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블라우스를 입은 소녀 외
박길숙
단추 세 개를 다 채우면 이 시간은 금방 사라질 거에요 어머니, 너무 슬퍼 마세요 문밖은 전쟁이에요 문 안으로 어서 들어가세요 나는 봄을 파는 소녀, 군인들은 내 위로 올라온 이 봄을 화르르 무너뜨리고 있어요 잠시 노란 날개의 나비가 바덴산 너머 경계에 앉았어요 구름은 시간을 몰고 가고, 저녁은 물소리를 내며 내려앉아요 비린내가 이 저녁을 물들이고 있어요 아래 단추 두 개만 남았어요 저녁의 수염 위로 고양이가 내려앉아요 균형을 잃은 저녁이 기울어지고 있어요 동쪽부터 깊어지는 저녁의 온도, 이제 단추 하나가 남았어요 아직 블라우스는 다 입지 못했는데, 동생들의 눈에서 비린내가 나요 노란 나비가 나타나면 좋겠어요, 안대처럼 눈만 가려도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봄을 파는 처녀, 여름에도 겨울에도 나는 봄을 팔고 있대요 어머니,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마지막 단추를 채울 때까지 기울어진 저녁 위로 나무들이 넘어지고 달의 꼬리를 물고 가는 이 어둠 속으로 박공지붕 위 놀란 고양이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탕, 타앙, 타아앙,
내가 말했잖아요, 문밖은 전쟁이라고 어서 문 안으로 들어가세요 나는 이제 그만 단추를 채워도 되겠어요
월세
물고기 뼈로 지그재그 마루를 깔고 박공지붕으로 높게 천장을 올린다 허공에 그네를 하나 달아야지 발이 닿지 않게, 내 발의 쓸모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나는 그네를 탄다 발은 허공에 주파수를 맞추고 지붕이 점점 더 높아질 때까지 발길질을 멈추지 않는다 헤링본 무늬의 바닥은 일제히 허물어지고 마루가 없는 지붕이 날아오른다 이 집은 허공의 집 못을 박아도 소용이 없는 허공의 담,
그네가 초승달에 걸렸다 달 위에 앉아 지붕을 바라본다 물고기를 놓친 길고양이는 허공을 보는 일이 잦다 박공지붕 위에 길고양이를 올려두지만 어둠은 길고양이를 따라 담 밖으로 달아난다 지붕은 고양이 대신 갸르릉 거리고
나는 오래도록 그네를 탄다 발가락은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 구름사다리는 누가 치워버렸을까 지워지는 나를 달에 걸어두고 오는 길,
달이 뜨는 날이면 못을 박아도 되는 집 한 채 갖고 싶다
알비노*
색을 혼합하면 검은 까마귀가 되고 빛을 혼합하면 안개가 된다 까마귀들 사이에 하얀빛, 한 마리가 태어났다
사람들은 나를 행운이라 불러요 내 손가락들을 꺾어 목걸이를 만들어 봐요, 행복은 약속처럼 마법에 걸리고 내 팔은 당신의 맹신에 단단하게 복종할 거에요 빨간 눈으로 루비 대신 반지를 만들어 봐요, 신부의 약지에서 뜨겁게 타올라요 나는 주계열성의 빛, 나를 잘라 모닥불에 넣어보세요 내 머리카락은 하얗고 속눈썹은 가늘게 떨려요 내 음모가 궁금한 어른들은 나와 동침을 하죠 내 피는 달콤해 탄산수처럼 짜릿해요 아저씨의 불행한 미래를 내가 터트려 드릴게요 아빠는 나를 너무 사랑해요, 아프지 않게 내 다리를 잘라준 데요 아침이면 남아 있는 왼쪽 다리로 축구를 할 거에요 나는 축구공을 열고 들어가요, 그 안은 어두워서 나를 볼 수가 없죠 오각형과 육각형의 각들이 섞이면 희고 검은빛과 색이 공존해요 나는 아프리카의 돌연변이, 태어나면 안 되는 해무에요 엄마, 방안에는 자궁 같은 작은 무덤이 생겼어요 나는 여기에서 흰 공과 검은빛을 가지고 놀아요
초록의 이정표에는 탄자니아가 있어요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꼭 밟으세요 한 마리 빛이, 언제 날아오를지 모르니까요 *알비노(백색증) - 유전적 결함으로 피부, 털, 눈 등에 색소가 없는 개체
상자들
