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호국사(護國寺)가는 길
남들은 우리들을 보고 참 신기해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학연(學緣)도 지연(地緣)도 혈연(血緣)도 하나 없이 푸르디푸른 청춘시절에 직장에서 만나 사십년 우정을 이어가는 우리들이고 보니 신기하다 할만도 하고 부러워 할만도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1970년대 중반, 그러니까 1975년과 1976년 우리나라 고도의 경제성장기에 ‘사세확장(社勢擴張)으로 유능한 인재를 널리 모집’할 때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입사한 우리들이다.
외근(外勤)시간에 같이 어울려 때로는 당구장(撞球場)으로, 때로는 극장으로 몰려다니기도 하고 왕대포집에서 시작하여 ‘카바이드’로 불을 밝힌 동성로 노점에서 석화(石花)안주에 ‘입가심으로 딱 소주 한잔’을 했던 사소한 추억들까지 공유하고 있는 동질감이 사십년 우정의 끈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중의 압권(壓卷)은 ‘앞산 옻닭사건’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앞산순환도로가 나서 그 장소가 긴가민가하지만 ‘맹산 옻닭 집’은 소피 국으로 유명한 ‘대덕식당’ 쯤에 있었던 것 같다. 매월 영업실적을 마감하고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나면 영업사원들은 특권을 누리듯이 출장비를 챙겨들고 하루 ‘땡땡이’를 쳤는데 그때자주 이용했던 식당이다. 그날도 맹산 옻닭 집에서 회동(會同)을하고 고스톱 판이 벌어지고 푸짐한 옻닭안주로 소주잔을 주고받으면서 아주 당연한 듯이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그 시간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보고서가 잘못된 곳이 있어 한 동료를 호출하게 되었는데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라 거래처마다 전화를 하였으나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뭔가 ‘역적모의’의 낌새를 차린 지점장님의 지시로 전 영업사원들의 행방이 추적되었고 우리들은 ‘일망타진(一網打盡)’되었다. 이튿날 ‘역적들’은 판관포청천(지점장) 앞에서 일렬횡대로 목을 늘이고 있었다.
“옻닭이 뭐야?! 옻닭이!!”
근무시간에 작당을 하여 술판을 벌이다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당장에 주리를 틀듯이 진노(震怒)한 포청천의 시선이 가장 선임자인 J를 향했다. 순간 J는 옻닭의 ‘레시피’를 설명하기 시작 하였다.
“예! 옻닭은 닭을 옻나무와 함께 푹 고아서.......”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고 해야 하나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고 해야 하나 진지하게 설명하는 J의 뚱딴지같은 행동에 죄수들이 먼저 킥킥 거리며 웃었고 판관 포청천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계산에 의한 행동이었다면 J는 참 영악한 사람이고 상사의 분노에 찬 시선을 감당하지 못해 얼떨결에 한 행동이었다면 J는 참 순진한 사람이다. 아무튼 ‘앞산 옻닭사건’은 그렇게 J덕분에 해프닝으로 끝이 났고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술자리에 가끔씩 등장하여 분위기를 띄워준다.
“얌마! 니가 적극 나서지 않아서 못 찾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름 부르기가 뭣하니 호(號)를 갖자고 해놓고 아직까지도 급하게 말이 튀어나올 때에는 ‘얌마’ ‘인마’이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는 것이 참 편하고 정겹다. 내가 성법(惺法)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옻닭사건보다 더 자주 입에 올리자 여산(與山 林良圭)이 핀잔을 준것이다.
“맞다! 그렇다!”
