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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9개월이란 시간 동안에 사람은, 고결히 철학을 명상하는 것에서부터 절박히 밥 한 그릇을 갈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중략)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한때 그의 발이 아르헨티나 땅을 밟고 있었던 시절을 떠나보냈다. 이 기록을 재구성하고 다듬어내고 있는 사람은 더이상 내가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나는 아니다. ‘우리의 아메리카’ 땅을 유랑함으로써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변했다. (중략) 이제 나는 내 자신과 함께 과거의 나를 떠나보낼 것이다.” -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즈-남미 여행에 관한 기록>(The Motorcycle Diaries-Notes On A Latin American Journey) 중에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1951년 12월,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알베르토 그라나도라는 두 청년이 무작정 짐을 꾸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가벼운 배낭여행을 떠나듯 그라나도는 흥겨운 노래마저 부른다. “잘 가라, 평생의 친구들아. 사랑하는 옛 동무들아.” 체 게바라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 장면에서 게바라의 내레이션이 들려주는(이것이 게바라의 내레이션이라는 것도 몇분이 지나야 깨닫는다) 여행의 세부 항목들, 특히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는 흘려듣기가 쉽다.
그것이 갑자기 미치도록 궁금해진다면 아마 중반부가 지나면서부터일 것이다. 혈기왕성하고 장난기가 서린 두 젊은이의 유쾌하고도 적당히 감동적인 여행기가 될 듯 길을 떠나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시종 덜컹거리며 제 속도를 내지 못하던 그들의 오토바이 ‘포데로사’처럼 아주 천천히, 시작과는 다른 결말을 향해 가는 로드무비다. 혁명을 가슴에 품기 전, ‘체’라고 불리기 전의 게바라가 어떠한 인간이었는지를 절친한 친구와의 여정을 통해 그려낸 이 영화는 <필름메이커>의 표현처럼 “이후 사정없이 뻗어나갈 대서사시에 대한 사적이고 친밀한 전사(前史)”다.
월터 살레스 감독이 “남미인들에게조차 가장 신성한 영역”이라고 표현한 인물의, 그것도 혁명이라는 드라마틱한 소재 대신 심심한 여행기의 영화화를 부추긴 이는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살레스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중앙역>의 시나리오를 발굴한 로버트 레드퍼드다.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는 세계”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애정을 쌓아왔던 레드퍼드는 남미인인 살레스도 확신하지 못한 이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았다.
“난 레드퍼드에게 이 영화가 스페인어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과 비전문배우들을 전문배우들과 함께 써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3년의 조사작업과 2년여의 시나리오 작업을 거친 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아무런 구체적 계획없이 시작된 두 청년의 여행처럼, 그 자체로 대담한 여행을 시작했다. 게바라와 그라나도의 일정을 고스란히 쫓아 두번의 로케이션 헌팅을 떠났던 월터 살레스 감독은 그들이 밟았던 길 위에서 50년 전 쓰여진 일지의 묘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남미의 현실을 마주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역사적인 영화가 아니다. 남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자 현재에 대한 이야기다.
”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과 브라질 시네마노보의 정신을 계승한 적자로서 자신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은 살레스 감독은 그제야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꼼꼼한 시대 묘사보다는 길 위에서 마주칠 즉흥적 사건들에 더 많은 기대를 품고, 시나리오의 순서대로 촬영을 시작했다.
1952년 1월31일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 아르헨티나
“사랑하는 어머니께. (중략) 우리 얼굴이 점점 숯덩이를 닮아가네요. 지나치는 집들마다 전부 정원이 있는 이곳에서 우린 음식과 잘 곳과 뭐든 준다는 것들은 다 찾아다니고 있어요. 그러다 결국, 페론주의자의 목장에 가게 됐는데, 내가 그 사람 후두부에 수포가 발전해서 생긴 종양을 진단해줬어요.”
