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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딸과 함께 읽는 소설 여행 12
3. 그 가을의 내력
이 청 준
석구는 금옥이네 누렁이를 죽자사자 미워했다. 금옥이네 누렁이란 놈은 생김샌 미련스런 듯하면서도 몸집이 작은 송아지만큼이나 한 거구(巨軀)였다. 동네 개들은 그 누렁이의 무지스런 몸집 앞에 감히 오금을 잘 펴지 못했다. 누렁이의 그림자만 스쳐도 모두들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착 사려 붙이고는 흘끔흘끔 뺑소니를 쳐 버렸다.
요령 없이 골목을 지나치다 누렁이놈에게 길목이라도 막히게 되면 놈들은 지레 겁을 먹고 조그맣게 담벼락 밑으로 주저앉으며 오줌을 질질 싸갈겼다. 누렁이놈이 골목을 스쳐 지나가 버릴 때까지 죽는 시늉을 하며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놈도 있었다. 암캐 수캐 할 것이 없이 누렁이놈 앞에선 동네 개들이 모두 다 그 모양이었다. 누렁이 앞에선 모두가 한낱 하잘 것 없는 강아지 꼴을 해 보였다. 누렁이놈은 이를테면 모든 동네 수캐들의 형님이었고, 모든 동네 암캐들의 주인격이었다. 거동(擧動)도 제법 그런 식이었다. 아무리 녀석들이 놈의 앞에서 겁을 먹고 죽는 시늉들을 해 보여도 실상 누렁이 자신이 녀석들을 직접 위협하거나 윽박지르고 덤비는 일은 별로 없었다. 느릿느릿 위엄을 떨며, 오줌을 싸갈기든 배를 땅에 대고 죽는 시늉을 하든 그따위 조무래기 놈들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떡 벌어진 가슴패기의 살을 출렁거리며 골목길을 지나가 버리곤 했다. 지나치게 낑낑거리는 놈이 있으면 우람한 턱주가리 속에서 우르릉 흰 이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나마 듣기 싫은 소리를 제압(制壓)해 버리거나, 암캐들의 경우엔 엉덩이께로 돌아가 킁킁 암내를 맡아 보는 시늉을 하고 돌아서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다만 녀석은 동네 개들이 노골적으로 자기를 기피하려는 기색에는 비위가 뒤틀리는 듯, 뻔히 보는 데서 죽자사자 도망질을 치는 놈이 있으면 이놈만은 기어코 뒤를 쫓아가서 결국은 놈의 다리에 쥐가 나 다른 놈들처럼 그 앞에서 생오줌을 벌벌 싸며 무릎걸음을 기게 해 놓곤 했다. 그러나 그도 그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놈은 또 금세 자기의 꼴이 싱거워지고 마는 듯 할 일 없이 놈에게서 몸을 돌이켜 가지고는 어정어정 제 갈 길을 걸어가 버리곤 했다. 똥개치곤 제법 힘이 있고 의젓하고 패자(覇者)다운 놈이었다.
한데 석구는 한사코 그 금옥이네 누렁이가 때려죽이고 싶도록 밉기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금옥이네 집이 하필이면 석구네 골목, 석구네까지 합하여 모두 네 가구가 살고 있는 골목의 맨 어귀를 지키고 있는 자리여서 그는 보기 싫은 누렁이놈이 거드름을 피우며 지키고 앉아 있는 금옥이네 사립 앞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지나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
석구는 그게 더욱 못마땅하고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한때는 석구네도 복슬이라는 예쁘장한 암캐 한 마리를 기른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누렁이 녀석은 첩집 드나드는 기둥서방처럼 석구네를 무상출입하며 복슬이의 주인 노릇을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석구가 꼴이 사나와 십리 밖 외가댁으로 녀석을 보내 버리고 말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녀석에 대한 석구의 까닭 모를 원한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복슬이를 외가댁으로 보내 버리고 나서 석구는 기어코 다시 종자 좋은 수캉아지 한 마리를 면소 저자거리에서 사들여 왔다.
―젠장맞을, 그래 동네 안에선 누렁이놈의 목덜밀 뜯어 발겨 줄 개새끼가 한 마리도 없단 말인가
―좋아. 그놈의 콧대를 내가 꺾어 주지, 그 늙은 넝마구리의 목덜미를 물어 꺾어 놓을 놈을 내가 길러내겠단 말야.
