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계 이공 묘갈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魯溪李公墓碣銘 幷序
갈암(葛庵) 이선생(李先生)이 금양(錦陽)에서 도를 강론할 때 영남의 선비들이 다 도야(陶冶)의 교화를 입었는데 집안의 자질과 손자들이 서로 이어서 강석을 맡아 성대하게 사문(斯文)의 연원이 되었으니 마치 하늘이 도와줌이 있는 것 같았다.
선생의 손자 노계(魯溪) 공은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일찍 자당을 여의고 외롭게 양육되었으나 어진 부형의 가정에서 가르침에 젖어 문예가 일찍 성취되니, 여러 부형들이 자주 칭찬하기를 “우리 가문의 문종(文種)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이 아이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갈암 선생이 매양 사서를 초학자가 도에 들어가는 발판으로 삼으니, 공이 힘써 복종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갑술년(1694, 숙종20)에 갈암 선생이 세상의 화를 당하여 멀리 귀양을 갔다가 경진년(1700, 숙종26)에 풀려서 금양으로 돌아오니, 배우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공은 종일 조부의 심부름을 하면서 학문의 큰 방도를 들어, 마침내 과거공부를 폐하였다. 어떤 사람이 혹 너무 서둘러 판단한 것이라고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곧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옥산(玉山)의 신 절도사(申節度使) 공 가문에 장가들었는데, 신공의 아우 극재(克齋) 공은 유학으로 강우(江右) 지역의 명가였다. 공은 극재공과 종유(從遊)하면서 명리(名理)를 물었다.
갑신년(1704, 숙종30)에 갈암 선생이 돌아가시니, 공은 갑자기 선생을 가까이 모시는 것을 잃은 것으로 크게 통탄하여 들은 것을 높이고 아는 것을 행하여 경건히 힘써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상화(喪禍)가 거듭 닥쳐 경인년(1710, 숙종36)에 선친이 상을 당하고, 상을 마친 뒤에는 백씨가 또 일찍 세상을 마치니, 공은 외로운 조카를 어루만지고 종사(宗事)를 대신 맡아 다스렸다. 날로 숙부 밀암(密庵) 선생 곁에서 모셔서 친히 지결(旨訣)을 받들고, 태극도(太極圖) 사단칠청(四端七情) 이기(理氣) 등의 학설에 뜻을 다해 연구하여 가학의 바름에 어긋남이 없었다. 또 음양 상수의 학문에 두루 통하니, 당시에 밀암 선생이 때로 앞에서 그 학설을 말하게 하여 듣고서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네 덕에 아는 것이 많다.”라고 하였다.
공은 평소에 질병이 많아서 요양하기 위해 노곡(魯谷)의 선친 묘소 아래로 가서 살면서 자호를 ‘노계 거사(魯溪居士)’라고 하였다. 살림이 쇠락하여 일정한 곳에 살지 못하고 떠돌면서 병을 앓는 가운데도 오히려 강습을 폐하지 않고,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의 도는 다름이 아니라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에 불과하니, 다만 마땅히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를 잘하고 천리와 인욕의 구분에 밝은 뒤에야 거의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공이 일생 동안 지킨 독실함과 실천의 실상이다.
정미년(1727, 영조3) 4월 모일에 질병으로 약목(若木)의 우사(寓舍)에서 돌아가시니, 태어난 숙종 임술년(1682)부터 수명이 겨우 46세이다. 안동부 동쪽 탑항(塔項) 오좌(午坐) 등성이로 돌아가 안장하였다. 안으로 밀암(密庵)·고재(顧齋) 등 여러 숙부들은 통곡하고 말하기를 “가문의 서업(緖業)이 실추하였다.”라고 하고, 밖으로 제산(霽山)‧병곡(屛谷)‧눌은(訥隱)‧강좌(江左) 등 제현은 만사와 제문을 지어 애도하기를 “유림의 운수가 쓸쓸하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복환(復煥), 자는 내경(來卿)이고 처음 휘는 지조(之燥), 자는 여강(汝剛)이다. 성은 이씨(李氏)이고 본관은 재령(載寧)이니 신라 개국공신 알평(謁平)이 그 상조이다. 조선에 들어와 휘 맹현(孟賢)은 부제학이니, 공에게 7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함(涵)이니 현감 증 이조 참판이고 호는 운악(雲嶽)이다. 증조의 휘는 시명(時明)이니 진사 증 이조 판서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다. 조부의 휘는 현일(玄逸)이니 유일(遺逸)로 이조 판서가 되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니 곧 갈암 선생이다. 부친의 휘는 천(梴)이니 통덕랑이다. 모친은 문소 김씨(聞韶金氏)이니 처사 달( )의 따님이다. 배위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니 절도사 익염(益恬)의 따님이다.4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손계(遜溪) 지원(知遠)·양자로 나간 필원(必遠)·지포(芝圃) 효원(孝遠)·남애(南厓) 두원(斗遠)이고, 딸은 박관주(朴觀周)의 처이다. 지원의 아들은 우전(宇錪), 우첨(宇 ), 양자로 나간 우동(宇棟), 우기(宇基)이다. 필원의 아들은 우춘(宇春)이고, 딸은 김종섭(金宗燮)·조형신(趙衡臣)의 처이다. 효원의 양자 아들은 우동(宇棟)이고, 딸은 권종도(權宗度)·권극환(權克煥)의 처이다. 두원의 아들은 우항(宇杭)·우기(宇杞)이고, 딸은 손종수(孫宗壽)·임위(任緯)의 처이다. 박관주의 아들은 진옥(鎭玉)이고, 딸은 치주극(崔柱極)의 처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시대가 이미 수백 년이 되었는데 유문이 비로소 인쇄에 맡겨지고, 묘도에 또한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하여, 후손 우호(佑浩)가 나에게 묘갈명을 청하였다. 보잘것없는 후생이 어찌 감히 이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누차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여러 선배들의 정평을 근거로 하여 대략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명(銘)을 붙인다.
