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통영을 다녀왔다. 충무공의 얼을 기리는 충렬사, 통영 여자를 좋아하였지만 이제는 돌이 되어 통영의 한 모퉁이에서 란(蘭)을 기다리는 평안북도 정주출신의 백석, 시식해보라고 건네주는 꿀빵을 먹으며 전통시장을 지나 굽이굽이 길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동피랑, 거북선과 판옥선 내부, 자식이 크면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뜻에서 중국의 현자인 이윤(伊尹)을 생각하여 뽕나무 상자(桑)가 들어가게 이름을 지었다는 세계적인 음악가인 윤이상의 기념관, 추상적인 그림이 특징인 전혁림 미술관, 대하소설 토지로 유명한 박경리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않은 다른 공간으로 간다는 이 사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행방시켜주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놓은 힘을 지니고 있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을 통한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정신에 활력을 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장소가 아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얻게 된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기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그런데 그 효력은 시간만큼 철저하지 못한 반면 더욱 신속히 나타난다.” 라는 헤세의 말이 기억난다.
처음 도착한 곳은 충렬사. 이곳 충렬사는 임란이 끝난 지 10년 후인 1606년에 선조가 세웠다. 충렬사 현판에 ‘宣賜(선사)’라는 글씨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영혜씨가 향을 사르고 우리는 묵념을 하였다.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씨앗문장은 ‘서해어룡동/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였다.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뜻을 알아준다.’라는 뜻이다. 이순신은 이 글귀를 자신의 칼에다 새겼다고 한다. 이는 전장에 나가는 이순신이 던진 출사표다. 나는 과연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이순신 장군처럼 마음 자세를 가져본 적이 있던가? 이곳 충렬사는 숭고함 그 자체다. 숭고함은 우주의 힘, 나이, 크기 앞에 인간의 나약함과 만나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왜 나는 기쁠까? 왜 나는 이런 작아지는 느낌을 찾게 될까? 그리고 심지어 그 안에서 기쁨을 찾을까?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백석시비 방문이다. 충렬사 계단을 내려오면 길 맞은편 아래쪽 동백나무 아래에 오석이 하나 있다. 돌은 작은데 시가 길어서인지 글씨가 작아 눈에 잘 띠지는 않는다. 제목은 「통영(統營)2」이다. 일행은 시를 소리 내에 읽었다. 시를 다 읽는 순간 황지우의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라는 내용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생각났다. 우리는 가파른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는 생각에 란(蘭)에게 빠졌던 백석도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백석에 대해 잘 모른다. 2년 전 아트앤스터디에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배운 기억이 있고, 서재에서 안도현이 지은 백석평전 정도는 나온다.
①녯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가지 않은 천희(千姬 )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②주홍칠 날은 정문旌門이 하나 마을어구에 있었다. 효자노적지지정문 孝子盧迪之之旌門 - 몬지가 겹겹이 앉은 목각木刻의 액額에 나는 열 살이 넘도록 갈지자字 둘을 웃었다. 어 두 글자가 겹쳤네.
라는 두 구절에 주목한다. 천희(千姬)는 ‘시집 안 간 바닷가 처녀’를 말한다. 일본어 ‘히메‘가 떠오른다. ‘굴껍지처럼 말없이’ 라는 구절도 좀 걸렸다. 일본식 표현이 아닐까 하여 일본어 표현 사전을 열었지만 실제 그런지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之’자의 해석에서, 열 살의 백석의 문리로는 두 자 중에 하나를 빼야 한다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유적’과 ‘유적지’를 구별할 나이는 아직 아니었던 것이다. 나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차 속에서 이영혜씨가 “현대인들은 백석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나요?”라는 문제를 낸 적이 있다. 나는 묘사라는 말에 혼동이 생겼다. “아니 현대인이 백석에 대해 묘사를 하고 있다고?” 답은 “이 땅의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었다. 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였구나! 왜 이 땅의 시인들이 백석을 가장 좋아할까? 공부가 필요한 대목이다. 우리가 소리내어 읽은 「통영(統營)2」는 기행의 상상적 구조를 빌려 쓴 사랑시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시는 여자가 사는 통영이라는 바닷가를 신기해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18세 여학생을 만나러 가는 과정과 설렘을 적은 시다. 가장 기억이 남는 구절은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엔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다. 통영 여자가 좋아지자 자기도 통영과 일체감을 느끼고 싶은 감정을 나타냈다. 한편 이순신은 아들이 3명이다. 이순신은 자기 앞에서 질질 짜는 백석을 보고 아산에서 아버지를 찾으며 절명하였을 셋째를 생각하며 “짜식 하고는!” 하면서 측은한 백석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받아주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너 ‘서해어룡동/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를 해석해봐!” 라고 했을지도.