그는 스스로 놈에게 필적할 만한 개를 한 마리 길러 내기로 작정했다. 몇 차례나 장터를 쫓아다니면서 고르고 고른 끝에 그중 종자가 좋다는 수캉아지 한 마리를 들여온 것이었다. 그리고는 동네방네 소문을 내어 기어코 몇 달 안에 그 누렁이놈의 오만(傲慢)한 기세를 꺾어 놓겠다고 장담을 하고 돌아다녔다.
알고 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누렁이가 어떻게 위엄을 떨고 다니든, 동네 개들이 어떻게 놈에게 사죽을 못 쓰든 석구로선 그게 그렇게 화가 나서 속을 상해 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틈만 나면 석구가 그렇게 누렁이를 못 잡아먹어 하는 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석구의 어머니 서씨는 젊어서 과부가 된 덕분에 외아들인 석구를 굶어죽이지 않으려고 죽자사자 평생 일만 해 온 여인이었다. 그러다가 이젠 석구가 제법 청년티가 날 만큼 자라났고, 게다가 체구가 여느 청년들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건장해서 적이 마음이 흐뭇해 있는 판이었다. 안심하고 노후를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그 석구가 요즘 와선 갑자기 살림에 정신이 없고 엉뚱한 짓에다 넋을 뺏기고 있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금옥이네 누렁이 험담을 일삼고 있었고, 나중에는 강아지를 사들인다 어쩐다 하면서 장차에나 있을 개쌈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녀로서는 그러는 아들의 心中을 알 길이 없었다.
"어머니, 두구만 보세요, 내 요놈이 자라기만 하면 금옥이네 누렁이놈을 그냥… 흐흐흐."
미리부터 좋아하는 석구의 머리가 이상해지지나 않았나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석구의 심산을 끝끝내 이해할 수 없는 그녀로서는,
"단 두 식구 사는 집안 살림에는 힘 안 쓰고 넌 무슨 짓거리에 그리 정신이 대단하냐. 사람 실없이 보이게."
하고 마뜩찮게 꾸짖고나 말 처지였다.
그럴 때마다 석구는 석구대로 또,
"어머닌 몰라요. 내 속을… 흐흐흐."
하고는 다시 한 차례 실없는 웃음을 혼자 웃어젖히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석구로서도 물론 스스로 납득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누렁이와 자기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금옥이네 누렁이놈이 거드름을 피우기로서니 그걸 그토록 애가 타서 못 봐 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거기까지 따져 나가면 석구도 스스로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한탄 개짐승에 불과한 누렁이놈을 그토록 석구가 미워하는 이유가 전혀 없을 수도 없었다. 곰곰이 따져 보면 그나름의 까닭이 있었다. 터놓고 외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누렁이놈의 주인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그 누렁이놈이 금옥이네의 곁식구였기 때문이었다. 금옥이네가 누렁이를 기르고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금옥이네는 석구네를 포함한 골목안 네 가구와 함께 풀도 뽑고 길도 닦아야 하는, 이를테면 한 골목의 이웃이었다. 그것도 금옥이네가 골목 안에선 첫번째 집이었다. 골목안 첫번째 삼 간 초가집에서 계집애뿐인 세 동생과 함께 성미 괄괄하기로 동네 안에 이름이 난 천 영감을 모시면 살아가고 있었다. 아들이 없는 천 영감은 늙고 쇠약했으므로 집안 살림은 맏딸은 금옥이 도맡아 꾸려 나가고 있었다. 한데 그 금옥이 여간 억척이 아니었다.
감자순을 내거나 김매기 같은 아낙네들이 밭농사 일은 물론 남정들의 일거리도 금옥은 사양하는 일이 없었다. 잔손일은 모두 손아래 것들에게 맡겨 버리고 금옥은 오히려 남정들의 거친 일을 도맡아 했다. 사내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지지 않고 해냈다. 산을 타며 푸나무를 끌어내리고 논밭으론 거침없이 거름짐을 이어 날랐다. 가을이 되어 추수가 급해지면 그녀는 정말로 사내아이처럼 지게를 지고 나서서 등짐을 져 나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여섯 마지기 밭농사와 재너마 반달골에 있는 산골논 서 마지기 무농사를 거의 남의 손을 빌지 않고도 혼자 척척 마무려 나갔다. 뿐만이 아니었다. 금옥은 그러는 가운데도 또 틈틈이 손을 내어 닭도 치고 염소와 돼지를 기르고 하여 큰 밑천 들이지 않고 손정성 발정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에서나 푼돈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모두 겹치기 일이었다. 거름짐을 이어내면선 염소를 끌고 있었고, 김을 매고 돌아오는 길엔 돼지 먹일 꼴을 베어 이고 있었다. 시시한 사내 두세 몫은 되고도 남았다. 석구네 골목 안에선 그 금옥이 기세에 눌려 오히려 사내들이 기를 못 펴는 판국이었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석구가 그 금옥의 치맛바람에 씌어 몸집은 크면서도 그늘에 자란 시금치처럼 힘을 못 타고 비슬대는 꼴이 아니냐고 농담을 해 오는 편이었다.
