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인사하는 白髮 소년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60) 일본 산케이 신문(産經新聞) 서울지국장 겸 논설위원은 韓·日 양국으로 범위를 넓힌다면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일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17년 간 살아온 서울주재 最長壽 일본인 특파원이고, 한국 관련 책을 무려 열여덟 권이나 쓴 知韓派의 거물 기자이다. 그 가운데 네 권이 한국에서 번역 출판됐으며 곧 다섯 번째 책 「韓國을 먹다」가 한국어판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일본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다. 그는 산케이로부터 무제한의 임기를 보장받은 停年(정년) 없는 논객이다.
그는 일본인으로 서울주재 특파원(논설위원 겸직)이면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일본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때로는 충격을 주기까지 한다. 수천명의 한국 기자들과 孑孑單身(혈혈단신)으로 경쟁을 벌여 당당히 특종을 빼앗는가 하면, 핵심을 찌르는 논설과 강연으로 韓日 두 나라 지식인들을 사로잡는다. 아무래도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앞으로 또 다른 구로다 가쓰히로를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
나는 그를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를 만나기로 한 날(9월10일)은 아침부터 다소 들떠 있었다. 나부터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만날 때마다 늘 웃는 낯이었다. 그는 언제나 뱅글뱅글 도는 안경 속의 작은 눈을 파문 그리듯 깨뜨리며 웃었는데 그 모습이 꼭 白髮(백발) 소년 같았다. 하긴 그의 백발이 한국에서 사는 데 퍽 有用(유용)했다고 한다. 좀 어려운 일이 있어도 長幼有序(장유유서)를 따지는 한국인들이 웬만한 건 봐주거나 슬쩍 넘어가 줬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그날은 웃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경향신문 건물 13층 그의 사무실(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에서 만났는데, 그는 외출했다가 좀 늦게 들어와서, 긴장된 얼굴로 복사한 서류뭉치를 건네줬다. 최근 국내 미디어에 그가 썼거나 인터뷰한 기사들이었다.
『여기 다 있어요. 그거 보고 쓰세요. 시간이 없어요』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내가 놀라서 그를 쳐다봤더니 그 역시 「조금도 웃지 않고」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만 가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나는 그가, 모든 것이 다 드러나야 하는 장시간의 인터뷰에 부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건드려서 덕볼 일이 없는 韓日 간의 갈등문제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얼마 전 산케이 신문과 그 자신에 대한 한국內 비판여론도 의식했을지 모른다.
『韓國岳 아래 가고시마가 내 고향』
우리는 점심시간이 됐으므로 우선 점심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합의하고, 지하층에 있는 경양식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의 同感과 異見이 진진하게 펼쳐졌다. 식당에서 그는 새우송이볶음밥을 골랐다. 나는 그것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메뉴라는 걸 떠올리고 나도 그걸로 골랐다. 그러자 사진팀의 李五峰 팀장도 같은 것을 골랐다. 이 모습을 보고 내가 물었다.
―일본인들은 이런 경우 따로따로 시키지요?
『아니오, 한국 사람들이 주장이 강해서 따로따로 자기가 좋아하는 걸 시키지 않아요? 일본 사람들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같은 것을 시켜 주는 경우가 많죠』
―그게 아닌데. 일본 사람들은 어떤 모임에서든지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다 밝히던데. 우리는 오히려 하고 싶은 말도 참는 경우가 많고. 다른 사람 뜻에 휩쓸려 넘어가는 경우가 일본 사람보다 많지 싶어요. 구로다 선생 책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주장이 강하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자기 생각, 자기 감정에 충실하죠. 일본 사람들은 서로 얘기하면서 자기 감정을 감추고 상대방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주죠. 상대방과 맞추려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장소를 찻집으로 바꿔가며 다섯 시간 가까이 돼서야 끝났다. 나중엔 졸리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그래서 못 다한 부분을 전화로 하기로 했다.
우리는 피차에 부담이 적은 시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는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가고시마(鹿兒島·규슈 南端)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모님은 가고시마의 가난한 산골 출신인데, 오사카에 돈벌이하러 올라 오셔서 살다가 나를 낳으셨지요. 제 고향이 미야자키하고 가까운 곳이죠. 화산도 많고, 어디를 파도 온천이 나오고. 우리 고향 근처에 화산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韓國岳(가라구니다케)입니다. 이름이 왠지 한국이에요.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일본의 古事記와 日本書紀에는 韓國이니 新羅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오지요. 아주 옛날부터 일본에선 한국이란 말을 썼으니까요. 오히려 한국에선 대한제국 이후에 많이 썼는데.