게바라의 여행일지와 함께 그라나도의 여행일지 <체와 함께한 남미 여행기>(Con El Che Por Sudamerica)를 균형있게 참고한 살레스의 영화는, 이 장면에 게바라와 그라나도가 종양 진단을 두고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덧붙인다. 게바라가 가감없이 진단을 내린 것과 달리 그라나도는 행여나 주인의 기분을 망치면 숙식을 얻지 못하게 될까봐 그것이 낭종이라고 거짓말한다.
대비되는 두 사람의 성격이 불러오는 사소한 갈등과 시원스런 화해는 극 초반에 특히 자주 등장한다. 살레스는 이 영화가 두 젊은이의 살가운 우정으로 지속된 여정이라는 점도 놓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의 일기 속에 살아 있는 유머를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감독은 친밀한 친구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따뜻한 투닥거림을 너무 깊지 않으면서도 동떨어지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덕분에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인물 묘사에 있어서 보통의 전기영화들이 종종 보여주는 상투적인 과장을 슬기롭게 피해간다.
1952년 2월26일 로스 앙헬레스, 칠레
“조금 더 가서, 우리가 적당한 속도로 가파른 커브길에 들어섰을 때, 브레이크 나사가 빠져나갔다. 커브길을 돌자마자 소 머리가 하나 보이더니 곧 십수 마리의 소들이 나타났다. 핸드 브레이크를 급히 돌렸지만, 대강 붙어 있었던 모양인지 그마저 고장나버렸다. (중략) 첫 번째 가파른 언덕에서, 하고 많은 길 중에서도 하필 그곳에서, 포데로사는 마침내 자기 영혼을 포기해버렸다.”
친절한 독일인 정비사는 아르헨티나 청년들에게 포데로사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죽은 포데로사의 몸 위에 흰 천을 곱게 덮어 떠나보낸 그곳에서, 두 사람은 그들이 아르헨티나 출신임을 단번에 알아보는 밝고 예쁜 칠레인 자매를 만났다. “그걸 어떻게 아셨죠?” “말할 때마다 ‘체’를 붙이잖아요.” 이 만남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이 무렵 게바라의 일기에는 ‘리틀 체와 빅 체(알베르토와 나)’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
게바라가 이 애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더 훗날의 일이다. 게바라를 연기한 멕시코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칠레인 학생들이었던 이 비전문배우들이 ‘체’가 섞인 자신의 말버릇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아르헨티나식 스페인어를 훈련받았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연극배우 출신인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는 그라나도 역을 위해 코르도바 악센트를 배웠다. 오디션을 통해 그를 캐스팅한 살레스 감독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드 라 세르나의 팔촌뻘 되는 친척이다.
[2]
1952년 3월7일 발파라이소, 칠레
“깊은 불안함이 나를 엄습했다.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난 내 자신에 대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눈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지만, 쓸 수 없었다.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중략) 난 이 순간까지도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내가 아무런 존재도 아니란 걸 깨닫는 이 순간까지도. 내 맘을 다해 그녀를 다시 불러와야만 했다. 그녀를 다시 얻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그녀는 내 거야, 내 거야….”
게바라는,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치치나로부터 이별을 고함받았다. 영화는 이 순간을 아주 적막하게 표현한다. 게바라의 말 한마디나 몸짓 대신 감독은 그의 어깨 너머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옆얼굴을, 그의 등 너머로 그 등보다 넓은 바다를 가깝지만 먼 듯 비춘다. 이 대목과 관련해 <사이트 앤 사운드>는 “만약 게바라가 치치나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우문을 던졌다.
살레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게바라가 오늘날 울림을 주는 건 그의 모험이 결코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삶의 매 순간, 미지의 것을 밝히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었다. 16살에 그는 작은 엔진을 사서 자전거에 달고 아르헨티나 북부로 여행을 떠났다. 23살엔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유럽에 더 관심을 가질 때 남미로 여행을 했다. 체 게바라는, 시니컬함에 눈이 가려 사람들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가 가진 진정한 이상주의자다.”