백석평전에 의하면 백석은 83세로 북한에서 죽었다. 박경란은 대전 국립묘지에 묻혔다. 인연이 되지 못한 것이다. 깊은 골에서 난 스물다섯의 문학소년 백석. 바닷바람 맞고 강하게 자란 18세의 여자 박경란. 남쪽의 바다와 북쪽의 산. 결합이 잘 될까? 얼마전 내가 가르친 여식 3명이 찾아왔다. 2명은 서울에서 공부한다. 반장을 했던 여식이 하는 말 “저는 서울 남자들이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남쪽 여자와 북쪽 남자는 원형적으로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었던 것일까?
점심은 마음씨가 깊은 이현주씨가 샀다. 3명인데 남자가 한 명 더 있다고 4인분 시킨 이현주표 충무김밥. 우리는 동피랑으로 향했다. 백석의 「가즈랑집」시가 걸려있는 건물을 지나 첩첩이 구굴구불 둘러진 길을 따라 동포루에 힘들게 올라보니 눈앞에 탁 트인 바다를 보면, 종종걸음으로 거칠게 올라와 갑자기 넓게 펴져 나가는 나의 시야를 의식하고는 저절로 좋구나, 하게 된다. 동피랑은 그 마을 자체로만으로는 안 된다. 곁에 있는 강구라는 해안을 같이 껴야 한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다 '몽 마르다' 라는 카페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옆에 있는 이현주씨에게 저 제목을 보라고 손짓했다. 뭐야 저 이름? 프랑스의 ‘몽마르트 언덕’을 따왔나? 그렇다면 ‘몽’은 ‘산’인데 ‘마르다’는 뭐지? 말 그대로 ‘갈증이 난다’는 뜻인가? 아무튼 그럴듯한데.
동피랑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무척 더웠다. 여름과 태양으로 상징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생각났을 정도였다. 태양열에 열 받은 우리는 순간 심각했다. 이 길을 가야되나 접어야 되나. 숨이 막히고 길을 우리를 가로막고. 발밑에는 뜨거운 사막, 머리 위의 태양으로 인해 결국 아랍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뫼르소가 떠올랐다. 이방인에 이런 구절이 생각난다.
조금 전과 다름없이 모든 것이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모래 위에서 바다는 잔물결에 북받쳐 가쁜 숨을 다하여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바위께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태양 아래서 이마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열기 전체가 내 위에서 내리눌러대면서 나의 걸음을 막았다. 그리하여 내 얼굴 위에 엄청나게 뜨거운 입김이 와 닿을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바지주머니 속의 주먹을 움켜쥐고, 태양과 태양이 쏟아 붓는 불투명한 취기를 이겨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티었다. 모래에서, 하얀 조개껍질이나 유리조각에서 빛의 칼날이 솟구칠 때마다 턱이 움찔거렸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다음 장소는 윤이상 음악기념관이다. 도착하면 즉시 해설사의 해설이 예약되어 있었으나 직원에 의하면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당장은 해설이 안 된다고 하였다. 잠시 후 그 직원이 나에게 인원이 몇 명이냐고 물어왔다. 24명이라고 하니, 자기가 직접 설명을 하였다. 세계적인 음악가란 말에 다들 주목하였다. 한국의 전통음악에다 서양음악을 접목시키려고 노력하였다고 하였다. 「윤이상 작품 ‘禮樂’에 대한 분석 연구」라는 석사논문에 따르면, 아버지가 중국의 현인으로 알려진 이윤(伊尹)의 이름을 연상하여 끝에 상(桑)자를 붙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출발하는 차 속에서 이영혜씨는 윤이상의 음악CD를 틀었다. 준비가 철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1부는 ‘서주와 추상’, 2부는 ‘무악’, 3부는 ‘광주여 영원히’인 것으로 기억한다. 3부까지 듣긴 다 들었지만 2부와 3부는 이영혜씨와 애기를 하느라 잘 듣지 못했다. 아무튼 1부는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데 조용하다가도 007에서나 들었던 긴장김이 감도는 분위기도 느낀다. 나는 궁금하여 검색하니 ‘서주’는 ‘전주’라는 의미의 ‘팡파레’, 즉 ‘서곡’이라고 이영혜씨가 답을 한다. ‘추상’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나, 이현주씨, 이영혜씨와 같이 애기를 나누었다. ‘추상’이 무슨 뜻이지요? 글쎄요. 엄하다하면 가을 추, 서리 상의 ‘추상(秋霜)’이고요, 이미 지난 것을 생각한다면 쫓을 추자에 생각 상의 ‘추상(追想)’입니다만. ‘추상’을 영어로 ‘Memorial’이라고 이영혜씨가 말한다. 아무튼 기념관 1층 안내 데스크로 가서 CD를 구입하려고 하니 다 팔려서 없다고 하였다. 나중에 돌아오는 차에서 이영혜씨에게 어떻게 샀느냐고 물으니 인터넷으로 주문했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잔잔한 흐름이 좋아서 나도 사고 싶었다. 대신 윤이상이라는 책을 샀다.
