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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로 오신 예수님과 우리 시대의 목사와 목양
은성: 벌써 성탄절이 다 되었네요.
아버지: 작년에 성탄절을 보낸 것이 며칠 전같이 느껴지는데 금방 1년이 지나다니 정말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구나. 그런데 올해 성탄절에 특별히 생각해 본 것이 있니?
은성: 요한복음을 읽다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크게 다가왔어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15)
아버지: 도둑과 “선한 목자”가 대조되고 있는 말씀이구나. 목자들은 양 떼에게 먹을 것을 주고 양 떼를 보호, 관리하는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대 근동에서 ‘목자’라는 용어는 정치적 지도자들을 묘사하는 용어가 되었다. 잘 아는 '함무라비(Hammurabi) 법전'에서도 통치자를 신이 백성들을 위해 지명한 목자로 언급하고 있다. 이와 동일한 이미지는 성경에서 ‘살만예설(Shalmaneser)’, ‘디글랏빌레셀’ ‘고레스’(사 44:28)에게도 사용되었고, 특히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지명된 목자로 불리우고 있다(삼하 5:2, 시 78:70-72). 나아가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도 적용되고 있다(시 23:1-4; 28:9; 80:1 사 40:11 렘 31:10). 또한 종말론적인 다윗 왕도 목자로 묘사되고 있고(겔 34:23; 미 5:4) 예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목자시요(히 13:20 벧전 2:25 계 7:17), 백성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목자로 불리우고 있다(마 26:31). 또한 예수님은 모든 민족에 대한 최종 심판자(마 25:32-33)요, 스스로 목자들로 불리우는 교회 지도자들의 인도자요 모범으로서 목자라고 불리우고 있다(벧전 5:2-4 행 20:28-30).
은성: 전에 배우기로 양을 치는 목자는 별로 귀중하게 여겨지지 않는 비천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전혀 다른 성격이 있네요.
아버지: 그렇지. 그러나 지금은 도둑과 “선한 목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예수님께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을 보면 악한 목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몇 군데만 보자.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 56:10-12)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1-2)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렘 50:6)
은성: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지요?
아버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칼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도둑을 “그리스도보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들”이라고 설명했고, 메튜 풀 주석은 “그리스도보다 먼저 왔지만 그리스도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설명했다. 예수님 당시를 보아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권력과 유익을 위하여 율법이라는 멍에로 사람들을 힘겹게 했고, 자기들에게 걸림돌로 보이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고, 나중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핍박하고 투옥하고 죽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은성: 그러니까 잘못된 목자들이 힘을 갖고 사람들에게서 빼앗고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땅에 오셔서 참된 목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셨다는 것인가요?
아버지: 맞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목자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것을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오셨는데, 예수님이 하늘에 로고스로 그냥 계시지 않고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내려오셔서 성육신하시고 목자로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크신 능력의 발휘를 감지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제한이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갈 수가 없으므로 예수님이 목자의 형식을 취하셔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끝까지 “선한 목자”라고 하실 때는 예수님이 아래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요, 내려오셔서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은성: “선한 목자”라는 것이 성육신과 관계가 된다는 것은 처음으로 배우는 사실인데요. 이번 성탄절에 받는 큰 선물 같아요.
아버지: 물론 인도에 앞서서 생명을 얻게 한다는 사실이 오지. 도둑 즉 거짓된 목자들은 살리는 일은 하지 않고 죽이려고 하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한 삶을 주시는 분이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살려주시는 예수님을 얼마나 배척하고 공격했니? 사마리아에까지 찾아가시고, 두로와 시돈까지 가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선한 목자”이시다. 이런 예수님의 심정을 잘 말씀하고 있는 성경을 살펴보자.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은성: 이제는 오늘날에도 거짓된 목자들처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을 방해하거나 막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하겠네요.
아버지: 맞다. 교회에는 항상 거짓 교훈을 가지고 들어와 양을 귀히 여기지 않고 자기네 사리사욕만 채우는 자들이 있었기에 이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했다(겔 34:2; 행 23:2; 골 2:8). 교회 역사에서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들이 끊임없이 교회를 넘어지게 하려고 몸부림을 했다.
은성: 제 생각엔 교회에 들어온 자들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갖가지 철학과 과학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위험하고 무서운 세력 같아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유물론이나 진화론, 포스트모던 철학이나 인본주의 등은 무서운 기세로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고, 특히 자녀들을 신앙에서 떠나게 하고 있어요.
아버지: 슬프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구나. 이단의 교주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재산도 바치게 하고 시간과 재능도 바치게 하다가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게 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상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거부하고 “그것은 당신 해석일 뿐이다” “그것은 당신에겐 진리일지 모르나 나에겐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성경을 비판한다. 그러나 항상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보호와 인도로 참 신앙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을 감사하자.
은성: 오늘날엔 목사님들이 예수님을 이어서 “선한 목자”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지요?
아버지: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고, 열한 제자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는 명령을 주셨다. 그 이후로 사도들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일을 계속했고, 곳곳에 목사 혹은 장로를 세워서 자신들의 일을 이어가게 했지.
은성: 제가 어제 책을 읽다가 목사에 대한 부분이 좋았는데 같이 보고 싶어요.
목사의 의의
목사는 노회의 안수로 임직함을 받아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자니,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이다(롬 11:13).