비위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석구는 그 금옥의 극성이 이만저만 꼴보기 싫은 게 아니었다. 언제고 한번 금옥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줘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어서 속만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중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동네를 휘어잡고 있는 누렁이놈이 또 그 금옥이네 곁식구였다. 누렁이는 항상 금옥이네를 뒤따르며 집을 지키기도 했고 내어도 맨 염소 곁에서 가축을 지키기도 하면서 완연히 금옥이네의 한 식구 몫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놈에 대한 석구의 심사가 사나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의 거드름이 한층 더 얄미웠다. 그는 금옥이 대신 하다못해 이놈이라도 좀 콧대를 분질러 줘야겠다고 단단히 작정을 하고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금옥은 석구가 뭘 생각하고 있든 그런 건 조금도 상관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석구쯤 아예 싹 무시를 해버리는 태도였다. 원래부터도 그녀는 석구에게 그런 식이었다. 석구가 누렁이에 대해서 어떤 욕지거리를 하고 다니든 그건 모다 다 석구 자신이 칠칠치 못한 사내인 탓으로 돌려 버렸다.
"오죽 한심한 인간이 그래 개짐승 따위하고 아옹다옹 시샘질일꾸."
하는 식으로 석구를 도통 시덥잖은 사내로 여겨 버리거나 아니면,
"흥, 우리 누렁이가 몹시도 탐이 나는가부지. 아니람 사내대장부가 우리 누렁일 그리 무서워해서 그럴까?"
얄밉도록 당당해져서 봐란 듯이 누렁이놈을 더욱더 알뜰살뜰 건사해 줬다. 석구가 참다못해 베스 녀석(그는 나중에 놈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 불렀다) 을 사들여 왔을 때도 그녀는,
"그놈을 길러서 우리 누렁일 이기겠다구? 내 참 웃기는 일도 많으셔, 어디 한번 해 볼 테면 해 보시라지."
하고 가볍게 코방귀를 뀌고 마는 그녀였다.
석구는 더욱더 화가 치밀이 올랐다. 그는 있는 정성을 다해 베스놈을 돌보았다. 어머니 서씨가 뭐라고 간섭을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베스놈에게만 정력을 쏟았다. 끼니마다 양껏 밥을 먹이고 틈만 나면 싸움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많이 먹고 얼른 자라서 그놈의 금옥이네 누렁이놈의 볼따구를 콱 물어뜯어 다구 응? 문제없어. 문제 없을 거야 베스. 이젠 금옥이년네 그놈도 어지간히 늙어 빠져서 가슴패기 힘이 많이 줄었을 테거든."
금옥일 한껏 듣기 싫은 소리로 옥금이 금옥이하면서 기대에 차 있었다. 싸움 연습을 시킬 땐 금옥이네 사립께를 슬그머니 피해 나가서 아무 놈이나 동네 개만 만나면 마구 기세를 돋아 줬다.
"물어라 베스. 쉭쉭. 물어라, 물어 물어."
그러면서 그는 하루하루 몸집이 불어 가는 베스놈을 보고 대견스러워 죽겠다는 듯 아무 곳에서나 장담을 해대곤 하는 것이었다.
"이제 서너 달만 있어 보라구, 이 베스놈이 동네 개 들의 새 형님이 되실 테니까. 금옥이네 누렁이? 그까짓 거 뭐… 그야 물론 녀석부터 물어 뉘어야지. 그 저 놈의 목덜미하구 다리몽댕일 꺾어서… 문제 없어. 문제 없다니까."
그런 석구를 보고도 금옥인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하하… 내 참. 글쎄 우리 누렁이가 니네 베스한테 터럭하나라도 상하고 돌아오는 날이 생기면 난 그날로 누렁이에겐 내 손으로 밥을 주지 않을 참이라니까."