윤이상 기념관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과거는 도처에 존재한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생각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인식 가능한 선례들을 가지고 있다. 유물, 역사, 기억들이 인간의 경험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과거의 특정한 흔적들은 궁극적으로 사라지겠지만 집합적으로는 소멸되지 않는다. 기념되든 거부당하든 주목받든 무시당하든 과거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박경리 문학관을 들렀다. 인근의 묘소에 까지 올라 묵념을 하였다. 이번이 두 번째다. 나는 박경리라는 단어를 보면 물론 토지가 생각나야 하겠지만, 칼의 노래로 유명한 소설가 김훈이 쓴 다음 대목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박경리가 맞는지 긴가민가하던 김훈은 기자들의 무리를 떠나 여인네 쪽으로 접근했다. 가까이 가보니 과연 박경리 선생이었고 등에 업힌 아이는 김지하의 갓 태어난 아들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선생이 알아보지 못하게 위치를 잡은 김훈은 선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대 최고의 문학가인 박 선생에게서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여성, 어머니로서의 질긴 모성의 힘을 느낀다. 그분은 담요로 만든 방한화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 발이 몹시 시려왔던지 이따금씩 방한화를 벗고 손으로 언 발을 주물렀다. 등에 업은 아이는 머리끝까지 온통 포대기로 감싸고 그 포대기 위를 다시 두꺼운 숄로 덮어서 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그 여인네는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얼렀다.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그 여인네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네가 그때 아이에게 한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답답했다. “울지 마라, 아비 곧 나온다.”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그 여인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는 매우 낡아 있었다. 포대기는 누빈 포대기였는데 허리 부분을 넓게 접어서 아이의 등에 힘이 걸리게 바싹 조였으며 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포대기 끈을 여려 겹 둘렀다. 그래도 그 여인네의 야윈 몸으로부터 아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여인네는 자꾸만 몸을 추슬러 아이를 끌어올렸다.… 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無名)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김훈, 바다의 기별
한겨울 구속된 사위가 풀려나는 날, 김지하의 장모인 박경리는 딸의 아이를 등에 업고 사위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장면을 적은 글이다. 야윈 몸으로 흘러내리는 아이를 추슬린다는 구절에서는 모성애를,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했던 박경리라는 구절에서는 지난(至難)했던 어머니 박경리를 기념한다. 돌아와 박경리 동상 앞을 가니 무시무시한 글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박경리 선생님왈 “버릴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듯 싶다.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충렬사를 나와 명정(明井)을 보고 다들 버스로 돌아갔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충렬사 안에 배롱나무가 요염한 자태로 높게 피어있었다. 요염하기 때문에 한 그루다. 나는 배롱나무 꽃의 부족함과 겸손함과 연약함과 요염함을 무척 좋아한다. 전임 직장에서 떠나는 소감을 말하라고 했을 때 15명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그 동안 정말 감사합니다. 동백이 피고 배롱나무 꽃이 필 때면 이 여학교가 그리워질 것입니다. 그때 찾아오겠습니다.” 라고. 시퍼런 동백이 길에 누워 눈이 시리도록 나를 쳐다볼 때는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고, 동백꽃이 지천인 여수의 「여수밤바다」라는 노래가 연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옆에 숨어 있던 배롱나무는 키 큰 소나무에 가려 눈에 잘 안 띄었다. 이 나무와 나는 일찍 오고 늦게 가며 말을 걸곤 했었다.