1952년 4월2일 쿠스코, 페루
“쿠스코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환기’(喚起)다. (중략) 슬프게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무식한 정복자들의 손에 파괴당한 요새로부터, 거칠게 무너져내린 신전들로부터, 약탈당한 성들로부터, 야만족의 얼굴로부터 쿠스코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이 쿠스코다. 쿠스코는 당신이 전사가 되어, 잉카의 생명과 자유를 수호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본 적도 없는 문명 잉카에 대해 게바라가 한없는 노스탤지어와 긍지를 경험한 고대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떠나려는데, 키 작은 원주민 소년이 살레스 감독 일행에게 다가왔다. 잉카 유적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 좋아.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가도 괜찮지?” “아무 거나 들고 오세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게바라와 그라나도가 ‘세월을 아는 안내인’이라고 소개하는 돈 네스토는 그렇게 영화 속에 담겼다. 살레스 감독은 “우리가 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발견해준 것”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날, 살레스 일행은 퀘차어밖에 할 줄 모른다는 인디언 여자들도 우연히 만났다.
어쩌면 게바라와 그라나도가 50년 전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났던 이들의 후손일지 모를 그녀들이 베르날과 로드리고에게 말을 걸었다. 두 배우는 캐릭터에 몰입돼 즉흥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난 고정된 시나리오를 믿지 않는다. 특히 로드무비에 있어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늘 문을 열어두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 당신을 바꾸고 영화의 결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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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그라나도 인터뷰
“마치 내가 지금 막 그 오토바이에서 내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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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여든세살인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영화화되는 데 있어 결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여정에서 남은 이 한 사람은, 월터 살레스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호세 리베라가 4년 전 쿠바 아바나로 날아가 처음 만났을 때 살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놀라울 만큼 건강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한다.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그들의 여행이 왜 중요했는지, 그들의 미래에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살레스와 리베라에게 이해시켰다. 예전의 사람들과 예전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눈물이 난다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남미여행 동반자 알베르토 그라나도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당신과 게바라와의 여행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다소 놀랍다. 두 젊은이가 라틴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물론 에르네스토와 내가 우리의 신념에 따라 끊임없이 활동하고 살아왔다는 점은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우린 항상 우리가 해야 한다고 믿는 대로 행하고 살았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이 영화가 왜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결코 기대해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게바라와 함께 거쳐간 장소들을 되돌아보니 어떠한가.
(웃음) 기쁘다. 그리고 내 삶에 대해 감사한다. 삶이 나에게 내려준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한다.
이 영화에서 오토바이(영화에서는 게바라와 그라나도가 여행 당시 탄 것과 동일한 종류의 오토바이를 사용한다)를 보았을 때 어땠는지.
(웃음) 물론 감동받았다. 정말 사랑스러웠다. 우리가 오토바이와 이별하는 장면을 감독이 정말 잘 찍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지금 막 그 오토바이를 뒤로 하고 떠난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그 가여운 오토바이를 천으로 덮어 씌우고 떠날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영화를 보다가 두 장면에서 울었다. 하나는 오토바이와 이별할 때였고, 또 하나는 에르네스토가 아마존 강을 건널 때였다.
당신과 게바라의 여행이 이 영화 속 여행과 같거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리의 여행이 상징하는 것은 나와 체, 나와 쿠바혁명의 관계이다. 난 평생 그 여행을 기억했다. 비행기나 오토바이를 볼 때마다 그때가 떠오른다. 월터 살레스는 실제로 50년대에 내가 어땠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한 듯하다.