남자처럼 깔깔깔 웃어대면서 마구 무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금옥은 행여라도 정말 누렁이가 석구네 베스에게 기를 꺾이는 날이 생기면 그날로 당장 누렁이를 집에서 내쫓아 버리든지 밥을 굶겨 죽이든지 하고 말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석구에게 벌써 몇 번째나 다짐을 준 말이었다. 석구는 더욱더 기가 났다.
"좋다. 그럼 누렁이놈이 베스에게 다리몽댕이가 분질러져서 니네 집에서 내쫓기는 꼴을 좀 보자. 내 기어코 그렇게 만들어 놓고 말겠다."
"애써 보시더라구!"
그만큼 자신이 만만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석구에 대한 그녀의 멸시의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석구는 그런 식으로 금옥의 멸시를 당하고 나서도 그 당장 어떻게 분풀이를 해줄 수는 물론 없었다. 금옥은 원래 그런 계집아이였다. 석구로선 그런 금옥을 어떻게도 해 볼 수 없는, 원래부터가 그런 사이로 자라 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이였다.
그것은 국민학교 때부터도 그랬다. 금옥은 십리 밖 국민학교를 입학해 다닐 때부터도 놀이를 하면 같은 계집아이들보다는 사내아이들하고 더 잘 어울렸다. 사내 아이들과 어울려서 산길을 다녔고, 잔디밭에선 말타기나 공차기 같은 것을 사내아이들과 함께 했다. 숨바꼭질이나 소꿉장난 같은 계집아이들의 놀이는 아예 즐겨하지도 않는 편이었이지만, 어쩌다가 소꿉장난을 하게 될 때라도 보면 그녀는 꼭 사내 행세만 도맡아 했다. 사내애들과 어울려 싸움질도 곧잘 했고, 놀이에서는 사내아이들을 제쳐 놓고 제가 꼭 오야붕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가 하면 학교 공부도 남 뒤는 서지 않았다. 사내 계집아이 할 것 없이 통통 털어 한 반밖에 되지 않는 그녀의 학년에서는 금옥이 열째 안이었다. 그래서 금옥은 계집아이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게 되어 있는 학급의 부반장까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석구는 그때부터 금옥의 학년이었다. 기가 죽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밸이 틀려 죽을 지경이었다. 한번쯤 금옥을 혼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원체가 섣불리 나설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직접 금옥을 상대하지 않고 년을 곯려 줄 계략을 생각해 낸 일이 있었다. 금옥에겐 그보다도 더 어렸을 때부터 동네 아에 한 가지 희미한 소문이 나 있었다. 이웃집 사내아이하고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내아이는 엄마 노릇을 하고 금옥이 오히려 아빠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꿉장난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쯤 해서는 어디서 보고 배운 장난인지 금옥이 그 사내아이의 배를 까고 올라앉아서 키득키득 녀석의 배꼽을 간지럽히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동네에선 어린것이라도 무안을 줄까봐 면대(面對)해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일이었다. 석구는 학교 애들에게다 슬그머니 그 소문을 퍼뜨려 놓았다. 금옥이 난처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금옥은 아이들의 놀림을 받게 되자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는 마구 울음까지 터뜨려 버렸다. 석구는 더없이 고소했다. 한데 그 다음이 이상했다. 이날 오후 기분이 고소해 가지고 석구가 동네 아이들과 산길을 걸어오자 시간이 끝나기 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던 금옥이 뜻밖에 바위 뒤에 숨어서 불쑥 그들 앞으로 나타났다. 그러고선 두말없이 석구에게도 달겨들어 그를 낚아채며 덤벼들었다. 예기치도 않은 싸움이 벌어졌다. 울고 패고 하면서 둘이 서로 한 덩이가 되어 흙바닥을 딩구는 개싸움이었다. 간신히 싸움이 끝나고 보니 엉망이 된 것은 석구쪽이었다. 그는 미련스럽게 금옥을 두들겨 패는 데만 정신이 없었으나 금옥은 그렇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푸릇푸릇 얼굴에 멍이 든 것은 둘째치고 옷이 두 군데나 찢겨 나갔는가 하면 볼때기에는 뻘겋게 금옥의 손톱자국까지 그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 싸움에서 석구는 혼자 코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창피한 일이었다. 석구는 금옥을 곯려 주려다가 되려 자기 쪽에서 더 큰 봉변을 당한 꼴이었다.
