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관은 그 매혹적인 외관과 빛나는 정원, 그 어느것 하나 조금도 상실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 가스통 르루, '노란 방의 수수께끼'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는 1961년 겨울 첫 추위 속에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 영화는 사제관의 정원처럼 그 광채와 신비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건 지끔까지 우리 책에서 전개한 영화적판타스틱의 개념이 이 영화의 내부에 폭넓게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에는 앙랭 로브그리예의 시네로망과 알랭 레네의 영화 작품이 따로따로 존재한다. 레네는 로브그리예의 텍스트를 근거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두 작품은 단순히 텍스트가 먼저이고 영상화가 나중이라는 순차적 문제보다는 동시적 관계로 나타난다. 즉 이 둘은 기이하게도 서로 비슷하면서 부분적으로는 아주 다른 작품이다. (시네로망과 영화라는 서로 다른 표현 수단의 결과물이라는 단순한 사실 외에 다른 이유들 때문에 서로 다르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알랭 로브그리예의 A라는 캐릭터의 강간 에피소드의 묘사를 알랭 레네는 화이트 색조의 연속 트래블링 기법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런 차이는 바로 이어지는 무너져 내리는 난간의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난다. 이 에피소드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에게 루이 푀야드를 상기시켰다. 그러나 알랭 로브그리예는 <유령> 이야기들을 읽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이 이미지는 알랭 레네가 시나리오 과정에서 새롭게 제시한 이미지들 중의 하나일뿐입니다. 그러니 아시겠지만, 난 글을 쓸 때 <유령>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어요." 그러나 로브그리예가 사용한 '이미지'라는 단어에 분명 애매모호함이 있다. 더욱이 로브그리예는 '루이 푀야드의 영화 <유령> 시리즈'가 원작 소설 <유령>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짐짓 모른 척한다. 레네는 로브그리예의 입장에 힘을 실어 주는 발언을 한다. 즉 그 이미지는 레네 자신만의 아이디어라는 답변을 더 자세히 이어간다: "나는 세트 디자이너 알베르타지에게 난간을 아예 '아르센 뤼팽' 식으로 장치하라고 지시했던 게 생각납니다. 그 분위기가 어울릴 걸로 본 거지요. 내 의견은 타당했어요. 왜냐하면 그 이미지가 아마도 젊은 여인의 고뇌에 의해서 투사된..... 그 무엇이라고 설정할 때, 그와 비슷한 상황들이 담긴 대중 소설적인 전통에서 도움을 얻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로브그리예 역시 바로 그 장면에 젋은 여인이 "사라지세요. 나를 사랑한다면!" "이게 바로 무대의 '연극성'의 의미가 충실히 드러나는 거예요...." 라고 말하는 대사를 추가할 수 있었다. [시네로망에서 로브그리예가 대중소설적인 멜로드라마식의 상투적인 대사를 그 장면에 첨가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의 정의에 대한 문제를 부각하면서 배우의 연기를 위한 배경 설명, 대사 문제를 살펴보았다. 한편으로는 '대중소설'을, 다른 한편으로는 루이 푀야드의 영화를 교차 조회하면서 말이다. 레네와 로브그리예의 인터뷰에서 드러나듯이 그건 그들 각자의 머릿속에 있을 수 있는 '이미지들' 서로 응답하고 간섭하고 반박하기까지 하는, 어찌 보면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이미지들에 대해 영화인으로서 나름대로 제시할 수 있는 견해의 본보기 같다.
