가 없었지.”
승조는 견디다 못해 미국에 있는 여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여동생이 운영하는 ‘강서면옥’에 조리사 한사람이 부족하다면서 오빠가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내를 버려둔 채 승조는 미국으로 들어갔다.
“음식 만드는 일이야 내가 늘 하던 일이고 조리사 자격증까지 있으니 어렵지 않았지. 여건이 허락되면 아내를 미국으로 데려가려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어. 내가 강서면옥에서 일한지 한 달이 못되어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들었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참으로 비참한 상황이었지. 귀국해서 누나에게 들었지만 아내는 신경쇠약과 불면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거야. 내가 사람 노릇을 하지 못했지.”
승조는 손수건을 꺼내어 젖은 눈을 훔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형을 대할 면목이 없어. 식당을 헐값에 넘기고 고향으로 들어가서는 형수님께 연락한번 해보지 못했거든. 어느 날 영빈관 가까이서 체인점을 하던 홍 씨에게 형의 소식을 물었지만 모르기는 나와 마찬가지였어······.”
나는 변명을 찾아보았으나 달리 할 말이 없어 말끝을 흐렸다. 내가 살기 바쁘다보니 승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술만 더 마시게 되었고 살아야할 의미도 잃어버렸지.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어. 함께 일하던 룸메이트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승조는 외로웠던 미국생활을 회고 했다.
‘강서면옥’은 워싱턴에서 가장 이름난 한국 식당이었다. 8명의 전문 조리사가 있고 20여명의 여종업원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강서면옥은 한식, 중식, 일식으로 교포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덜레스 국제공항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인들도 미국에 오면 한 번씩은 들르는 음식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시절에 들렸고, 이회창 자민련 총재, 손학규 경기도지사 등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다녀갔다. 부대시설로 컨벤션홀을 갖고 있어 대사관 직원들이나 교포사회의 모임들도 강서면옥에서 자주 열렸다. 함께 있던 룸메이트는 술은 좋아하지 않지만 승조의 술자리에는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승조는 가슴에 쌓인 한을 그에게 풀어놓았다. 좀 마음의 안정을 찾고서는 룸메이트와 함께 골프장을 찾아 조금씩 기분을 전환해나갔다. 거기서는 20~25달러만 주면 하루 종일 골프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골프 치는 것만으로는 가슴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했다. 승조는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나타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저녁9시 쯤 퇴근을 하면 그때부터 술을 퍼마셨다.
승조와는 달리 룸메이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고국에 있을 때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도 미국에 오면 크리스천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어의 제약을 받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조는 그렇지 못했다. 승조는 고국에 있을 때부터 기독교와는 담을 쌓고 교회를 외면하거나 무턱대고 비판했다. 권사인 아내가 그렇게 간곡히 권유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내가 부흥집회 때 한번만 참석해달라고 애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승조의 무신론적 반응에도 룸메이트는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김 형, 우리교회 구역모임에 한번만 참여해보세요.” 룸메이트는 승조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한결같은 룸메이트의 권유이지만 승조에게 먹혀들리 만무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렇게 믿음 있는 아내가 어려운 처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 비극을 왜 막아주지 못했느냐, 는 것이 승조의 일관된 불만이었다. 지난날에도 주변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심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소리 높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승조가 퇴근길에 건널목에서 신호를 받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김 형, 지금 어데 계세요?”
룸메이트의 목소리였다.
“다운타운 리버워크 호텔 앞, 신호대기 중입니다.”
승조가 대답했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다음,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하여 직진하면 500m 거리에 공원이 나타납니다. 공원 맞은편 주거지역에 있는 교인 집에서 구역모임이 있습니다. 바로 오세요. 우리교회 목사님도 곧 도착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룸메이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간곡했다. 승조는 집에 가도 특별한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왠지 그의 권유를 계속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승조는 마지못해 예, 라고 대답하고 구역모임 장소를 찾아갔다. 10여명이 넘게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낯익은 사람도 몇 있었다. 잠시 후 담임목사가 도착했다.
“내가 예배에 참석하기는 난생 처음이었어. 집에서는 목사님이 대심방을 온다고 해도 피하기만 했었지. 나는 예수쟁이들의 모임이 이상한 장소라는 선입감을 갖고 있었거든. 그런데 나는 그처럼 따뜻한 모임은 처음 경험했어.”