실제 여행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물론이다. 난 그 여행에서 많은 우연들을 경험했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장소들을 보면서 온갖 사소한 기억들과 내가 겪은 모험과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체 게바라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의 연설과 정치적 삶만 알 게 아니라 그의 배경도 알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떻게 자랐는지, 그의 여행이 어떠했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 모든 것들에 힘입어 나는 아직도 그 여행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많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산 파블로의 나환자들이 우리를 배웅해줄 때였다.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들은 보트를 타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는 곳으로 건너왔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환자들은 우리를 위해 음악을 연주했고, 작별의 인사를 건넸고,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보통 사람들처럼 대해줬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결코 그걸 잊을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린 너무 감동을 받아서 할말을 잃고 있었다. 조명이 나빠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는 게 유일한 후회다.
아직도 오토바이를 탈수 있나.
이제는 탈 수 없다. 일전에 가엘이 나를 오토바이에 태운 적이 있다. 같이 운전을 하긴 했지만 사실 내가 운전사는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타기에 여든 살은 너무 늙은 나이다. (웃음)
※이 인터뷰는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열린 기자회견 인터뷰와 해외 인터뷰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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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월8∼22일 산 파블로, 페루
“이런 숭고한 대의를 대변하기엔 하찮은 존재들이지만 나와 그라나도는, 특히 이번 여행을 통해, 불안정하고 가공된 남미대륙의 분열이 완벽하게 허구임을 다시 한번 강하게 믿게 됐습니다. 우리는 단일한 메스티소 민족으로 합쳐져야 합니다. 멕시코에서부터 마젤란 해협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분명히 인종적 유사성을 지닌 단일민족입니다. 이제 이 편협한 지역주의를 걷어내자는 뜻으로 페루와 하나된 라틴아메리카를 위해 건배를 올리고 싶습니다.”
게바라와 그라나도가 3주 동안 머무른 페루의 나환자촌은, 손으로 만져서는 절대 옮지 않는 나병에 걸린 남미 각지의 사람들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고립된 공간이었다. 로케이션 헌팅차 그곳을 방문한 살레스 일행은 한때 그곳에서 지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에 대한 영화를 찍을 거라면 우리가 직접 출연하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접수했다. 나환자촌 거주자 100여명 가운데 90여명이 현지인으로 구성됐다. 리얼리즘의 포획을 위해 비전문배우들과의 작업을 환영하면서도, 살레스는 그들을 전문배우들과 조화시키는 일에 늘 그렇듯 어려움을 겪었다.
“이럴 땐 우리끼리 공유되는 무언가가 먼저 있어야만 한다. 우린 나환자촌에 도착해 바로 촬영에 들어가지 않고, 즉석 음악공연과 축구를 먼저 했다.” 현재의 남미대륙에다 어떤 시대적 분위기도 가공해 넣지 않은 살레스의 공간 안에서 백인에 가까운 두 배우들이 살갗 짙은 남미인들과 어울리는 모습. 역시 백인에 가까웠다는 게바라와 그라나도를 베낀 이 나환자촌의 이미지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이루는 다른 어떤 모사들보다도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진실과 가장 가까운 힘을 발휘한다.
6월14일, 게바라의 생일. 월터 살레스는 내내 아껴두었던 극적 순간을 이 부분에 할애한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정상인들(의사들, 간호사들, 수녀들) 앞에서 게바라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곧 당당한 눈빛으로 자신이 꿈꾸는 남미대륙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카메라는 살레스 자신이 게바라 혹은 게바라를 연기한 베르날에게 깊이 감동받은 시선 그대로 움직인다. 연설을 끝낸 뒤 게바라는 아마존 강에 뛰어들었다.
게바라는 그 강이, 이 고립된 공간 안에서 또다시 나환자들과 정상인을 가르는 이중 차별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는 천식으로 가쁘게 넘어가는 숨을 챙기며 나환자들이 있는 강 건너 땅으로 헤엄쳐갔다. 마지막 촬영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사흘 만에 완성됐고, 마침내 “컷” 사인을 받은 베르날이 육지로 채 나오기도 전에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촬영팀이 한 사람씩 차례로, 약속이나 한 듯 아마존 강에 몸을 던졌다. 살레스는 말했다. “이 작은 여행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대륙, 하나의 민족’이라는 게바라의 생각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우린 모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은 아르헨티나에서, 일부는 페루나 칠레 그리고 브라질에서 왔다. 우린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고 늘 합의에 도달한 것도 아니었다. 여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게바라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고, 우리 사이에 놓인 국경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허물기 쉬운 것임을 깨달았다. 이 영화를 찍기 전까지 나는 브라질 감독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감독이다.”