통영의 충열사에서도 그 한 구루를 보았던 것이다. 볼수록 배롱나무 자체는 별로다. 고르게 자라지 않고 왼쪽 오른쪽으로 휘어져 자란다. 그래서 중간은 텅 비었다. 나는 이를 배롱나무의 겸손이라고 부른다. 꽃도 잎의 끝에 모두 모여 있다. 나무 가까이 가서 보면 꽃이 별로다. 약간 떨어져서 보아야 한다. 마치 닭 벼슬이 머리에서부터 등위에 지나간 것처럼 배롱나무 꽃들도 위의 끝에서 끝으로 지나간 모습을 하고있다.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간이나 핀다고 하여 백일홍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한다. 나는 배롱나무를 사색나무라고 부르고 싶다. 남을 부르지도 않고 떠나가는 나에게 애원하지도 않아서 자꾸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배롱나무의 분홍을 좋아한다. 마음에 따라 두꺼울 수도, 얇을 수도 있는 색이다. 투명해 보일 수도 탁해 보일 수도 있는 색이다. 나와 상관없는 일은 보이지 않고, 내가 필요로 하는 색만 보인다. 분홍을 알아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걸 원하고 있을 때만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누구나 살고 있지만 누구나 살아 있다고 느끼기 어려운 거처럼.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서 분홍을 예찬한 대목을 씨앗문장으로 삼는다.
①분홍은 잘못 태어난 색이다. 색이 되려고 태어난 무엇이 아니라 공기가 되려는 것을 한사코 잡아놓은 것이다. 색이 되려고 했는데 빛을 너무 많이 쪼였다. 무언가 되다 말려고 했는데 바람이 닥치는 바람에 굳어 버렸다. 색깔의 사생아. 보라색이 그런 것처럼 보나마나 분홍색도 화학적 실수로 인해 발견된 색일 것이다. 그래서 지루한 세상은 조금 나아졌던가. 인류의 이 안 좋은 기분이 나아졌는가. 아픈 머리에 머플러를 두르고 봄이면 만발하는 분홍.
②분홍은 욕망의 놀이를 하고 싶었다. 이 색과 저 색 사이를 뛰어다니며 이 색과 저 색의 질투라도 불러내고 싶었다. 싸움이 있는 곳에 언제나 그 색이 있다. 나와 당신의 싸움, 당신과 나와의 싸움, 그 자리에도 분홍은 끼어들었다. 하지만 혼자 놀아야 할 색이 아니던가, 분홍은. 그래서 분홍은 꽃이 되었다. '곁을 주다'라는 말. 분홍은 그 말의 용법을 안다. '혹시 날 위해서 웃어줄 수 있어요?'라고 묻는 사람에게 헤프게 웃어줄 줄도 안다. 은근 닮았다. 초여름의 저녁의 노을. 높은 곳에 올랐을 때의 심장의 빛깔. 그리고 자신이 무엇임을 안다. 불륜한 경지에 들었음을 선언했으므로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다. "꼭 집에 있어요. 나를 배달시킬 것입니다. 받는 즉시 개봉하세요. 오래 두면 위험하답니다. 대신 부끄러움이 많으니 혼자 있을 때만 개봉하세요." 그렇게 분홍은 배달된다.