승조는 그때의 기억을 털어놓으며 감격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요한복음1:12).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읽고 간단히 설교했어. 그런데 예배하는 동안 내 가슴이 울렁울렁 거리고 자꾸 눈물이 나왔어. 그날 밤 잠자리에서는 슬프지도 않는데 눈물을 주제할 수 없었어.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명이 밝아오듯 기쁨이 서서히 번져 나오는 것을 느꼈어. 뭔가, 괜찮다는 자신감, 마음속에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 벅찬 마음 같은 것, 그런 것이었어. 예배 후 우리는 다과를 나누며 서로 얘기를 나누고 친교 하는 시간을 보냈어.”
승조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고 나서 말을 이었다.
“구역 모임에 한번 참석하고 나자 그 다음은 어렵지 않았어. 술 마시는 것 외에 특별한 일이 없었던 내게 구역모임은 기다려지는 일이었지. 룸메이트와 함께 행동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었어. 어느 날 기분이 너무 좋아 기념으로 술이나 한잔 하려고 룸메이트와 함께 자주 가던 술집을 찾아갔었지. 이게 웬일인가! 대체로 맥주 첫잔의 맛은 유별난데 술을 마실 수가 없었어. 이상한 냄새가 나고 구역질이 올라오데. 나는 잠시 컨디션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그 후에도 마찬가지로 술을 입에 대기가 거북스러웠어.”
승조는 이상한 체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아직도 술을 안 하는 거야?”
나는 승조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술을 끊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지금 생각하면 성령님께서 술을 끊게 해주신 것 같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약간은 불안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금단현상도 사라졌어.”
승조는 술을 끊게 되면서 하나님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고 했다. 승조와 나는 어떤 때는 새벽2시까지 술을 마신적도 있었다.
“어떡하지?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오랜만에 충무 다찌집에 같이 가보려고 했는데―.”
나는 승조의 마음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귀국해서 오늘까지 술자리에 앉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승조는 담담하게 내 말을 받았다.
귀국해서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이유도 아마 술을 끊은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별장의 꿈이 움막으로 바뀐 것을 보면서 승조가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인이라면서 요즘은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공동어시장 중도매상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직장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모습은 간 곳없고 여전히 옛날의 술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움막보다도 더 초라해보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따스하고 포근하던 날씨는 이내가 끼며 서늘한 기운이 계곡으로부터 밀려올라왔다.
“날씨가 차가운데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눌까?”
승조는 물끄러미 움막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이끌었다.
나는 비닐하우스 위에 단열재를 덮은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땅바닥에 붙은 듯 하던 하우스 안에는 따로 컨테이너 방이 하나 있었다. 나는 삐거덕 거리는 평상을 밟고 서너 걸음 걸어 컨테이너 방으로 들어갔다. 방 입구 오른 쪽에는 싱크대, 왼쪽으로는 대형 냉장고가 공간 사이즈에 꼭 맞게 놓여있다. 방안 맨 안쪽에는 더블침대가 자리 잡았고 침대 맞은편에는 벽면을 거의 다 채운 산수화가 걸려있다. 그 아래 침대에 붙은 좁다란 선반에는 세 개의 난분이 받침대를 하고 일정 간격으로 놓여있다. 다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책꽂이가 놓인 책상과 조그만 책장이 침대 끝과 잇닿아 있다. 책상 위에는 성경책과 필사노트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몇 줄 씩이라도 필사를 하고 있지. 신약성경은 3회나 썼는데 구약성경은 아직 절반도 못했어.”
승조는 선채로 필사노트를 넘겨보는 내게 말했다.
책상 왼쪽에 놓인 조그만 찬장에는 비타민류를 비롯한 약병들이 놓여있고 그 앞에는 전자레인지, 그 옆엔 진공청소기가 세워져 있다. 가로3m 세로6m 컨테이너 박스 안은 바닥에 두 사람이 마주 앉을 공간만 있고 4면이 집기들로 빼곡하다. 특이한 것은 벽마다 십자가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 책상 맞은편에, 싱크대 위쪽에―. 방바닥에는 석유난로가 추위를 대비하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는 만물상 같은 원룸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서서 방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책상 앞에 앉았고 승조는 소반을 펴고 사과를 깎았다.
“나는 형이 귀국한 이유가 아직도 궁금해. 들어와서도 아무 연락도 없었고―.”
나는 승조의 귀국 이유를 물었다.
“나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믿어 구원받고 복 받는 것으로만 생각지 않아. 신앙생활이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돈 벌고, 골프치고, 쳇바퀴 돌듯 직장을 왕래 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을 깨달았어.”