금수의 북쪽은 錦水之陽
갈암(葛庵) 선생이 교화를 떨친 곳이었네 葛翁振鐸
여채의 가정에서 나고 呂蔡家庭
운도의 지결을 이었네 雲陶旨訣
공은 가학을 따라 부지런히 힘썼으니 繄公趨趨
철저한 가르침을 특별하게 들었네 異聞摑血
때에 맞는 가르침이 먼저 미치니 雨化先及
처마 아래 물방울 떨어지듯 어긋나지 않았네 不差簷滴
사림의 중망이 돌아가니 士望攸屬
후일 의발(衣鉢)을 전할 수 있었네 他日傳鉢
어찌 더 살게 하지 않아 胡不假年
뜻과 일을 마치지 못하게 했던가 志業未卒
밀암(密庵) 선생이 깊이 애통하여 密爺深痛
유서가 끊어졌다 하였네 曰遺緖絶
누가 감히 이 말에 의심하랴 疇敢間於
백 대의 후에 질정할 만하네 百世可質
나는 들은 것을 기술하고 지어냄이 아니니 我述不作
이 말을 비석에 싣네 載辭于石
갈암(葛庵) 이선생(李先生) :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을 말한다.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菴),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1679년(숙종5)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지평에 발탁된 후 대사헌, 이조 판서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1694년(숙종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홍원(洪原)에 유배되고, 다시 종성(鍾城)에 위리안치(圍籬安置), 1697년(숙종23) 광양(光陽)에 이배(移配), 1704년(숙종30)에 풀려나와 10월에 세상을 마쳤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통하여 전해지는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영남학맥의 종주였다. 저서로는 《갈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금양(錦陽) :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를 말한다.
극재(克齋) 공 : 신익황(申益愰, 1672∼1722)을 말한다.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克齋),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극재집》, 《운곡도산휘음(雲谷陶山徽音)》이 있다.
강우(江右) : 영남 지방을 구분할 때 낙동강 줄기를 중심으로 왼쪽에 해당하는 북부 지역은 ‘강좌’, 오른쪽에 해당하는 남부 지역은 ‘강우’라고 한다.
밀암(密庵) 선생 : 이재(李栽, 1657∼1730)를 말한다.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밀암집》이 있다.
고재(顧齋) : 이만(李槾, 1669∼1734)의 호이다. 자는 군직(君直),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저서로는 《고재집》이 있다.
제산(霽山) :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의 호이다. 자는 진백(振伯),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735년(영조1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제산집》이 있다.
병곡(屛谷) : 권구(權榘, 1672∼1749)의 호이다. 자는 방숙(方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저서로는 《병곡집》이 있다.
눌은(訥隱) :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의 호이다. 자는 천상(天祥), 본관은 평원(平原)이다. 1699년(숙종25) 진사에 합격하였다. 후릉 참봉, 장릉 참봉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눌은집》이 있다.
강좌(江左) : 권만(權萬, 1688∼1749)의 호이다. 자는 일보(一甫),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725년(영조1)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4)에 이인좌(李麟佐, ?∼1728)의 난에 의병장이 되어 이를 진압한 공이 있다. 1746년(영조22) 문과 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병조 정랑, 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강좌집》이 있다.
여채(呂蔡) : 중국의 여씨(呂氏) 형제와 채씨(蔡氏) 부자를 말한다. 여씨 형제는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았던 대충(大忠), 대방(大防), 대균(大勻), 대림(大臨) 4형제를 말한다. 이들 형제는 남전에서 향약(鄕約)을 실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채씨 부자는 남송(南宋)의 학자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 1135∼1198)과 그 아들 구봉(九峯) 채침(蔡沈, 1167∼1230)을 말한다. 이들 부자는 모두 주자(朱子)를 스승으로 섬겼다.
운도(雲陶) : 운곡(雲谷)의 주자(朱子)와 도산(陶山)의 퇴계(退溪)를 아울러 말한다.
철저한……들었네 : 이 구절 원문의 ‘괵혈(摑血)’은 때려서 생긴 붉은 피멍이 든다는 뜻이다. 이는 원래 불교의 선사(禪師)들이 혹독하고 철저하게 지도함을 비유한 말인데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 재종부(諸宗部) 밀암화상어록(密菴和尙語錄)에 보이며 유사한 표현은 여러 선어록(禪語錄)에 나온다. 주자(朱子)의 독서법(讀書法)에 “모름지기 한 번 방망이로 내려침에 한 줄기 흔적이 생기고 한 번 손바닥으로 후려갈김에 한 손바닥의 핏자국이 생기는 것처럼 남의 글을 볼 때에도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만 할 것이니, 어찌 대충 보며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須是一棒一條痕, 一摑一掌血, 看人文字, 要當如此, 豈可忽略?]”라고 한 말이 있다. 《朱子語類 卷10 學4 讀書法上》
의발(衣鉢) : 스승의 법맥이나 학통을 말한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