『일본 건국 신화의 고장이 가고시마 옆에 있는 미야자키에 있잖아요. 미야자키에는 백제마을(南鄕村)도 있고. 규슈지역은 한반도와 가까우니까, 반도에서 사람들이 건너왔다는 거지요(韓半島渡來說). 그래서 그런 신화도 생기고 그런 이름도 생겼나봐요』
일본의 古事記와 日本書紀를 보면 기원전 660년 일본의 제1대 진무천황(神武天皇)이 하늘에서 미야자키의 휴가(日向)로 내려와서 다카치호노미야(高千穗宮)에서 살았다는 일본판 天孫降臨(천손강림)의 건국신화가 나온다.
그는 고대사 속에 한국과 일본이 함께 등장하는 역사적 고장에서 태어난 것이 오늘날의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전쟁이 심해져서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오사카에서 고향 가고시마에 疏開(소개:전란을 피해 흩어짐)돼서 거기서 살았지요. 유치원도 거기서 다녔고 소학교도 1학년까지 그곳에서 다녔어요. 그 후에도 여름방학엔 그곳에 가서 보냈고』
6·25 전쟁 덕분에 古鐵 주워 용돈 벌다
―그러니까 가고시마의 피가 흐르네요.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주 평범한 분이었어요. 우체국의 하급 관리였어요. 거기서 정년퇴직을 했어요. 어머님은 아주 가고시마 여자였어요. 가고시마가 사무라이의 고장이고 봉건적인 고장이니까 男尊女卑(남존여비) 사상이 심한 곳이지요.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한테 순종해야 했지요. 여자들은 자기 주장을 숨기고 살아야 했어요. 어머니도 꼭 그런 분이었어요』
그는 그런 부모 밑에서 4형제 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형님은 철도 전기직으로 종사하다 퇴직했고, 다른 동생들도 다 평범하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소학교 2학년 때부터 오사카 변두리로 다시 올라온 그는 그곳에서 소년시절을 지냈다.
『한국으로 말하면 영등포 같은 곳이었어요. 연기도 많이 나고, 매연이 아주 심했어요. 끄름이 많이 날아와서 빨래가 물들곤 했지요』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중학교까진 그저 그랬는데 고등학교는 오사카에서 최고 명문학교에 들어갔어요. 덴노지(天王寺) 고등학교라고 오사카에서는 아주 명문이지요. 스포츠도 잘했고, 명문대에도 많이 갔어요.
그때까지 나는 과외도 안 했고, 재수도 안 했어요. 그런 뜻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했다고 할 수 있죠. 학교도 다 국립만 다녀서 돈도 별로 안 들었어요. 대학도 1964년에 교토(京都)대학 경제학부에 바로 들어갔으니까요』
―경제학부를 택한 이유는?
『중·고등학교 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문과계통으로 가면 재미있는 책을 많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무슨 책이 재미있던가요? 「三國志」도 봤어요?
『일본에선 「三國志」가 인기가 없어요. 중학교 때는 「로빈슨 크루소」, 「15소년 표류기」 같은 모험, 탐험, 이런 거 아주 좋아했죠. 논 픽션, 실록, 체험…』
―그래서 한국 탐험을 하셨죠, 하하! 중·고등학교 때 무슨 과목을 잘하셨던가요?
『내가 항상 1등이었던 과목이 지리였어요. 지금도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외국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게 됐어요』
―그때 한국에 관한 지식도 있었습니까?
『학교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오사카에는 재일교포들이 많았어요. 학교 다닐 때 한 학급에 재일교포 학생이 5∼6명씩은 있었어요. 동네에도 재일교포들이 많아서 접촉할 기회가 많았어요.
우리 어렸을 때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잖아요. 그때 일본이 전쟁물자 보급기지가 됐지요. 그래서 금속, 타이어 이런 것 값이 많이 올랐어요. 그러니까 고철 값도 많이 올랐어요. 그때만 해도 패전한 지 얼마 안 지나서 廢家(폐가)도 많았는데 그런 데 가면 여기저기 고철이 나뒹굴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꼬마들이 고철을 주워 모아서 팔았어요. 그럼 그게 용돈이 됐어요. 학교 갔다와서 그런 일을 많이 해서 용돈이 궁하지 않았어요. 미안하지만 6·25 전쟁 덕분이에요, 하하하. 그런데 고물을 가져다 파는 데가 재일교포들이 하는 고물상이었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하고는 늘 접촉하게 됐죠. 그러면서 한국 사람들의 분위기를 대강 알게 됐어요』
左派에 물들어 보낸 학생시절
―무슨 분위기?