이후부터 그는 아예 금옥은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때의 싸움 이야기를 다시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
한데 금옥은 달랐다. 석구의 소문 때문에 망신을 당한 일을 금방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전날처럼 사내스런 성미와 거동이 어느덧 깡그리 되살아나 있었다.
석구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싸움 이야기 같은 건 다시 하지 않았다. 금옥은 그처럼 당당하고 여유가 만만해져 있었다. 석구가 그녀를 은근히 기피하는 것과는 반대로 금옥은 석구를 그렇게 기피하는 기미도 없었다.
그녀는 아예 석구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는 태도였다. 금옥과 석구는 줄곧 그런 식으로 국민학교 6년을 보냈고 석구는 아직까지도 그 꺼림칙한 기억을 가슴속에 남긴 채 금옥과는 반갑잖은 한 골목 이웃이 되어 지내고 있는 터였다.
―금옥이년 고게 아직도 날 우습게 아는 모양이지? 두고만 봐라.
설마 국민학교 때하곤 똑같을 리야 없겠지만, 그래서 석구는 금옥이네 누렁이에게 너무 자신만만해져서 사람마저 멸시하고 드는 듯한 눈치가 보이면 그런 억지 비슷한 생각을 다 먹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좋아, 어쨌든 문제는 우선 그놈의 누렁이지. 내 기어코 그놈이 집을 쫓겨나거나 밥을 굶고 말라죽는 꼴을 보고 말테니까!"
석구의 일념은 결국 자기의 베스가 그 누렁이놈과의 일전에서 마지막 개가(凱歌)를 올리는 일로 집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베스가 제법 수캐 티를 풍길 만큼 자라났다. 자라고 보니 셰퍼드나 진도개만큼 좋은 씨는 못 되었지만 그런대로 체구도 늘씬하고 앞가슴이 다부지게 쩍 벌어진 것이 웬만큼은 석구의 심중을 흡족하게 했다. 터럭도 제법이었다. 짧고 고른 연노랑 위에 검정색을 살짝 끼얹은 듯한 깔끔한 단장이었다. 석구는 점점 더 열을 올리며 베스를 데리고 동네방네 개싸움 원정을 돌아다녔다. 어느새 놈은 마을 안에서 또 하나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싸움마다 상대편을 무난히 처치해냈다. 베스놈은 특히 다리 힘이 좋았다.
싸움중에 뒤로 밀어거나 아래로 깔리는 일이 없었다. 항상 상대편의 머리통을 두 발로 껴안듯이 끌어들여 닦달하였고, 뒷발로는 다부지게 놈을 밀어붙이며 마지막 버틸 힘을 뽑아 놓곤 했다. 석구는 만족이었다.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신중을 기했다. 누렁이놈과의 마지막 일전은 아직도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는 조심조심 시기를 엿보며 베스놈을 좀더 단련시켜 나갔다. 들판에서나 골목에서나 닥치는 대로 동네개들을 윽박질렀다. 금옥은 여전히 의연하기만 했다.
"흐응, 종자가 좋다더니 알고 보니 어디서 순 똥개 새끼를 줘 가지고 와서... 그래 그까짓 똥개나부랑일 가지고 우리 누렁일 해 보겠다구야?"
그녀는 누렁이놈이 무슨 귀중한 보물단지나 되는 양, 또는 여자들만 득실거리는 집안 꼴이라 그게 무슨 듬직한 보호자라도 되는 양 들에서나 집에서나 여봐란 듯이 늘 놈을 곁에 달고 다녔다.
그녀는 아직도 석구네 베스가 동네를 반 이상이나 휘어잡고 있는 것도 잘 곧이를 듣지 않는 판이었다.
"오냐, 그래 기다려만 봐라. 베스놈이 만셀 부르고 넌 누렁이놈을 내쫓는 날이 오구 말테니까."
석구가 독을 품으며 지껄여도 그녀는 그저,
"아, 글쎄 그렇게만 해 보시라니까. 내야 누렁일 내쫓거나 굶겨 죽이거나 그런 변이 생기는 날엔 하여튼 누렁이하곤 한집에서 살질 않을 테니까."
하고 점점 더 여유가 만만해지는 것이었다.
"한집에서 살질 않겠다구 했것다? 정녕 잊지 말구 잘 기억하구 있거라. 어떻게 되나 보자."