두 편의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는 서로 다른 쌍둥이이면서 상호보완적인 작품들이다. 당시 영화는 종종 두 알랭의 작품처럼 소개되었지만(사진기자들은 두 사람을 대칭적인 자세로 찍은 사진들을 소개했다) 실제로는 알랭 레네의 작품이었다. 알랭 로브그리예는 시네로망을 만든 아버지였지 시나리오와 대사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우리는 둘 중의 한 작품만을 선택해 경험하거나(이것, 아니면 저것...), 혹은 둘 다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적으로 이쪽 혹은 다른 쪽에 우선적으로(역시 잘....) 침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둘 사이에는 아주 큰 근접성(대사들은 시네로망과 영화에서 거의 동일하다)과 지극히 미세하건 아니건간에 다양한 차이점들이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이 영화는 한 남자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그 음성은 우리의 고막을 침투해서 그가 말하는 것의 미로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동시에 우리 앞에는 길을 잃을 것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처음에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귀 자체가 아주 멀리, 땅에서 아주 멀리, 카페트에서 아주 멀리, 이 무겁고 텅 빈 무대에서 아주 멀리 천장 아래에 둘린 복잡한 장식띠에서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아주 멀리라니, 도대체 그게 어디란 말인가? 귀의 문제를 음성으로 바꾸어 보면 안 될까? 레네는 시네로망이 불러일으킨 메아리를 명상한다. 관객에게는 바라보고 듣도록 요구된다. 그러나 즉시 이 청취는 영화에 속한 음성(혹은 음악)의 청취와 관객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내적인 음성의 청취 사이에서 이중화된다. 영화는 우리도 읽을 수 있는 것, 알랭 로브그리예의 사인으로 미뉘출판사에서 출판된 시네로망, 그리고 영화의 실현 이전에 실현된 것을 충실히 들려 준다. 영화는 텍스트의 단어들로부터 전이된 인물과 장소들을 보여 준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텍스트는 영상 속의 독특한 음성들을 통해서 즉시 변형된다. 레네의 영상 이미지들은 이미지대로 소설가가 책에서 펼친 묘사의 흔적을 지닌다.
영화가 처음 시작될 때, 약간 과장되게 고양된 음악이 깔린 후에 곧 희미한 음성이 들릴 듯 말 듯 오르간 음률 사이사이로 간헐적으로 들린다. 그 음성은 우리로 하여금 귀 기울이게 하고, 미로를 가로지르는 아드리안의 실처럼 가느다란 나선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우리도 알 듯이 X의 음성이다. 그 음성은 영화<문 뒤의 비밀> 초반의 여자의 음성, 아니면 <아름다운 암흑>의 프롤로그의 음성과 같이 내면의 음성, 중얼거림, 활동 개시, 출발 준비를 알리는 음성이다. 영화 초반에서 이 '나'는 아무와도 관련이 없다. 영화 관객은 이 미지인과 길을 떠난다. 이어서 영화 화면 속에는 M이 나타난다. M은 연극 관객들 틈에서 극장 무대 위로 두 배우를 바라보고 있다. 그 순간에 음성은 말한다: "나, 바로 나 자신이 그들 사이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리고 나서 역시 연극 관객들 사이에서, 화면 오른쪽 끝에서 몽상에 잠긴 듯한 A가 보인다.(사실 그녀는 이미 더 멀리에서 그다지 분명하지 않게 세 번 보였다) X가 나타날 때, X와 M이 말을 나누는 곳은 실내의 커다란 거울 곁이다. 거울에는 멀리 떨어진 커플의 모습이 비친다. X는 화면 밖 왼쪽을 바라본다. 이곳은 그의 곁에 있는 거울에 모습이 비치는 커플이 실제로 있을 장소이다. 커플은 다가와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그 문 곁에는 X가 있었다.(X는 사라졌다) 카메라는 다시 왼쪽을 향해 움직이고, 화면 안 외족 끝(방금 커플이 있었을 장소)에는 A가 잡힌다. A는 여전히 꿈꾸고 있는 모습이다.