성경에 이 직분 맡은 자에 대한 칭호가 많아 그 칭호로 모든 책임을 나타낸다.
1. 양의 무리를 감시하는 자이므로 목자라 하며(렘 3:15, 벧전 5:2-4),
2.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종이라, 그리스도의 사역자라 하며, 또 신약의 집사라 하며(빌 1:1, 고전 4:1, 고후 3:6),
3. 엄숙하고 지혜롭게 하며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고, 그리스도의 집과 그 나라를 근실히 치리하는 자이므로 장로라 하며(벧전 5:1-3),
4.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이므로 교회의 사자라 하며(계 2:1),
5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죄인에게 전파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라 권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라, 혹은 복음의 사신이라 하며 (고후 5:20, 엡 6:20),
6. 정직한 교훈으로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를 책망하여 각성케 하는 자이므로 교사라 하며(딛 1:9, 딤전 2:7, 딤후 1:11),
7. 죄로 침륜할 자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이므로 전도인이라 하며(딤후 4:5),
8. 하나님의 광대하신 은혜와, 그리스도의 설립하신 율례를 시행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라 한다(눅 12:42, 고전 4:1-2).
이는 계급을 가리킴이 아니요, 다만 각양 책임을 가르쳐 칭하는 것뿐이다.
J.A.Hodge 저, 박병진 역, 『교회정치문답조례』, 42-43
아버지: 아주 좋은 내용이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하여 잘 정리한 것이기도 하고, 오늘날 목사님들이 어떤 일을 힘써서 해야 할지를 잘 가르쳐 주는 것이기도 하구나.
은성: 여덟 가지로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이 “양의 무리를 감시하는 자이므로 목자라 한다”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아버지: 감시라기보다는 감독하고 돌본다는 뜻이겠지. 오늘날 모든 목사님들이 이런 목회를 한다면 얼마나 좋겠니?
은성: 당연히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요?
아버지: 다음의 글을 함께 읽어보면 너도 이렇게 말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잃어버린 연결고리는 말씀 사역에 밀접하게 연결된 목양적인 요소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라는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설교자요 교사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목양자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들에 보내는 서신에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제공하신 은사에 관해 말할 때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들을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보내셨음을 말하면서, ‘목사와 교사들’ 혹은 아마도 ‘목사-교사들’을 삼으신 것도 말하고 있다(엡 4:11). 두 가지 방식 모두 사람들을 목양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것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따로 지적할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많은 설교자들 가운데 목양자로서의 역할이 가진 중요성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어떤 사람들은 매우 솔직하게 ‘나는 목양자가 아닙니다. 나의 소명은 설교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말은 자신들이 서재에 틀어박혀서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러한 정신적 사고가 가진 문제는 비록 그들이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깊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는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종종 설교를 듣는 바로 그 청중들과 말씀을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일에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설교가 사람들의 지성에 닿을 수는 있으나, 그들의 마음과 양심에는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설교를 매우 편안하게 듣고서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So what?)” 하는 생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와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목양자들의 설교는 이러한 반응을 예상할 수 없는 설교였다. 그들이 선포했던 메시지를 잊어버린 사람들조차도 지적인 무관심을 통해서 반응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그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반응한 것이었다. 그러한 설교가 귀에 들려졌을 때, 각 시대를 통하여 동일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이슈에는 다양한 양상들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제시한 바와 같이, 설교의 목양적인 차원은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이며 아마도 틀림없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관여하는 설교의 잃어버린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보여주신 가장 분명한 부분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선한 목자” 설교이다(요 10:1-27). 그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에 대한 목양적인 지식과 그 양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려고 하는 의지 사이에 놀랄만한 연관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신다. “선한 목자”에 관해 예수님은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고 말씀하신다. 또한 더욱 정확하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성경에 관해 통달하신 만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뛰어난 학자이셨으며, 그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잘 알고 계셨음이 참되다는 것은 자신이 그들에게 선포하시는 진리들을 잘 아시는 만큼이나 자신의 백성들에 대해 알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는 강단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에 설교자들이 가르쳐야 하는 본문에 관련된 것만큼이나 또한 설교자들이 자신의 성도들과 가져야 하는 관계가 실제적이고 필수적인 관계라는 사실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성도들이 말씀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그들이 설교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와 더불어 설교자가 성도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도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인 만큼 모든 일에서 우리의 성도들에게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설교자인 동시에 목회자가 될 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런 종류의 사역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사 복을 주시고 사용하고자 하시는 그런 사역까지도 행하게 될 것이다.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진리의 깃발 vol. 190』, 60-63
은성: 그러니까 목사님 중에는 설교는 열심히 준비하여 전하지만 교인들과의 관계를 충분히 맺지 않다 보니 목양은 관심이 적은 분들이 있다는 것이네요. 그런 것이 심하게 되면 교사는 되어도 목사는 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버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교인들 편에 있는 목회자의 설교만 듣고 그 이외의 권면이나 징계는 무시하는 경향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은성: 목사님과 교인들이 좋은 관계를 맺고, 목사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교회라면 그 삶이 날로 더 풍성한 삶이 되겠지요.
아버지: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를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하자.
은성: 그래요. 이번 성탄절엔 목수가 아니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새롭게 배웠고, 교회의 목사님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배워서 너무 기쁘네요.
아버지: 나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다. 오늘은 이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