③조금 가난한 색. 그래서 그 위에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싶은 색. 조금 모자란 색. 그래서 많이 배울 수 있는 색.길에 넘어진 일이 자꾸 머리에 남아서 귓가가 화끈해지는 듯, 실수한 일들이 그 다음 날까지 따라와 더 선명해지듯, 자꾸 마음에 남는 색,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일수록 가슴에 더 오래 남는다. 지워도 닦아도 더 선명해지니까.
④심정의 기복을 닮은 색. 그래서 먹고 싶거나 멈에 걸치고 싶은 색. 마음에 닿으면 길길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색. 칙칙한 바닥에서 일어나라고 부추기는 색. 모든 것들이 의미 없이 느껴지는 날, 가까이 두어야 할 분홍은 그런 색이다.
분홍이 너무 좋아 씨앗문장을 길게 인용했다. 뭔가 부족해보이는 색이지만 나를 위해 곁을 줄수 있는 색, 사람의 마음을 닮은 색을 나는 배롱나무의 분홍에서 느꼈다.
갔다 와 보니 버스 여행도 좋다. 버스 밖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움직인다. 차가 평야를 가로지르면 나는 억제 없이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고, 누구하고 사이에 형성된 불신을 생각한다. 내 정신이 어려운 관념에 부딪혀 텅 빌 때마다 의식의 흐름은 창밖의 대상에 달라붙어 몇 초 동안 그것을 따라간다. 그러다 보면 또 새로운 생각의 똬리가 형성되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 몇 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꿈을 꾸다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닌 것이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불변한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 또는 버스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해야 할 일이 생각뿐일 때에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의해서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투를 흉내를 내야 할 때처럼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생각도 쉬워진다. 여행자의 책에서 도움을 얻었다. 여행에 대해 쓰는 것보다는 여행하는 것이 훨씬 쉽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한 말이다.
권력을 고찰하려면 일단 그 사람의 일대기를 작성해야 한다. 특히 과거의 인물일 경우. 일대기를 놓고 중요지점 다시 말하면 한 개인이 조직 속에서 크게 변화하는 시점의 앞 뒤를 살펴야 한다. 이 때 살펴야할 요소는 권력의지, 그의 감정, 상징구사능력, 언어, 시간의 흐름 인식, 처음과 끝도보아야한다. 이런 것들의 결합이 그가 구체적으ㅗ 맞닥드리는 현실에서으 대응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권력은 뇌도 바꾼다
최근 교육부 고위공무원이 “민중은 개·돼지다”라고 발언해 파면됐다(경향신문 7월8일 보도). 그는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사회의 상식과 정의에 어긋나는 이 같은 발언의 원인은 고위공무원으로서의 특권의식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최근 특권의식과 권력의 맛에 취해 사회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례가 잇따랐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이나 주차원을 무릎 꿇게 하고 화를 낸 백화점 모녀 사건, 대기업 간부가 라면이 덜 익었다며 비행기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 등 한국사회에서 갑질의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높은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과학자들이 이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특히 권력이 인간의 뇌와 호르몬 등 생물학적인 부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제까지 발표된 연구를 종합하면 권력에 취하면 뇌가 변하고 그 결과 공감능력이 떨어지거나 호르몬에 변화가 생기는 것으로 조사됐다.
나 편한 대로 명령을 하는 ‘고권력자’는 자신의 이마에 알파벳 E를 그릴 때 자기가 쓰기 편한 방향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상대방에게는 E의 좌우가 거꾸로 보인다.
남 보기 쉽게 명령을 받는 저권력자는 상대가 쉽게 알아보도록 알파벳 E를 그린다. 실험결과 저권력자 실험그룹은 12%만이 자신이 편한 방향으로 알파벳 E를 그렸다.
■권력이 공감능력을 떨어뜨린다
회사에서는 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할까? 과학자들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는다.