"내 걱정 말구 그 틈에 베스 쌈 연습이라도 한번쯤 더 시키러 가보시지."
그 무렵 어떤 날이었다.
하루는 베스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베스놈 하나에 걸려 있던 석구의 간절한 소망이 하룻 사이에 물거품처럼 스러져 가고 만 석구로서는 참으로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베스가 석구도 없이 혼자 골목을 나서다가 누렁이놈이게 무참한 곤욕을 당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골목 안에 발정한 암캐 한 마리가 스며들었다고 했다. 베스가 먼저 그 암캐의 꽁무니를 따라 붙었다. 한데 어디서 냄새를 맡고 달려 나왔는지 그 한 쌍의 수줍은 개새끼들 뒤에서 금옥이네 누렁이놈이 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베스놈도 이젠 여느 수캐들하고는 달랐다. 냉큼 꽁무니를 뺄 기미가 아니었다. 누렁이를 향해 똑같이 이를 드러내며 나섰다. 사정은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석구의 극성을 아는 이웃집 조무래기들이 일부러 베스를 따라와 석구에게 일러바쳐 준 자초지종이었다.
결과는 베스 쪽에서 턱주가리를 물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다리 하나를 더 절룩거리게 된 꼴이었다. 석구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했다. 분하고 안타까왔다. 그는 짚더미 아래 기가 죽어 엎드린 채 힐끔힐끔 털을 핥고 있는 베스를 노려보다 말고 무작정 골목을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골목을 나서다 보니 거기에는 과연 애들이 일러바친 암캐 한 마리와 누렁이가 있었다. 놈들은 어느 틈에 성사가 되었는지 그 사이 벌써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버젓하게 엉덩이를 맞댄 채 길쭉하게 골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누렁이놈은 베스와의 싸움으로 후줄근하게 털이 젖어 있었으나 석구를 보고도 못 본 척 오히려 느긋한 표정으로 두 눈만 이따금 한번씩 꿈벅대고 있었다. 그 꼴을 보자 석구는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양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허청허청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고는 누렁이에게 못하고 돌아온 화풀이를 아직도 짚더미 아래서 털을 핥고 있는 베스놈에게 퍼부어댔다.
그는 베스놈을 발로 한 차례 보기 좋게 질러 버렸다. 뒤어이 겁을 먹고 달아나는 베스놈을 향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집어 팔매질을 퍼부었다.
"나가 뒈져! 못난 새끼. 나가 뒈져, 뒈져 버렷!"
허무했다. 몇 달씩이나 별러 온 기대가 참으로 어이없게 무너져 나가고 만 꼴이었다. 그보다도 석구가 더욱 못 견딜 것은 그 당장 동네 안에 소문이 좍 퍼져나갈 일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날로 당장 소문은 동네를 빙 돌아 버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누렁이와 베스의 싱거운 일전에 관한 말이었다.
어떤 사람은 석구를 제법 위로해 주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개싸움 따위에 터무니없이 열을 내고 돌아다니는 석구를 못 봐 하던 참에 은근히 고소해 하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석구는 어쨌든 그 모든 소리가 자기에 대한 멸시와 비양거림으로만 들렸다. 어머니 서씨마저
"넌 무슨 개짐승 넋을 타고나서 그러냐? 제발 이제 그만 실없는 짓일랑 그만둬라. 원, 기껏 장담을 하고 나선 망신이나 당하고 나서구..."
하고 참고 있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버리고 있었다. 하나 석구로선 무엇보다도 금옥이 문제였다. 금옥이 더욱 콧대가 높아져서 그를 비웃는 소리였다.
"하하하, 참 고소하다. 이젠 우리 누렁이 쫓아내지 않고 한집에서 살아도 되겠지? 쫓아내긴... 외려 전보다 더 밥도 많이 주고 집도 따뜻하게 살펴 줘야 마땅한 이치지. 그치 응? 용용, 참말로 용용이다. 하하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자는 말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고스란히 그녀의 수모를 감수했다.