M과 X의 이중적인 대칭적 소개는 주의를 끈다. 왜냐하면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속에서는 거울 속 커플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랭 레네는 의식적으로 연극 극장 장면의 커플과 거울 프레임 속의 커플을 병치한다. 다른 한편 A는 시네로망에서도 영화에서도 처음 나타날 때에 관객들 사이에서 여러 번에 걸쳐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글로 표현된 그녀는 영화 화면에서 네 번, 언제나 화면 끝에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게 보이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이미지이다. 그런 만큼 A 앞의 한 젊은 여자에게 카메라가 주목하는 것은 마치 A를 떨구어내는 것 같다.(마치 여주인공의 선택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에서는 영화와는 반대로 A를 거울 곁에 나타나게 하지 않는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소개에서부터 대칭을 창조하려는 레네의 욕망을 새로운 기호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에게 들리는 이 음성은 X의 음성이다. 하지만 이 음성은 M의 음성으로 인정될 수도 있을까? M은 시선으로 연극 무대에서 펼쳐지는 대화를 관찰한다. 이것은 X와 A의 대화이다.(X와 A의 대화이었거나, 혹은 대화일 것이다) 그리고 X와 M을 그저 단순히 남성적 욕망의 두 버전들로 볼 수는 없는 걸까? 여성 이미지 주변에서 소유와 매혹, 우화와 질투라는 영원한 술책을 연기하는 남성적 욕망의 두 버전으로 말이다. XMA는 'X(한 남자)는 a(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문장의 이니셜로 읽힐 수 있고, 읽혀져야 한다. [X aime A; aime는 사랑하다는 의미의 동사 aimer이고, '엠므'로 발음된다] 남자를 여자에게로 밀어대는 이 충동이 연상되면, X와 M 둘 중에서 누가 더 앞선 인물인지 결정하기 불가능하게 만드는 처녀생식의 문제가 발생한다. X와 M은 각각 정열의 중개자, 고통의 중개자, 그리고 타자의 중개자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영화와 시네로망 중 어느것이 정말로 다른 것보다 앞서는지 말하기 불가능하다) A 역시 검은 아름다운 미인이었다가 흰 의상의 여인이었다가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X에서 M으로, 시네로망에서 영화로, 검은 A에서 흰 A로 오고 간다.
이 영화에는 조각상 곁에서 전개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남성 화자가 여자에게 "당신은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내가 말했잖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다른 장면에서 이미 여자는 옌센의 그라디바를 은연중에 연상시키는 조각상과 비교되어 언급되었다. 이것은 기이한 찬사이다. 그리고 나서 남성 화자는 곧 소각상에 대해 말한다. 등장인물들은 '광석화되는데'(인물들의 부동성, 포즈들, 굳은 제스처들로 표현된다), 조각상은 주위를 도는 카메라의 여러 다양한 시각에 의해서 생명을 부여받는다. 조각상은 자리를 옮긴다. 영화에서 이곳저곳 여러 장소로 나타나는 가짜 난간처럼 말이다. 몽타쥬 테크닉은 조각상들이 서로 접근하고 대립하는 것도 가능하게 만든다. 마침내 조각상이 여러 방식으로 보여졌듯이 조각의 주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제시된다. 단어들 사이로 한 장의 판화가 나타난다....
