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
고산문학수상작품집
모과의 방 외 9편
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
제 방에 들어오니 향이 살아납니다
향이 없었던 게 아니라 방이 너무 컸던 거에요
에옥살이 제 방에 오니 모과가 방만큼 커졌어요
방을 모과로 바꾸었어요
여기 잠시만 앉았다 가세요 혹시 알아요
누가 당신을 바짝 당겨 앉기라도 할지,
이게 무슨 향인가 하고요
그때 잠시 모과가 되는 거죠
살갗 위에 묻은 끈적한 진액이
당신을 붙들지도 몰라요
이런, 저도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의 즙이랍니다
오세요, 누릴 수 있는 평수가 몇 발짝 되진 못해도
죽은 향이 살아나라 웅크린 방
귀의 가난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놓아지는가 했더니
어머니 음식 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애초엔 소리였겠으나 내게로 오는 사이
소리가 되지 못한 것들
되묻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귀의 가난으로
내가 조금은 자상해졌다
저녁 숲의 눈동자
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
숲속에 있으면 저녁은
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
구멍을 뚫어놓는다
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
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
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
저 수만의 눈들을 마주하기 위하여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져
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
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
저 숲에 누군가 있다
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
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
허공중으로 사라진 산딸나무
꽃빛 같은 것이면 어떠리
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이 마주하는
저녁 숲의 눈동자
밥물 눈금
밥물 눈금을 찾지 못해 질거나 된 밥을 먹는 날들이 있더니
이제는 그도 좀 익숙해져서 손마디나 손등,
손가락 주름을 눈금으로 쓸 줄도 알게 되었다
촘촘한 손등 주름 따라 밥맛을 조금씩 달리해본다
손등 중앙까지 올라온 수위를 중지의 마디를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물꼬를 트기도 하고 막기도 하면서
논에 물을 보러 가던 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저녁때가 되면 한 끼라도 아껴보자
친구 집에 마실을 가던 소년의 저녁도 떠오른다
한 그릇으로 두 그릇 세 그릇이 되어라 밥국을 끓이던 문현동
가난한 지붕들이 내 손가락 마디에는 있다
일찍 철이 들어서 슬픈 귓속으로
봉지쌀 탈탈 터는 소리라도 들려올 듯,
얼굴보다 먼저 늙은 손이긴 해도
전기밥솥에는 없는 눈금을 내 손은 가졌다
죽음이 준 말
조문을 가서 유족과 인사를 나눌 때면 늘 말문이 막힌다
죽음을 기다리는 병실에 병문안을 갈 때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쾌유를 빕니다
이런 유창한 관용구는 뭔가 거짓말 같은데
그럴 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내게 구박만 받던 관용구는 늙은 아비처럼 나를 안아준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말이라도 좀 흘러나왔으면 싶을 때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는, 말이 그치는 그때,
어둠 속 벽을 떠듬거리듯 나의 말의
스위치를 더듬는다
그럴 때 만난 눈빛들은 잘 잊히질 않는다
그 눈빛들이 나의 말이다
의자 위에 두고 온 오후
호수공원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자니 누가 옆에 와서 앉는다
나의 영토를 침범 당했다는 느낌, 의자를 전세낸 처지도 아닌데
그럼 쓰나, 불쾌함이 전달되지 않도록
휴대폰을 보는 척 슬그머니 일어선다
내가 모이를 쪼는 비둘기에게 가까이 갔을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이 있겠다
오수를 즐기는 길고양이를 쓰다듬으러 다가갔을 때
당혹스러워하던 눈동자도 이해할 만하다
그런 장소들이 있다
그의 몸과 분리할 수 없어서
거기에 있는 별과 바람과 나무들과
흔들리는 그림자마저
그의 몸만 같아서
부러 이만치 거리를 두고
호젓하게 있게 하고 싶은 곳들
떠나온 자리가 두고 온 몸 같아 멀찌감치서 돌아다본다
의자 위에 두고 온 별이
나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
아파트를 원하는 사람은 위험인물은 아니다
더 좋은 노동 조건을 위해 쟁의를 하는 사람도 결국은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속한 세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루 종일 구름이나 보고 할 일 없이 떠도는 그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소유의 욕망 없이도 저리 똑똑하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 혼자서 중얼거리는
행인들로 가득한 지하철역에서도
그의 중얼거림만은 단박에 눈에 띄었다
허공을 향해 중얼중얼 말풍선을 불 듯
심리 상담과 힐링과 명상이
레온 간판으로 휘황하게 점멸하는 거리
어떤 슬픔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사라지자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찼다
그림일기
새 장갑이 생긴 밤이었다
장갑 하나 꼈을 뿐인데 누가
손을 꼭 감싸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겨울은,
뒷꿈치가 헌 누이의 양말이 되었다가,
꼭지에 방울이 있는 모자에도 머물렀다가,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며
밀린 그림일기 숙제를 하던 밤
그 밤처럼 창밖은 눈꺼풀이 막
붙어버린 것 같은 설원이다
애써 짠 장갑을 풀어 나는 무엇을 할까
세타 없이 겨울을 난
어머니의 뜨개질을 따라
심심파
양념을 하긴 했느데
양념이 저 혼자 잘난 척만 않도록
은근히 절제를 했다
맛과 맛 사이에 여백을 두어서
희미하게 단맛도 오고
쓴맛도 오고, 짠맛도 오고
당최 알 수 없는 맛까지 더한다
을밀대 평양냉면이나
원주 흥업묵집 묵밥은
어딘가 허전한 데가 있었지
부러 채우지 않고 비워놓은 자리가 있었지
수줍어하는 맛이라고 할까
개성을 감춘 맛이라고 할까
심심파적이 아니라 각고의
궁리 끝에 심심
이것이 어떤 유파 같은 것은 아닌지
과연 아무나 심심한 게 아니로구나
여러 맛이 와서 놀아라 심심
무얼 고집 않고도 이미
자신인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