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41)
*소에게 맡긴 판결과 쥐구멍 사건
"무슨 부탁을 ...."
"선생이 관북천리를 유람하시기를 단념하시고 우리 고을에 길이 머물러 주시면 저로서는 그이상 고마운 일이 없겠습니다."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었다.
"말씀인즉 고맙습니다. 허나, 역마살에 치인 기러기 같은 넋을 타고난 사람보고 한 곳에만 머물러 있으라 하시는 말씀은 무리한 말씀입니다. 얼마간 술이나 더 얻어먹다가 떠나가게 해주소서."
"선생! 문천 고을은 제가 관할하는 고을 올시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아무리 떠나시려 하여도 사또인 제가 못 떠나 가게 하면, 선생은 문천 땅을 한 걸음도 벗어나질 못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사또는 속마음이 담긴 농담을 하며, 어떡하든지 김삿갓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어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사또는 퇴청하자 김삿갓과 술을 나누었는데, 어쩐지 그날 따라 안색이 좋지 않았다.
"사또께서 오늘은 기색이 좋지 않으시니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
김삿갓이 이렇게 묻자 사또는 눈쌀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오늘도 골치 아픈 송사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백성간에 시비가 생겼을 때 사또께서 흑백을 가려 줘야하는 것은 목민관의 본분이 아닙니까? "
"물론입니다. 허나 오늘의 사건은 워낙 아리송해서 ..."
"아리송하다뇨? 어떤 사건이기에 아리송하단 말씀입니까."
김삿갓은 호기심이 일어 물어 보았다.
사또는 술을 권하며 말했다.
"오늘의 소송건은 내용이 지극히 단순한 사건입니다. 두메 산골에 사는 촌부 두 사람이 황소 한 마리를 제각기 자기 소라고 싸우다가, 사또인 저한테 주인을 가려 달라고 소를 끌고온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둘 중에 한 사람은 멀쩡한 도둑놈인 셈이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누가 소 임자이고 누가 도둑놈인지 전혀 가려낼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헛참, 소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사또 어른, 해결책을 스스로 찾으셨습니다! "
"네?"
"지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소에게 물어 본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사또는 김삿갓의 대꾸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 김삿갓을 빠꼼히 쳐다 보았다.
"소는 귀가본능이 어떤 동물보다도 강한 동물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간섭하지 않고 그냥 놓아 주어 버리면 소는 영락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소가 어느 집으로 돌아가는가를 알고 나면 누가 소 임자이고 누가 도둑인지 절로 알 수 있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
사또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과연 너무도 절묘한 방법이시옵니다!"
그리고나서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허참, 그렇게도 쉬운 방법이 있는 것을 나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면 나같은 위인은 애당초 사또가 될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
김삿갓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정을 베풀려고 너무 긴장을 하시다 보니 오히려 냉정심이 흐트러진 탓이라고 생각 됩니다. 앞으로 그런 점을 유념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충고의 말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금후에는 그런 점에 각별히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또는 백성들로부터 "명관"이라는 칭송을 듣고난 이후, 김삿갓을 어떤 일이 있어도 놓아주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날마다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안주로 김삿갓의 환심을 사기에 여념이 없이 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에게는 술과 안주의 질과 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며칠만 쉬어 가려던 계획이 달포가 지남에 따라 김삿갓은 마음이 밖에 있어 온몸이 쑤셨다.
(사또에게 떠난다고 작별 인사를 한다고, 그러라고 하진 않겠고 ..어떡하든 붙잡으려 할텐데
제일 좋은 방법은 아무 소리도 없이 슬쩍 도망을 가버리는 것 밖에는 없겠구나 ..)
이렇게 마음을 다진 김삿갓이 슬며시 빠져 나갈, 기회를 옅보고 있던 어느날 ..
사또가 불시에 찾아와 이렇게 말을 한다.
"선생이 심심하실 테니 이제부터 재판 구경이나 하시죠.
오늘은 매우 흥미로운 재판이 있을 예정 입니다."
"흥미로운 재판이라뇨? "
가뜩이나 심심하던 김삿갓에게는 사또의 이야기 자체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여러 건의 재판이 밀려 있는데, 그중에서 유뷰녀가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에게 고발당한 사건도 하나 있습니다. 그 사건은 제법 흥미가 있을듯 하오니, 선생은 제 옆에서 구경을 하고 계시다가 제가 판결을 잘못 내릴 경우에는 옆에서 도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삿갓은 남의 재판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사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난처하여 사또를 따라 동헌으로 나왔다.
이윽고 사또는 동헌 마루에 덩실 올라앉더니, 바람을 피우다 남편에게 고발을 당하고 끌려온 여인을 굽어보며 준엄한 어조로 문초를 시작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는 어엿한 남편이 있는 몸으로, 그의 눈을 속여가며 외간 남자와 계속 통정을 하였다니 우리 사회에는 삼강오륜이 뚜렷하거늘 유부녀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
사또 앞에 죄인으로 끌려 나오면 누구나 겁에 질려 몸을 떨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문제의 여인은 떨기는 커녕 눈도 하나 까딱않고 도도하기 이를데 없이 보였다.
여인의 옆에는 남편인 듯 싶은 사내 하나가 웅크리고 서 있었는데, 몸을 떨고 있는 사람은 끌려나온 죄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계집이 어떻게 생겨 먹었으면 저렇게도 당돌할까 싶어,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사내들이 욕심을 부릴만큼 교태롭게 생긴 계집이었다.
(계집이 예쁘고 교태롭게 생기면 얼굴 값을 한다더니, 저 계집이야 말로 사내들을 호려먹게 생겼구나.)
사또는 심문에 응하는 죄인의 태도가 매우 불량해 보이자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죄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어찌 대답이 없느냐?"
죄수는 그제서야 얼굴을 똑바로 들더니 사또의 얼굴을 말끔히 올려다 보며 앙큼한 대답을 한다.
"쇤네가 외방 남자와 정을 통해 온 것은 사실이옵니다. 허나, 남편을 속여가며 정을 통해 온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쇤네의 행실은 남편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온데, 새삼스럽게 그것이 어째서 죄가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사또는 어이가 없는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남편 되는 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내는 그대의 허락을 받고 바람을 피웠노라 말을 하는데 사실이냐?"
사내는 두 손을 모아 잡고 머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집사람이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해 오고 있는 사실을 소인도 알고 있기는 하옵니다만, 소인이 그러한 행실을 허락해 준 일은 결단코 없사옵니다."
사또가 그 말을 듣고 호통을 내지른다.
"예끼 이 못난 놈아!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면 가랑이를 찢어 놓을 일이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계집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관가에 고발은 왜 했느냐? "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도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어쩔수 없이 사또전에 호소를 하게 된 것이옵니다. 사또 어른께서는 소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와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기가막힌 소리다.
사또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어쩌면 저리도 못난 사내가 있을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사또는 계집의 행실이 생각할 수록 괘씸타 여겼는지, 계집을 굽어보며 준엄하게 말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도 지금 들은 바와 같이, 네 남편은 네가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하도록 허락해준 일이 한번도 없었노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남편의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 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너는 아직도 네 죄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
그러자 계집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얼굴을 들더니 사또를 말끄러미 올려다 보며 말한다.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사또전에 한 말씀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뭐가 알고 싶으냐. 어서 말해 보거라! "
그러자 요망한 계집이 따지듯이 말을 하는데, "쇤네 몸에 달려 있는 내 것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