한 조각상 커플이 있다. 그 여성 조각상은 한 손은 뻗고, 다른 손은 남자의 어깨 위에 놓인 포즈를 하고 있다. 이 포즈는 뒤집힌다. 남성 X는 여성 A에게 손을 뻗는다(제발... 하고 애원하듯이). A는 자기 손을 어깨 위에 놓는다. 조각 구성 요소들은 X와 M의 대사에서, 그리고 판화나 A와 X의 포즈에서 이동(인물들의 머리 스타일의 변화, 의상, 제스처의 변화,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가는 개)된다. 이런 이동은 점점 더 스토리와 테마의 연결망을 증가시키고 조합식의 구성을 만든다. 우리들은 피에르 클로조프스키의 기술, "스스로를 다시 취해서, 방금 말한 것을 새로운 이야기의 흐름 속에 튀게 하는" 기술을 떠올린다.(미셸 푸코)
M이 판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순간에, 인물들은 이 판화의 시각에서(즉 판화가 있는 벽에서) 화면에 잡힌다. 배경에는 난간과 조각상을 그린 착시화가 있다. 착시화 속 난간 뒤로는 바둑판 무늬(흰색과 검은 색의 사각형들)바닥이 보인다. 이 바둑판 무늬 바닥은 다른 난간으로 중단되는 것 같다. 이 난간은 앞화면의 난간과 비슷하다. 이 난간의 뒤로는 계속 바둑판 무늬 바닥이 보인다. 착시화 속의 이런 그림은 난간과 바둑판 무늬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 같은 시선 교란을 불러일으킨다. 인물들은 판화(한구석에 조각상이 있는 정원의 등각 투영도를 보여준다)와 카메라의 시각 끼워넣기 테크닉 사이에 갇혀 있다. 따라서 인물들은 저택의 내부에서도 바깥 정원에 뻗어 나간 길들이 극단에서 맞닥뜨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시 처한다. 그것은 길을 잃어버리는 무한이기도 하고, '빠져 나갈 방법이 없는' 저택의 전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장 루이 셰페르가 분석한 파리스 보르도네의 그림<체스 두는 사람들>의 무대장식술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타일 바닥은 바둑판 무늬이다. 영화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의 바둑 두는 두 인물은 난간 있는 배경이 끝없이 펼쳐지는 착시화 앞에 위치한다. 착시화는 정원과 조각상을 그린 판화 정면에 있다. M은 전략적으로 X의 계획을 실패시키려 한다. 과거로 침입해서 A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X의 시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M은 트럼프이건 도미노이건 성냥놀이이건 마리앵바드의 도박에서 언제나 이기는 자이다. 도박에서는 행운아이지만, 사랑에서는 불행하다. 따라서 이중의 도박이 펼쳐진다. X의 도박과 M의 도박 두 가지가 다 도피적 관점으로 표현된다. X는 정원으로 도피하고, M은 바둑판 무늬 속으로 도피한다. 물론 서로 바뀔 수 있다. 실패하는 도피이고 미로처럼 언제나 같은 장소들로 되돌아온다.
<지난해 마리 앵바드에서>에는 장기와 바둑, 카드 도박판이 벌어진다. 도박은 법칙이 있다. 무대 배경은 인간 몸 안의 심장 같이 복잡한 굴곡이 있는 성과 정원, 서구적 전통이 살아 있다. 이 영화와 다른 영화들 사이에는 내적인 공명 효과들과 과거 퇴행 행위들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유추 관계에 의한 연대감이 존재한다.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이 되고자 하는 것, 바로 메아리의 방일 것이다. 이 작품은 공명의 유령을 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피>에서 아름답고 신비한 한 여인은 테이블에 앉아서 카드놀이를 한다. 그녀가 마리앵바드 궁전의 복도를 망령처럼 떠다니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루이 푀야드 식의 빛과 무성영화 식의 흑백 화면 속에서 루이스 브룩스와, 프리츠 랑 감독 영화의 다른 여주인공들, 혹은 마르셀 레르비에의 여성 인물도 이 궁전 복도를 사로잡고 있다고 가정하는 건 지나친 게 아니다.