『하나는 마늘 냄새. 또 하나는 목 뒤가 빨갛다는 거』
―그게 무슨 소리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술을 많이 먹어서 간 기능이 나빠지면 그렇대요. 하여튼 그러면서 한글을 자주 봤는데, 참 신기했어요. 영어도 아니고 한자도 아니고…. 참 호기심이 대단했죠』
―그 당시에 재일교포들이 차별을 많이 받았다는데….
『그때 애들한테는 그런 감정이 없었죠. 고철을 가져가면 돈을 줬으니까. 또 같이 학교에 다니던 재일교포애들에 대한 이미지가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공부 잘하는 것, 또 하나는 운동 잘하는 것. 나중에 그 친구들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니까, 어떤 사람은 의사가 됐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야쿠자가 됐다고 하고. 하여튼 내가 어렸을 때 재일교포 친구들에 대해서는 나쁜 인상은 별로 없었어요』
―우린 스스로 그걸 못 느끼는데 지금도 우리한테서 마늘 냄새가 납니까?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지금은 저도 똑같이 마늘을 먹으니까 잘 모르지요. 다만, 외국에 갔다가 공항에 들어오면 특이한 냄새가 나죠. 일본에 갔다 와도 느껴요. 그러나 내가 여기 오래 살았으니까 공항에서 마늘 냄새가 나면 「아, 돌아왔구나」 하고 안도감을 느끼지요』
―대학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대학 때는 공부 안 했지요. 그 당시 1960년대는 일본의 대학이 좌파로 흘렀어요. 특히 경제학부가 그랬고. 그래서 마르크스, 엥겔스 이런 책을 많이 읽었지요. 또 그때 학생운동이 가장 고조돼 있을 때니까, 左右도 모르고 정의감에 휩쓸려 데모하고 그랬죠. 소위 안보투쟁에 정신이 없을 때였어요. 그러느라고 학교는 거의 안 나가고, 시험이나 가서 보고 그랬죠.
한번은 데모하다가 죽을 뻔했어요. 경찰에 밀려서 학생들이 겹겹이 넘어졌는데, 내가 맨 밑에 깔리게 됐어요. 너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어요. 살려달라고 막 소리쳤어요. 간신히 빠져 나왔어요. 아, 그때 죽어서 영웅될 뻔했어요』
―그때 영향받은 책은?
『그 당시 일본의 상황이 1980년대 한국 대학하고 같았어요. 우리가 보는 책도 거의가 左翼(좌익)적인 책이었지요. 左翼의 시각에서 씌어진 한국에 관한 책도 몇 권 읽었어요. 미국의 저널리스트 스톤이 쓴 「秘史 朝鮮戰爭」도 읽었어요. 6·25 전쟁 의 발발에 대해서도 저쪽 시각으로 되어 있었어요. 또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작가도 左翼적 성향이었는데, 그 사람이 한반도에 관한 논픽션도 많이 썼어요. 그 가운데, 林和가 北에서 숙청당해 죽는 걸 그린 「北의 詩人」이란 책이 있었어요. 아주 두꺼운 책인데, 북한의 입장에서 쓴 거죠. 이번에 林和가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원이라는 자료가 미국에서 나왔죠. 그런데 그 책에서 林和가 美帝의 간첩이었다고 해서 처형되거든요. 그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기본적으로 우리 학생 시대에는 左派였고, 한국식으로 말하면 주사파였죠. 전체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그랬어요. 언론계도 그랬고. 나도 당연히 그랬죠』
『밝은 한국 보고 아주 놀랐다』
얘기는 여기서 좀더 발전한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戰後(전후) 역사 교육은 진보적 左派 교육이었어요. 그래서 일본에 대해서도 철저히 비판하는 역사교육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한반도 지배 문제, 중국과의 문제, 이런 거 다 비판적으로 배웠어요. 그래서 閔妃(明成皇后) 弑害(시해) 사건도, 일본의 浪人(낭인)들이 일으킨 거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安重根 의사한테 저격당했다, 이런 거 학생 때부터 다 읽고 듣고 했어요. 위안부 문제만 해도 일본에서 먼저 책이 나왔잖아요. 당시 한반도 역사에 관한 책이란 게 거의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는 그런 책이었어요』