“이것은 놀라운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냉소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다. 이것은 서로 닮은 희망과 꿈을 가진 두개의 삶이 같은 방향으로 달려갔던 한때를 어렴풋이 엿본 것이다.” -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즈-남미 여행에 관한 기록>(The Motorcycle Diaries-Notes On A Latin American Journey) 중에서
영화 중반쯤부터 애타게 궁금해졌던 두 젊은이의 애초 여행 목적은, 그들이 책으로만 알고 있었던 미지의 대륙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배낭여행에 다름 아닌 목표였다. 그들은 최종 목적지가 될 베네수엘라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맥주와 와인을 즐길 꿈을 꿨었다.
게바라는 그라나도에게, “여행이 지겨워지면 이 호수에 돌아와 병원을 세우고 여기 오가는 모든 사람들을 치료해주자”고,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 사이를 지나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9개월의 긴 여정이 끝났을 때 그들은 베네수엘라에서 샴페인을 터뜨리지도 않았고, 호숫가에 병원을 차리지도 않았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총 없는 혁명? 절대 성공 못해”라고 말했던 한 청년이 7년 뒤 쿠바혁명을 성공시키게 된 먼 근원을, “진정한 혁명은 사랑이라는 커다란 감정으로부터 이끌어진다”고 했던 그의 말의 뜻을, 그 자신이 진정한 혁명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까닭을, <필름메이커>의 말대로 “논쟁이나 당파적인 대화나 유머 빠진 역사적 재현을 통하지 않고도” 이해시킨다. 그런 점들을 우리보다 먼저 깨닫고 영화를 만든 월터 살레스 감독은 “하나의 대륙, 하나의 민족”이라는 게바라의 말이 바로 이 순간 남미와 남미인들에게까지 유효한 믿음이라고, 현재인지 과거인지가 불분명한 시제를 통해 말한다. 자신의 사적 신념이 되어버린 꿈을 주장함에도 살레스의 태도는 강압적이지 않다.
오직 여행 안에서 인간의 변화를 끌어내오느라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순진해지긴 했지만,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지금도 이상에 목말라 있는 이들에게나 그것이 굳이 필요치 않은 부유한 행인들에게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깊은 우물로 받아들여질 여행임에 분명하다.
박혜명 tuna@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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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살레스 감독 현지 인터뷰
“이 영화는 마치 재즈처럼 각본을 바탕으로 즉흥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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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대로, 월터 살레스 감독은 온몸에 선한 인상을 풍기며 토론토 파크하야트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섰다. 시종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밝은 태도를 천성으로 타고났는지, 작고 갸름한 얼굴에 보기 좋게 잡힌 주름 자리가 아주 오래돼 보였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나는 브라질(Brasil)이란 단어에 결코 s 대신 z를 쓰고 싶지 않다”고 단호히 말했던 살레스는, 기본적으로 모든 질문에 성실히 응하면서도, 영화 자체보다는 남미 문화에 관련된 질문에 더 많은 열성을 보인 남미 감독이었다.
영화는 어느 정도 원작에 충실했으며, 어떤 부분에서 극적인 변형을 가했는가.