바로크식 저택의 무대는 모든 환상적인 유희에 접합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판타스틱과 만난다. 반짝거리는 물, 거품들, 눈물은 거울과 치장벽토 속에서 발견된다. 베니스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앙리 드 레니에의 단편 <인터뷰>에서도 이런 바로크식 환상적 저택을 만날 수 있다. 한 프랑스인이 그곳 알티냉고 궁의 한 공간에 세든다. 그 장소에 매혹된 그는 다른 세기의 인물인 집주인 유령에게 기꺼이 홀린다. 오래된 거울 속에 프랑스인이 당연히 비쳐야 할 자리에 예 주인의 이미지가 매일 밤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터뷰는 두 '남자' 사이의 시선의 교환을 말한다: '그 얇은 유리 조각만이 우리 사이에 놓였다. 우리는 그것이 곧 부서질 거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부서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대담할까? 우리의 시선은 서로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우리는 선 채로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각자 자신의 삶의 편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뒤에는 오래된 벽토와 자기로 된 화려한 바로크 장식이 밝은 촛불 빛에 찬란한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우리 머리 위에는 흔들리는 고색창연함 속에서 고대의 알티냉고 궁이 닳아빠진 기둥들 위에 펼쳐져 있었다. 주위에는 신비한 밤 속의 베니스가 스스로를 반영하게, 복잡하게, 경이롭게 중첩되고 있었다. 그 건축적 모자이크 속에서 호수의 빙빙 도는 거울 같은 수면, 수천의 운하들 속을 구불구불 흐르는 물로 이중화되어 중첩되고 있었다. 그 위에서 빛나는 베니스, 포장용 자기 조각들 하나와 비슷한 베니스, 반짝거리는 달 조각이 잘려진 디스크 같은 베니스....." 이 문장 속에 농축된 베니스 지형 전부는 이 작품의 여러 주제를 반영한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길목의 이행로에서 시야는 가려지는 것 없이 확보된다. 그렇지만 '목 위의' 시선, 즉 이행로 위의 시선은 모순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그 시선은 동시에 다른 편에 있으면서 뒤를 향한다.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다. 언제나 한계선상에 있지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을 포착하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해석하는 장 클로드 기게의 시선이다. 그의 시선은 검증 가능한 관찰에 근거한 해석이지만, 단지 그의 시각에 기꺼이 들어오는 사람들만을 설득할 수 있울 것이다. 그러나 그외에 영화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 그리고 영화 속에서 판타스틱 요소를 들어올리는 다른 방식은 없다.
"크레디트 타이틀의 밤 장면은 주인공 아셴바크의 육체적 죽음을 따라가는 밤이라고 상상하자. 불가능할까? 오히려 그렇게 상상하지 않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런 상상을 뒷바침해 준다. 음악의 예부터 시작해 보자. 자막의 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아다지에토로 이어진다. 그것은 말러의 제5교향곡에 속한 '악절'로, 가른 세계를 향한 '이행'의 음악이다.
따라서 아셰바크는 죽은 자들의 나라에서 되돌아온다. 그래서 아셴바크는 무기력하다. 여기서 그를 잡는 카메라 줌 사용이 정당화된다. "소년 타치오가 해변으로 향하는 회랑 기둥들 사이를 돌 때, 줌은 아셰바크와 소년 타치오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만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합하도록 만든다.' 카메라 줌은 '사유 내적 공간'을 창조한다. 그리고 장 클로드 기게의 해석은 영화적 판타스틱의 순간이 획득되는 시간을 한차원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하늘의 천사도 지옥의 악마도 등장하지 않는 고차원적인 판타스틱의 순간을 부각시킨다. 아셰바크는 산 자들의 세계의 방문객이다. 그러니까 부활과 해체 사이를 방문한 손님이다. 그는 서구의 죽음과 서구 문화의 죽음의 알레고리이고, 종말의 재앙이다. 종말의 재앙을 표현하는 무소르크스키의 성악곡은 "해변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찍으며 텅 빈 공간을 채워 가는 화면에서 배경으로 깔린다. 그것은 불행의 노래이다. 여기서 제1차 세계대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펼칠 뿐 아니라 더욱 먼 미래도 자기 그림자를 던진다. 검은 옷 입은 두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말이다...." 아셰바크는 잔인한 빛 속에서 비틀거리는 곤충처럼 화면에 잡힌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아픈 상처의 술잔이 넘치듯 검은 눈물이 흐르며 번진다.
* 영화 속에서 판타스틱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유령들이 서성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유령, 그것은 엄일한 의미에서, 나의 시선도 아닌, 타자의 시선도 아닌, 내가 알 수 없는 내 안의 타자의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