이를 증명한 게 ‘알파벳 E 실험’이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 경영대학원 소속 애덤 갈린스키 교수는 2006년 ‘심리과학학술지(Psychological science)’에 사람은 권력을 가질수록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갈린스키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명령했던 경험을 떠올리게 하고 다른 그룹에는 명령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후 갑자기 자신의 이마에 알파벳 대문자 E를 그려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명령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 일명 ‘고권력자’ 실험그룹은 33%가 자신이 쓰기 편한 방향으로 알파벳 E를 그렸다. 반면 저권력자 실험그룹은 전 그룹의 3분의 1인 12%만이 자신이 편한 방향으로 알파벳 E를 그렸다. 자신이 쓰기 편한 방향으로 이마에 알파벳 E를 그리면 상대방은 알파벳 E의 좌우가 거꾸로 보인다. 즉 고권력자 그룹보다는 저권력자 그룹에서 상대방이 보기 편하도록 알파벳 E를 그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말이다. 연구진은 오른손과 왼손잡이의 차이는 실험 과정에서 그 영향을 통제했다.
최근에는 권력이 뇌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캐나다 윌프리드로리어대 제레미 호기븐 교수와 토론토대 마이클 인츠리트 교수 공동연구팀은 권력을 가지면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게 하는 거울뉴런이 잘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남에게 의존했거나 또는 남에게 지시를 내렸던 경험을 글로 쓰게 한 뒤 손으로 고무공을 쥐는 영상을 보여줬다. 그 결과 권력이 있었을 당시를 회상한 실험 참가자는 거울뉴런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반대 그룹은 거울뉴런이 활발히 작동했다.
연구결과는 2014년 심리학 분야 국제 유명 학술지인 심리실험학회지에 게재됐다. 거울뉴런은 타인의 말을 듣거나 표정·몸짓을 보면서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신경세포다.
다커 켈트너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권력에 취하면 타인과 동료를 괴롭히며 모욕을 더 많이 준다는 연구결과도 내놨다. 켈트너 교수는 이 모습이 마치 눈 바로 뒤편에 위치한 뇌 부분인 안와전두엽이 손상된 환자의 행동 방식과 비슷하다며 권력에 취한 행동과 뇌질환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호르몬 변화시켜
권력이 체내 호르몬을 변화시킨다는 연구도 있다.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 심리학과 이안 로버트슨 교수는 2013년 발간한 책 <승자의 뇌>에서 권력이 주어지면 남녀 모두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증가한다고 밝혔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 호르몬이지만 여성의 몸에도 소량이 있다. 테스토스테론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데 그 양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두려움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
테스토스테론이 권력욕과 관계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붉은원숭이의 무리를 관찰한 동물행동학자 캐론 쉬블리 덕분이다. 쉬블리 박사는 붉은원숭이 무리를 관찰하다가 서식지 다툼에서 패배한 원숭이는 유순해진 반면 승리한 원숭이는 더 포악해진다는 점에 착안했다. 양측 원숭이의 호르몬 변화를 측정했더니 승리한 원숭이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높아졌지만 패배한 원숭이는 그 수치가 낮아져 있었다.
여성의 경우에는 테스토스테론뿐 아니라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도 권력의 영향을 받는다. 미국 미시간대 연구진은 2008년 심리학 분야 국제 학술지 ‘호르몬과 행동’에 여성의 경우 권력을 갖게 되면 에스트로겐이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연구진은 남성의 경우 권력과 테스토스테론의 상관관계가 명확한 반면, 여성의 권력과 테스토스테론의 상관관계를 증명하는 연구 수가 많지 않아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연구진은 여성 참가자들에게 이기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록 하는 게임을 제안한 뒤 그들의 게임 전후 침 속에 섞인 에스트로겐 수치를 분석했다. 조사 결과 높은 자리에 올라간 참가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아져 있었다. 어떤 참가자는 게임에서 이긴 뒤 하루가 지나서도 침 속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게 유지됐다. 연구진은 “이번 실험은 권력을 얻은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아지는 것과 여성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아지는 것이 비슷한 경향성을 띤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권력에 취하면 오만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적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 본성인 것도 같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죄수와 간수 실험’에서 간수 역할을 부여받은 실험참가자의 60%가 권력을 등에 업고 죄수 역할을 부여받은 실험참가자를 고통스럽게 고문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권력자들이 권력에 취하거나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짐바르도의 실험에서 40%의 실험참가자는 간수로서 죄수에게 고통을 주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따르지 않았듯 말이다. 인간은 권력 추구 욕구와 인간으로서의 정의 추구라는 욕구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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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로 움직이는 세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