승조는 생각에 잠기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살고 싶어 하잖아?”
나는 승조의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모르겠어. 나는 고국을 떠나서는 삶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어. 이북이 고향이니 돌아갈 수는 없고 그나마 마음의 뿌리를 묻어둘만한 곳은 이곳 별장부지 뿐이었지. 처음 잃어버린 자기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생활과 궤적을 같이하는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어. 인간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처음 지어주신 마음을 모두 잃어버렸어. 그러다보니 가슴은 더욱 허전하고 목은 마르고―.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신 것도 본래의 자기가 아닌 것을 버리라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어. 인간의 원래의 모습은 이처럼 욕심으로 가득차지는 않았을 것이야. 욕심의 굴레를 벗어 버리면 신앙이 자라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고국이 그리워졌어. 그리고 내가 일찍이 마련했던 이 별장부지에서 빈 마음으로 살고 싶었어.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가는 것이야.”
승조는 나름대로 자기신앙의 틀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
나는 꿈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 같은 승조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내 말은 이슬만 먹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헛된 욕심을 버리자는 것이지. 누구나 부지런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옛날 같으면 산의 땔나무라도 해서 팔아 살겠지만 귀국해서 오늘까지 어떻게 살아왔어?”
“얼마동안은 누나 집에서 농장 일을 거들어 주기도 했지만 서로가 불편한 것 같아 1년 지나서는 이곳으로 올라왔어. 조금 갖고 있던 돈으로 이 땅을 정지작업해서 전기도 끌어들이고―. 처음에는 예쁜 집을 짓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어. 아내가 함께 있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 남은 돈 일부는 교회에 건축 헌금을 했어. 신축한 교회당을 보면 내 집을 세운 것처럼 흐뭇한 마음이야. 요즘은 예배시간이 다가오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교인들을 태워오는 운전봉사를 하고 있단다.”
계속 심각하던 승조의 얼굴에 조금씩 기쁨이 피어나고 있었다.
“······”
나는 더 이상 캐묻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늘까지 부지런히 일하면서 살아왔어.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는 도로포장 공사 일을 도왔지.”
승조는 손항 저수지에서 상법마을까지 도로포장을 위해 측량을 할 때 2년 동안 측량기사가 시키는 대로 푯대를 잡아주는 일을 했다. 일당 6만원으로 거뜬히 생활 할 수 있었다. 예산은 모두 국가에서 지원하는 것이었다. 포장공사가 끝나고 나서는 숲 가꾸기 사업이 새로 시작되었다. 산림청에서 군단위로 집행하는 그 사업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를 위해 승조는 1년에 2주간씩 산림청에서 실시하는 교육도 받았다. 교육이란 과밀한 나무를 솎아내는 방법과 재목이 될 만한 새로운 수종을 심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도로변에 가로수를 심고 화단을 조성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그 일이 끝나고 나서는 이웃마을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생들 20여명의 공부방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조리사 역할을 했다.
그다음에는 금서면 ‘동의보감촌’을 조성하는 사업에 참여했다. 엔진톱으로 나무를 벌목하고 택지를 조성하기 위해 축대를 쌓았다. 산중턱에는 약초밭을 일구고 도로변 둔덕에는 구절초를 심었다. 가족이나 단체손님들이 찾아와 숙박을 하며 휴식할 수 있도록 콘도와 방갈로 숙소를 만들고 한옥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와집을 세웠다. 동의보감촌 조성은 2013년부터 시작해 2014년 11월로 준공을 보았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택한 백성을 굶기지는 않으셨어.”
산촌의 밤이 깊어가는 데도 승조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침대에서 내가 눈을 떴을 때 승조는 책상 앞에 앉아 필사를 하고 있었다. 책상 옆 벽시계는 6시가 좀 넘었다. 바깥은 바람이 몹시 불고 창문이 덜컹거렸다. 기척을 하면 성경필사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나는 따뜻한 이불속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싱크대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벽시계는 7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어?”
나는 조반을 준비하는 승조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는 방바닥에서 침낭에 들어가 잠을 잤다.
“아니야. 잠자리에 들면서 언젠가 함께 갔던 세석산장의 생각이 떠올랐어. 그때는 둘 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잖아.”