그런 책을 읽으면서 그는 늘 한국에 대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과 한국 사회를 어둡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도 역시 그랬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바꿀 기회가 왔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어요. 1971년 8월에, 서른 살 때였죠, 교토통신(共同通信) 기자 시절에 동료 기자하고 둘이서 한국에 관광을 왔었어요. 그냥 한번 보고 싶어서 였죠. 그런데 왔다 가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우리가 책에서 본 남조선 사회, 남조선 사람, 이런 거하고 아주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그전까지 우리는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잖아요. 가난하고, 불쌍하고, 동정할 만하고, 그래서 완전히 죽은 것 같은 한국 사회의 분위기…, 이런 걸 생각하고 한국에 왔어요. 한국 사람 하면, 어두운 이미지였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완전히 달랐어요. 일주일 동안 부산에도 가고, 동해안도 가고, 다 다녔어요. 이상하게도 사람들도 다 밝고, 가난하지도 않고, 친절해서 참 놀랐어요. 재미있는 건, 우리가 서울에 도착해서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이 수원 제암리 교회였어요. 제암리 사건의 현장을 보고 싶었지요. 그 정도로 우리는 한국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水原(수원) 한국일보 지국에 찾아가서 물었더니 친절하게도 까만 지프에 태워 데려다 줬어요』
―그때 한국말을 했습니까?
『어릴 때 한글을 본 것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배워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기자가 돼서 친구들하고 1주일에 한 번씩 한국말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단어 몇 개는 말할 수 있었지요. 처음 서울에 와서는 조마조마했어요. 한국 사람들한테 당할까 봐.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참 친절하구나」 하고 느꼈어요. 일본 사람들이 미울 텐데, 왜 그렇게 친절하게 해주나…. 그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사람들도 열심히 살고, 활발하고, 웃음이 있고…, 아주 이미지가 달랐어요』
그래서 그는 점차로 한국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교토통신에는 바로 입사하셨나요.
『네, 바로. 1964년은 일본이 고도성장을 시작할 때여서 일자리가 많았어요. 교토대학을 졸업하면 일류상사, 은행, 보험회사 어디든 無시험으로 갈 수 있을 때였지요. 그런데 유독 언론계에만 시험이 있었어요. 우리 들어갈 때 경쟁률이 약 300對 1이었어요』
―그런데 왜 교토통신에 들어갔습니까? 아사히(朝日) 신문도 있고 NHK도 있는데.
『그것도 우리 젊은이들의 左派적 분위기 때문이었어요. 그런 커다란 회사의 권위가 싫었어요. 교토통신은 주로 지방에 있는 작은 신문사에 뉴스를 많이 보내줘서 도와 주잖아요. 거기서 일하는 것이 큰 권위주의적인 거대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보람이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또 한 가지. 당시 교토통신사가 언론사 중에서는 가장 자유롭다는 평이 있었지요. 이건 어떻게 보면 분위기가 좌익적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부인은 히로시마서 現地調達
―한국처럼 경찰서 출입부터 하셨던가요?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기자로 입사하면 무조건 지방으로 가야 합니다. 그때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렸을 때인데, 1년 간 도쿄에서 견습을 마치고, 히로시마(廣島) 지국에 가게 됐지요. 거기서 1965년부터 4년 간 있었어요』
―거기서 무슨 일을 하셨던가요?
『낮에는 경찰에 가서 사건 취재했고, 밤에는 야구장에 가서 야구 취재를 했어요. 야구 전문 기자였죠. 그곳의 홈 팀으로 히로시마 카프(Carp, 잉어)라는 팀이 있었어요. 지금도 야구 이야기를 하면 한없이 할 수 있어요. 퍼펙트 게임 알아요? 투수가 한 경기에서 타자 27명을 상대하여, 노 히트, 無失點(무실점)은 물론, 4사구도 없이 끝내는 겁니다. 이 퍼펙트 게임을 보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히로시마에서 2년 간 두 번이나 봤어요. 기자로서는 아주 행운이에요』
―한국 야구에 대해 한 말씀 코멘트 하신다면?