우선 각본은 세 가지 원작에 충실하게 쓰여졌다.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쓴 <나의 첫 대 여행>(Mi Primer Gran Viaje)과 <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즈-남미여행에 관한 기록>, 알베르토 그라나도의 여행일지인 <체와 함께한 남미여행> 등이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책은 정말 다르다. 에르네스토의 책은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쓰여졌기 때문에 더 다듬어져 있고, 젊은 이상주의자로서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남미대륙을 실제로 발견해가는 과정에 변하는 자신을 보여준다. 반면 알베르토의 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쓰여진 것이다. 훨씬 생동감이 있고 당시에 일어났던 일을 훨씬 섬세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토가 아마존 강을 건너는 대목에 대해 에르네스토 자신은 한 단락으로 쓰고 있지만 알베르토는 아주 길게 그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 가미된 극적인 설정들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알아차리기 어렵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 세권의 책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과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는 부분적으로 이 영화가 즉흥 연출로 만들어질 거라는 점을 알고 있었나.
몰랐다.
왜 말해주지 않았나.
기대하게 만들려고 그랬다. (웃음) 일단 그들은 준비가 잘돼 있었다. 시나리오 리허설뿐 아니라 영화에 필요한 남미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준비를 거쳤다. 50년대의 아르헨티나 역사와 영화, 히트곡들에 대해, 50년대의 칠레와 페루에 대해, 그리고 잉카 제국에 대해 미리 세미나도 거쳤다. 자신들의 캐릭터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륙에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들은 상황에 더 잘 맞춰갔다. 그렇게 길을 따라 즉흥성을 발휘하려면 기본적으로 각본이 아주 좋아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각본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탄탄해야 그것을 바탕으로 영화를 확대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재즈와 비슷하다. 재즈는 기본적으로 핵심이 되는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의 주위를 돌면서 얼마든지 변형을 가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마지막엔 항상 핵심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각본과 영화의 즉흥성과의 관계다.
영화는 두 사람이 무작정 짐을 싸서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주인공들에 대해 사전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보통 전기를 다룰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그런 식의 의도를 담고 있지 않다. 단순히 한 인물의 어떤 과거를 제시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를 이해시키려는 게 목적이다. 인물에 대한 설명은 주어진 디테일을 갖고 알아가야 하는 게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토가 사는 집이나 그의 부모님이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면 에르네스토가 그럴듯한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그런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고 싶어하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방식이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나에겐 흥미롭다.
음악이 정말 아름답다.
아르헨티나 영화음악가 구스타보 산토라차가 만들었다. 그는 지난 몇년 동안 직접 남미를 두루 다니면서 음악을 조사하고 수집, 보관해온 사람이다. 그는 남미 악기의 거의 대부분을 연주할 줄 안다. 이 영화음악에 쓰인 악기도 80%는 그가 직접 연주한 것이다. 다 비슷하게 들려도 남미 음악은 국경 하나만 넘으면 악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영화음악도 여정을 따라 악기를 달리한다. 산토라차는 정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다.
로버트 레드퍼드가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고 알고 있다. 게바라의 일생 중에서도 하필 이 여행기를 그가 제안한 건가.
우선 레드퍼드는 굉장히 정치적인 사람이다. 남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선댄스 인스티튜트를 통해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쿠바 등 남미 국가들에 관한 세미나도 열었을 만큼 몇년간 그 분야에 깊이 관여해왔다. 레드퍼드는 남미대륙에 관해 우리 남미인들만큼 열정을 갖고 있다. 그는 이 다이어리가 영화화될 거라고 생각한 동시에 영화화돼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 영화가 남미 스페인어와 남미 출신 배우들로 만들어진다는 점에도 처음부터 동의했다. 이 영화를 할리우드 배우들이 찍는다고 상상해보라. (웃음) 우린 모두 낙담했을 거다.
첫댓글 체 게바라 의 젊은날을 영화화 한것입니다.. 저번에 하리님의 체게바라 평전에대한 글좀올려달라고 했는데 이걸로 대신할게요 ㅋㅋ
이 글은 시간 내서 읽어야겠네요. 고마워요. 팔 아프겠네...우쪄! 괜한 부탁해서...이 참에 우리도 공부 좀 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