승조는 돌아보지도 않고 즐겁게 조반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책상 앞에 앉았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되 내양을 치라 하시고······, 25.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하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승조는 오늘 아침 ‘21장’으로 요한복음 필사를 마친 것이다. 성경책에는 이상한 3개의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한 개의 책갈피는 구약성경에, 또 하나는 신약성경에, 다른 하나는 필사노트에 끼워져 있었다. 책갈피 크기는 가로 5cm, 세로 15cm 크기로 사진처럼 인쇄된 것이다. 앞면에는 ‘World Vision Ethiopia’로 인쇄된 표시 아래로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2015’ 라는 글씨와 함께 성탄장식 소품들이 그려져 있었다. 뒷면에는 오른쪽에 에티오피아 국기 −가로로 초록·노랑·빨강 3색 띠로 채워지고 가운데는 청색 동구라미 안에 별 표시가 그려져 있다− 와 그 아래쪽은 아동 이름(child name):Abi Mehamed 라 써져있었다. 왼쪽에는 한글로 ‘후원자님께 드리는 선물 이예요!’라는 글씨아래 오른쪽 에티오피아 국기를 그대로 크레파스로 그려놓았다. 그 아래는 붉은 글씨로 ‘(이 카드는 책갈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석장의 카드는 이름만 다르고 거의 비슷했다.
“뭐 이런 카드가 있어?”
밥상을 차리고 있는 승조에게 물었다.
“멀리 에티오피아에서 온 것이야. 아이들이 후원자들에게 보내온 성탄카드지.”
승조는 그것 외에 두 장이 더 있다고 말했다.
“월드비전에서 펼치는 해외아동후원 사업 말인가? 나도 매스컴의 캠페인을 볼 때마다 생각은 하면서도 아직 실천은 하지 못했어.”
나는 승조의 해외아동후원 참여가 너무도 뜻밖이었다.
“이곳에 올라오고 나서 곧 시작했어. 내가 귀국하여 누님 집에 갔을 때 아내의 유품상자를 건네받았어. 아내의 낡은 성경책을 펼쳐보니 표지 안쪽에 들어있는 후원카드에는 아내가 지원하는 해외아동 명단이 10명이나 되었네.”
승조의 아내가 후원하던 해외아동은 1인당 3만원 씩, 매월 30만원이 지출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는 거액에 속하는 금액이지만 그때는 승조가 잘 나가던 때였다. 승조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후원은 10여년이 넘도록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승조는 월드비전을 통해 10명의 후원자를 새롭게 신청하고 후원 비를 매월 자동이체하고 있었다.
“비정규직 노동을 하며 어떻게 해외아동 후원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나는 승조의 형편이 염려되었다.
“그동안 준비를 해왔어. 우리가 먹었던 사과가 올해 처음 수확한 것이야.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열매를 딸 수 있을 거야. 산청사과는 어디서나 알아주거든−! 내 작은 정성으로 한 아이라도 밥을 더 먹을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나.”
승조는 아내의 유품 얘기를 할 때는 눈물이 글썽이더니 후원아동 대책을 얘기할 때는 기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해외아동 후원 외에도 그의 아내는 고아원 한곳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이 못난 남편을 위해 기도하던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뜻을 이어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었어. 내가 너무 잘못했거든. 입원도 못해보고 집에서 혼자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어. 살든지 죽던지 함께 있어야 하는데 내가 미국으로 도망친 것 같은 죄는 씻을 수 없어 혼자서 눈물만 흘릴 뿐이야.”
승조는 아내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5년 전에 사과나무를 심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해외후원아동과 불우시설을 돕는 일을 힘닿는데 까지 계속해나갈 것이라는 포부도 밝혔다.
조반 먹은 후에 나는 하산할 채비를 하고 방을 나왔다. 그러나 하우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밤새 내린 눈이 문 앞에 가득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승조가 가까스로 문을 밀치고 삽으로 눈을 치우고 길을 열었다. 눈에 덮인 승조의 지프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몇 번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승조와 나는 조심조심 걷기 시작했다. 쌓인 눈에 발목이 푹 푹 빠져들었다. 기상청은 100년 만에 처음내린 눈 이라고 밝혔다. 내 차를 주차한 산 아랫길은 제설작업이 되어 있었다. 일찍 집유차량 왕래를 위해 목장 사람들이 한 것 같았다.
“철쭉이 필 때 제수씨와 함께 놀러와. 기다릴게. 생각이 있으면 사과밭을 가꾸며 여기서 나와 함께 살면 좋겠지.”
두 손을 마주잡고 승조와 작별인사를 나눌 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차가 굽이를 돌 때까지 백미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승조는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움막은 진짜 별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