『일본에도 프로야구팀에 연고지가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다른 스포츠도 그렇지만 거의가 재벌이 운영하잖아요. LG, 현대, 삼성…, 그게 좀 재미없네! 일본은 신문사, 전철회사, 슈퍼마켓 하는 다이에…, 이렇게 다양하지요』
―한국 선수로는 누굴 칩니까?
『그야 이승엽이지요』
―박찬호는?
『박찬호는 한국에서 프로선수로 커서 미국에 간 게 아니고, 처음부터 미국에서 시작한 거니까 미국 선수라 할 수 있고. 시애틀에서 활약하는 이치로는 일본에서 7년 연속 수위 타자로 뽑혔다가 미국에 갔잖아요. 지금 아메리칸 리그에서 타격부문 1위지요. 이것이 일본의 프로야구 수준을 가늠하는 계기가 됐죠』
이러면서 그는 은근히 일본 야구를 자랑한다. 히로시마에서 그는 퍼펙트 게임을 열 번 보는 것보다도 더 큰 행운을 잡았다.
―그런데 결혼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히로시마 시절에 현지조달했어요』
―예?
『일본 기자들의 경우는 처음 지방으로 발령받아 가서 그 지역에서 부인을 현지조달하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 어느 職(직) 공무원들 사이엔 초임지가 처갓집이다, 하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경우로군요.
『네. 제 경우는 낮에 경찰 담당을 했고, 밤에 야구 담당을 했는데, 법정도 함께 담당을 했었죠. 히로시마 고등법원 총무과에 기자실 담당 여직원이 있었는데, 거기 가면 그 여직원이 나한테 잘해줬어요. 그 직원이 제 집사람이 됐어요』
―야, 그때 법조기사 특종 많이 했겠군요. 우리 경찰기자 시절엔 경찰서 교환원이나 서장 여비서하고 연애 많이 했는데.
『일본에선 그런 私的인 게 없어요. 안 돼요!』
―정말?
『정말 안 돼요. 못 했어요. 公私(공사) 혼동하면 안 되지요』
구로다씨는 그때 결혼한 부인 구로다 요코(黑田洋子·56)씨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는데, 큰딸(31)은 대만에 가서 일본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고, 둘째 딸(25)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면서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17년 간 혼자서 외롭게 한국 생활
―지금 부인과는 함께 사십니까?
『아니오, 單身赴任(단신부임). 17년 간 계속 혼자 살고 있어요. 말없이. 외롭게』
일본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옛날 幕府(막부)시대에 上京 근무하던 사무라이들도, 그땐 다른 뜻이 있었겠지만, 단신부임을 했고, 지금도 일본 국회의원들도 지방에서 당선되면 홀로 올라와 이른바 단신부임을 한다. 일본의 상사원들도 국외는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단신부임하는 일이 흔하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게 돼 있는데….
『그래도 17년 간 그렇게 살았네요』
―지금 어디 사세요?
『마포에 있는 14평짜리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밥도 혼자 해먹고?
『대체로 사서 먹지만 일요일엔 생선 조림도 해먹고, 카레라이스 같은 것도 해먹고』
―한국 음식은 뭐 좋아하세요?
『한정식 먹으면 다 나오잖아요』
뭐든 다 좋아한다는 말 같았다. 1969년, 히로시마 근무를 마치고 도쿄에 돌아와서도 그는 한국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아와서 사회부에 10년 가까이 있었어요. 절반 정도를 특별히 담당하는 부서가 없는 遊軍기자(한국에선 특집기자)로 일했고, 나머지는 경시청을 출입했지요. 또 외무성도 담당했구요』
―遊軍기자가 하는 일은?
『사회가 복잡하니까 어느 한 부서나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가 많고, 또 복잡한 사건도 많고, 그래서 광범위하게 보고 취재하고, 대책을 찾아보는 취재를 하지요. 일본에는 그런 기자가 많아요. 그때 그때 태스크 포스(Task Force)를 구성해서 취재했지요. 이게 저한테는 맞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구로다 기자는 1973년 8월 이른바 「金大中 납치사건」을 만난다.
『그때 팀을 구성해서 나도 한 멤버로 金大中 사건을 취재하게 됐어요. 매일 일본 미디어에 그 사건이 크게 보도되는데, 내가 보니까 다 한국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쓰는 거예요. 나는 1971년도 한국에 가서 어느 정도 시각교정을 해 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때까지 그렇게 되지 않아서 한국을 어둡게 썼어요.