달은 벨을 울리네 넌 박스에서 태어난 마른 인형 열일곱의 엄마는 겁도 없지, 아니 겁이 많지 예쁘다 안아주지 않을래 귀엽다 까부르지 않을래 피와 살이 없는 너는 인형 아무나 보고 웃고, 아무나 봐도 우네 태어나지 않은 네 이름을 두 손에 꼭 말아 쥐고 기다리네 배꼽이 생길 때까지 옷도 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온통 없는 것들만 가득 찬 상자 열일곱의 엄마가 머리핀으로 묶어버린, 네 울음소리와 넌 오늘 상자에서 놀지 엄마는 네 심장을 오려다 주머니에 넣어두지 하혈하는 붉은 달,
엄마, 내 몸의 계절은 항상 겨울이에요 딱딱한 관절, 늘 벗겨지는 구두를 신어요 발에는 여러 개의 눈이 생겼어요 난 바닥부터 알아채는 인형 사과 상자를 잘라다 집을 만들어요 나무는 나무 냄새가 나고 갓 배달된 신문에는 석유 냄새가 나요 나한텐 무슨 냄새 나지 않나요? 나는 발가벗겨져도 부끄럽지 않아요 얼굴을 가릴 수 없어 젖꼭지가 없어서 사랑할 수도 없죠 성대를 울리지 않는 내 허밍 사람들은 내 머리부터 감기고 빗질이 잘 안 되는 머리칼에 금방 싫증을 내고 말아요 나는 곧 버려질 운명 그건, 명찰처럼 달려 있어요 계단도 없이 빠져나가는 사과 궤짝의 폐허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골목은 내 머리부터 물고 달아날지 몰라요 나한테 무슨 수상한 소리 나지 않나요?
달이 뜨면, 싱싱한 상자는 겁도 없이 태어나요
아무렇게나 쥐똥나무*
당신과 나는 같은 혈족 나는 아무렇게나 피고 아무렇게나 흐드려져요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아무렇게나 울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요 여기는 내가 살고 있는 나무 기침은 마른 잎에서 툭툭 튀어나오고 거미줄은 항상 바람에 덫을 놓아요 뿌리보다 깊은 어둠이 사는 방, 창문 밖에는 뿌리들만 걸어 다니고 암모니아 섞인 냄새는 방울방울 쏟아져요 많은 발을 가진 말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녀요 나는 가만히 주저앉아 고삐 풀린 생각들을 동그랗게 빚어요 이 까만 응집체의 냄새는 발뒤꿈치를 들고 튀어나가기 일보 직전이에요 우리는 같은 혈족, 다른 생각 공벌레는 많은 다리로 기어가요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발들의 방향 숲의 가장자리에 도착할 따까지 꿈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꿈에 멀어지기도 해요 나는 무릎을 끌어당겨요 신발도 없이 자꾸만 뻗어 나가는 생각 내 발들을 꺾어 땅속에 묻어요
가지는 허공을 뚫고 해를 당기고 있어요
*쥐똥나무의 염색체는 사람과 같은 46개이다
맨홀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구덩이를 파는 남자가 있다 생각이 깊어지면 구덩이를 파고 생각을 묻곤 한다 생각이 꺾이는 곳에 주저앉아 발을 담그고, 발가락 깊숙이 돋아나는 뿌리털을 본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쑥 뽑아다 제자리에 갖다 놓기 일쑤다 남자는 가끔 그런 여자가 사라졌으면 한다
단단한 잠이 깨기 전에 끝내야 한다 여자의 얼굴을 익반죽하는 남자 뜨거워진 여자의 얼굴을 문지르며 수제비를 뜬다 얼굴은 피었다 지었다 웃었다 울었다, 냄비 속에서 끓는다 남자는 생각이 깊어지는 쪽으로 물러나 앉아있다 역류하는 생각들이 냄비 뚜껑을 열고 들썩거린다 여자가 수그러들자 남자는 흰 나무의자에 앉아 눈을 감는다
수제비 속 얼굴은 퉁퉁 불어 있다 여자를 건져내 꽃무늬 접시에 담는다 남자는 오랫동안 얼굴을 바라본다
생각이 얕아질 때마다 구덩이를 파는 남자가 있다 깊이가 줄어든 곳에 삽질을 하고 여자의 얼굴을 떼어다 묻는다 남자는 생각에 빠진다, 그때 얼굴 하나가 굴러와 구멍을 막는다
생각이 꺾이는 곳에는 아직도 깊어지는 남자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