젊은 시절 성법스님은 나에게 ‘토굴 같은 암자’에서 공부나 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스님이 해인사주지(海印寺住持)로 계실 때에 그런저런 사유로 만나지 못한 이후 나는 그 프레임에 갇혀서 살았던 것 같다. 스님은 깊고 깊은 산속 토굴 같은 암자에서 구름을 벗 삼아 신선공부를 하실 거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것인데 친구 여산(與山)의 핀잔 한마디에 그 ‘틀’이 비로소 깨어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붙잡고 놓지 못했던 화두(話頭)를 깨친 기분으로 인터넷을 뒤지고 해인사와 조계종(曹溪宗) 종무소로 수소문하여 성법스님과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적극’찾아 나선지 불과 삼십 여분 만이다. 스님은 진주(晉州) 호국사(護國寺) 주지로 계셨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 올 때에 찾아뵙기로 하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피나고 알배기고 이가 갈려 피알아이(PRI)라는 사격술 예비훈련과 마지막 반복구호를 붙이는 고문관이 꼭 튀어나와 단체로 골탕 먹었던 ‘피 튀는’ 유격훈련 기본체조인 피티(PT) 체조는 스님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군대생활의 별로 아름답지 못한 추억이다. 어디 그뿐인가 방독면을 쓴 조교들이 우리들을 생으로 대형 텐트 속으로 몰아넣고 최루탄을 터트리고 ‘울려고 내가왔나’노래를 시키던 ‘화생방 훈련’을 스님은 기억하고 있을까? 사람의 감정은 칼날 같아서 아무리 시퍼렇게 갈아놓아도 오래 쓰지 않고 두면 녹이 쓸고 무뎌지게 마련이다. 군대 좀 일찍 온 게 큰 출세라도 한 듯이 ‘야! 꼽냐? 새벽밥 먹고 군대오지 뭐했어?’하며 깐죽대던 바로 위 기수의 선임병도, 조그만 실수를 꼬투리 잡아 ‘복창(따라)해라! 내가 왜 이럴까? 사회에서는 안 그랬는데, 참 똑똑했는데 내가 왜 이럴까?’ 하면서 인격살인을 하던 조교도 이제는 모두가 한 번씩 되새기고 미소를 짓게 하는 옛날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스님과 나 둘만이 가지고 있는 군대시절 추억의 백미(白眉)는 태종대(太宗臺) 백사장에서 날이 저물도록 술자리를 같이했던 일이다. 그로부터 사십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어제일 같이 새록새록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렇게 남자들의 군대이야기는 한번 시작하면 2박3일을 계속해도 모자랄 것이다.
무덥고 긴 여름이가고 2016년 10월8일 토요일,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성법스님을 찾아 호국사로 길을 나섰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부산 서면로터리에서 보았던 높고 파란하늘과 가을바람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를 생각했는데 잿빛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가을비가 축복처럼 내리고 있었다.
호국사는 진주성내 서쪽 끝에 있었다. 젊은 시절 마산지점에서 근무할 때에 촉석루(矗石樓)에 몇 번 갔었지만 호국사가 성안에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원래 내성사(內城寺)라고 했었는데 임진왜란 때 진주혈전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僧兵)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임금이 호국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유서 깊은 호국사도 가을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대웅전(大雄殿) 처마를 타고 내려온 낙숫물과 요사채(寮舍寨)와 명부전(冥府殿) 처마를 타고 내려온 낙숫물이 마당에서 만나 조그만, 아주 조그만 강을 만들고 있었다. 귀에 익은 스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법문(法問)이 조그만 강물위로 촉촉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대웅전 앞에서 합장을 하듯이 두 손을 모우고 스님의 법문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스님! 잘 계셨습니까?”
두 손을 덥석 잡고 나눈 첫마디 인사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루어진 짤막한 해후의 인사는 마치 그저께 헤어졌던 것처럼 사십년을 건너뛰고 숱한 사연들을 생략하고 있었다.
요사채 에서 스님과 마주앉았다. 세속(世俗)의 벗이라면 소주잔 기울이며 군대문자도 주고받고 적당히 욕도 섞어가면서 둘이서 공유하고 있는 추억을 털어놓기에 무박3일도 모자랄 터인데 금방 화재가 궁해진다.
젊은 시절 총기가 넘쳤던 스님의 새까만 눈동자에 스님도 거부하지 못한 세월이 들어앉아있다. 세월은 그렇게 진주에서도 대구에서도 스님에게도 나에게도 더 가는 곳도 덜 가는 곳도 없이 공평하게 가고 있었던 것이다. 호국사를 끼고 유유히 흐르는 남강처럼 쉼 없이 거침없이 흘러가고 또 흘러갔던 것이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내는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스님과의 해후가 아주 싱겁게 끝났다면서 스님은 덤덤하신데 나 혼자 설레고 들떠있는 것 같다고 한다. 남북이산가족상봉처럼 얼싸안고 통곡이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에 오직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시중을 아내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스님! 싸락눈이 가랑잎 날리듯 하는 겨울날에 문득 스님이 보고 싶어지거나 손수 끓여주시던 차향(茶香)이 그리울 때 약속도 않고 벼르지도 않고 마음이 가자할 때에 찾아뵙겠습니다. 스님이 출타중이시면 촉석루가 있고 의암(義岩)바위가 있어 영 헛걸음은 아닐 테지요. 무엇보다 뻐꾹새가 한가로운 봄날에 다시가도 되니까 마음 이 한결 여유로워 집니다.
점심공양(供養) 참 맛이 있었습니다. 손수 끓여주시던 차(茶)맛도 일품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2016. 11. 14. 然 江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