하지만 석구에겐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3일 수모를 견디고 나니 그는 새삼스럽게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는 덮어놓고 화만 난 게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단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작정했다. 베스놈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증도 어지간히 가시고 있었다. 그는 베스놈을 끌어냈다. 며칠을 지나고 나니 베스놈도 벌써 상처가 대략 다 아물어 있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오로지 베스놈의 투지와 용맹을 길러서 금옥이네 누렁이를 꺾고 말겠다는 석구의 노력은 다시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전보다도 더 주의 깊게 베스놈을 위해 주었고, 그런 그의 정표의 하나로 베스를 위해 암캐 한 마리를 더 얻어 들였을 만큼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베스놈이 누렁이로부터 불의의 곤욕을 당한 것은 순전히 그 암캐 때문이었다. 석구는 그런 일로 곤욕을 당한 베스가 더욱 밉살스럽기만 하더니 그게 나중엔 오히려 놈에 대한 이상스런 동정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암캐 한 마리 때문에 누렁이로부터 그토록 심한 곤욕을 당하고 만 베스놈을 생각하면 웬일인지 자신도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생기곤 했던 것이다. 그는 베스를 위해 전번에 복슬이를 보내 준 외가댁으로부터 그 복슬이 대신 중개 요량의 다른 암캐 한 마리를 얻어 들여왔다. 이름도 짝을 맞춰 같은 서양식으로 메리라 지어 불렀다. 그러고 나니 처음에는 생각지도 않던 뜻밖의 效果가 생겨났다. 베스와 메리는 금세 친해졌다. 친해졌을 뿐 아니라 메리는 베스가 투지를 회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어 주는 것 같았다. 개들은 한번 힘을 앗긴 놈에겐 좀처럼 다시 기를 펴지 못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베스는 좀 달랐다. 메리가 오고 나서부터 베스는 누렁이놈을 굳이 회피하려는 기미가 없었다. 싸움만 벌어지면 메리가 언제나 함께 싸움판으로 뛰어들어 베스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석구를 따라 금옥이네 사립께를 지날 때도 녀석은 누렁이의 기척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젓하게 버티며 으르렁대다간 석구의 재촉을 받고서야 비로소 발걸음을 옮겨놓곤 했다. 금옥이년이 다시 비양거리기 시작했다.
"흥, 이젠 아주 두 마릴 모셨군, 그래야 할 거야. 한 마리론 어림도 없지.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소용이 없을걸. 그까짓 똥개 두 마리쯤 우리 누렁이가 털도 안 뽑구 족쳐 놓을걸."
석구는 그냥 얌전히 벼르고만 있진 않았다.
"오냐, 그래도 겁은 나는 모양이구나. 그런 염려는 덮어 둬라. 이래봬도 난 기어코 베스놈 한 마리로 누렁일 해치울 작정이니까. 그땐 정말 누렁이놈 내쫓을 일이나 잊지 말구 있어."
아둥바둥 금옥에게 맞서고 나섰다. 그만큼 각오가 대단하기도 했고 또 전번에 당한 일도 있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부아풀이 겸해서 기회만 있으면 금옥의 비위를 건드려서 약을 올려놓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석구가 골목을 지나가다 보니가 마침 누렁이놈이 또 그 사립문 앞에 나앉아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녀석의 가랑이 사이엔 뻘건 것이 염치없이 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그는 꼭 녀석에게서마저 놀림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흙모래를 한줌 쥐어 숨기고는 천천히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 뻘건 누렁이의 사추리에다 정통으로 그 흙모래를 끼얹어 주었다. 누렁이가 질겁을 하고 달아났다.
"어떤 쌍놈의 새끼가 장난질야?"
당장 집안으로부터 금옥의 앙칼진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수상한 바깥 기척에 사립문을 쫓아 나오려던 금옥이 마당께 어디에 주저앉아 사추리의 흙모래를 핥아 내고 있는 누렁이의 흉한 꼴을 본 모양이었다. 차마 얼굴을 내밀진 못하고 욕설만 퍼붓고 있는 금옥의 심사를 석구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은 석구가 모처럼 논가에서 논물을 대고 앉아 있는데 마침 또 누렁이를 꽁무니에 달고 들일을 나가는 금옥을 마주쳤다. 그는 대뜸 심통이 솟았다.
"그 늙어빠진 누렁이 이제 그만 팔아 없애지 그래, 이제 우리 베스놈에게 혼날 날도 멀지 않았을 텐데. 나중에 직사게 물려 뜯긴 누렁이놈을 울고불고 쫓아내고선 가슴 아파하지 말구 말야."
으르렁거리는 베스놈을 붙들어 잡고는 약을 올려 줬다. 금옥도 지고 지나갈 리가 없었다.
"염려 놓으시라구. 우리 누렁이가 어때서. 이렇게 힘이 펄펄하고 건강한 누렁이가 글쎄 나이를 먹었다고 아무러면 주인하구 똑같은 누구네 똥개들에다 댈까."