나도 할 수 없이 기사를 쓰면서 한국에 대한 기사 보도에 違和感(위화감)을 느꼈어요. 한국이란 사회, 나라에 대한 기사 속의 이미지가 너무 어둡고 부정적이었어요. 그걸 보니 내가 본 것 하고 다르잖아요. 물론 사건 자체는 비판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웃 나라, 이웃 사람, 이웃 사회니까 좀더 다양한 눈으로 봐야 되지 않느냐, 좀 다각적 시각을 가져야 되지 않느냐 생각하게 됐죠. 그때 그게 소수파였어요. 내가 회사에서 다른 각도로 한국을 보자고 얘기했지만 무시당했지요. 그래서 내가 좀 불만을 가지고 있었어요』
부산서 한 달 살며 보통사람 취재
그러면서 1970년대 후반까지 金大中 사건 관련 보도가 계속됐고, 한국에 대한 일본 언론의 부정적 시각은 여전했다. 구로다 기자는 그걸 보면서 1977년에 이르러 품고 있던 생각을 펼 기회를 잡았다.
『보통 한국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좀 자세히 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遊軍기자를 오래 했으니까 발언권도 생겼잖아요. 그래서 내가 기획안을 냈어요. 「아시아 시리즈」를 시작하자고 했어요. 그 제목이 「아시아, 살면서 취재하기」였지요. 그 나라에 가서 한 달 동안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취재하는 거였어요. 내가 그 기획물을 책임지기로 하고 첫 번째로 내가 한국을 취재하겠다고 써넣었지요. 그것도 서울이 아닌 부산을 택했어요. 다른 나라는 나한테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1977년 6월에 한 달 동안 부산에 와서 살면서 취재를 하게 됐지요. 그때까지 해외 취재라고 하면 기자가 취재 대상을 찾아다니며 만나보고 기사를 썼잖아요. 나는 그 취재방법을 바꾸자고 했어요. 기자는 가만히 있고 움직이는 상대를 워칭(Watching, 관찰)하자, 그것이 살면서 취재하기(수미코미)다, 그렇게 된 거죠. 그것도 그 지역의 가정집에 들어가서 같이 살면서 취재해야 된다 그거였죠. 그래서 나도 부산에 와서 같은 또래의 가정집에 살면서 그 가정을 취재했죠. 아이 둘이 있는 가정이었지요』
―재미있었겠네요!
『그 집 식구들하고 생활하면서 식사도 같이 하고 TV도 같이 보고 그랬어요. 그때 집 주인(취재 대상)이 부산 세관에 근무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쉬고 있을 때인데, 애들 방을 비워 줘서 거기서 살았지요. 거기서 먹고 자고 했어요.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어떤 화제가 오고 갔나, TV를 보면서는 뭘 보고 웃고, 뭘 보고 우느냐. 매일 뭘 먹느냐. 뭐에 대해 화를 내느냐. 유치원에서 어떤 행사가 있었느냐. 아버지 친구는 어떤 사람이냐, 친구들과 만나서 뭘 하고, 무슨 얘기를 하느냐. 어떤 술을 마시느냐. 일요일엔 어느 산에 가느냐. 이런 걸 취재하면서 그 집 식구들하고 같이 다녔어요. 한 달 후에 일본에 돌아가서 25회로 나눠서 기사를 썼더니 참 반응이 좋았어요』
―말 때문에 고생은 안 하셨어요?
『도쿄에서 1주일에 한 번씩 계속해서 공부했기 때문에 쉬운 말은 할 수가 있었지요』
―그때 많은 걸 느꼈겠군요.
『1971년에 처음 한국에 와서 느꼈던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됐지요. 집주인 친구들하고 등산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는 사이에, 거제도 출신 여자 친구도 사귀게 됐어요. 晋州 姜씨였죠. 그 여자 친구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아, 이게 한국 여자구나 하고 감동했어요』
―실례지만 일본 여성보다 더 친절하던가요.
『격의가 없고, 감정과 생각의 표현이 솔직했어요. 일본 사람들은 자제하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니까, 속을 알 수가 없잖아요. 그 여자 친구를 보고 희로애락의 표현이 뚜렷해서 아주 인상이 깊었죠. 이런 여성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더욱 깊이 알고 싶어졌어요. 그 후에도 편지는 오고 갔는데 다시 못 만났어요. 지금도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기다려 보십시오. 이 「인간탐험」 나가면 연락 올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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