석구는 참을 수가 없었다.
"흥, 계집아이가 흉측스럽게 개를 좋아하긴. 얘 남 부끄럽다야. 누렁이가 그렇게 건장하고 힘이 좋으면 놈한테 시집이라도 가련? 서방삼아 천년만년..."
그러나 석구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금옥이 논두렁 흙덩이를 움켜다가 번개같이 그의 면상을 갈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이었다. 석구는 그런 식으로 아귀처럼 한사코 금옥을 괴롭히면서 약을 올려 주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베스와 메리에게 싸움질을 단련시키는 일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참담스럴 만큼 집요한 집념의 나날이었다. 그런 날들이 다시 몇 달 흘렀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베스는 이제 완전히 쌈개가 되어 있었다. 석구도 이젠 정말로 베스놈이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마침내 석구가 마음속으로 혼자 결정하고 있던 날이 다가왔다. 그는 이날이 되자 아침부터 공연히 마음이 들떠 가지고는 골목 어귀를 할일없이 서성거렸다.
아니 할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아 둘 일이 있었다. 가을이 시작되어 사람들은 하루도 집안에 있을 여가가 없었다. 금옥이년이 누렁이를 꽁무니에 달고 어느 쪽으로 나가는지 행방을 알아 둬야 했다. 과연 금옥은 오래지 않아 누렁이놈을 데리고 또 대문을 나섰다. 낫과 점심 준비를 해 가지고 나서는 걸로 보아 벼베기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갈 곳은 뻔했다. 그녀네 서마지기 산골놀이 있는 재너머 반달골이었다. 행선지를 알아낸 석구는 이날 낮 여느 때보다는 좀 일찍이었지만 점심까지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꼴바지게를 짊어지고 느긋느긋 집을 나섰다. 물론 베스놈과 메리를 데리고서였다. 놈들에게도 특히 점심 요기를 두둑이 마련해 먹였을 만큼 석구는 세심한 주의를 끝내고 난 다음이었다.
그가 반달골 금옥이네 논배미 근처에 당도한 것은 그러니까 오정이 훨씬 지났을 때였다. 반달골에는 그가 점친 대로 영락없이 금옥이 벼를 베러 나와 있었다. 그녀는 벌써 점심을 끝내고 저녁나절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먼발치로 보니 누렁이놈은 금옥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근처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고 있었다. 석구는 빙그레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휘익휘익 휘파람 소리로 금옥의 주의를 끌어 보았다.
금세 효과가 나타났다. 금옥이 이윽고 낫질을 멈추며 석구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금옥은 석구를 쳐다보고도 못 본 척 금세 다시 허리를 굽혀 부지런히 낫질을 계속해 나갔다. 석구는 그러는 금옥의 논배기 근처로 좀더 가까이 내려갔다. 베스와 메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를 따랐다. 석구가 그렇게 금옥이네 논배미 귀퉁이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금옥이 갑자기 허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이젠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 천천히 논둑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매섭게 석구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베스를 데리고 왔다."
금옥을 향해 석구가 한마디 내던졌다. 금옥은 그제서야 히힝 하고 묘한 웃음을 날리고 나선,
"알구 있어, 그게 정 소원이람 할 수 없지. 하지만 또 후회를 하고 말걸."
하고 그녀답게 비웃음 섞인 소리로 말하고 나서는 여유만만 누렁이 쪽을 돌아다보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음인지 누렁이놈도 벌써 석구네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석구는 천천히 지게를 벗었다.
"건방진 염려는 아마 마지막일 게다. 이제 곧 알게 될 거니까."
그는 천천히 메리 쪽으로 다가가 녀석의 목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다."
말을 끝내고 나서는 벌써부터 목구멍에서 우르릉 우르릉 위협음을 굴리며 다가들고 있는 누렁이를 향해 베스놈을 사정없이 내몰았다.
"베스, 물어라. 쉭 베스. 물어! 물어!"
"누렁아, 물어라!"
금옥도 동시에 누렁이를 몰아 젖혔다.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두 놈은 서로 번개같이 몸을 날려 덤벼들었다. 놈들은 이내 한 덩어리로 엉클어져 엎치락뒤치락서로 상대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석구에게 목을 꼭 붙잡힌 채 베스가 뛰어든 싸움판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메리년이 죽자사자 발광을 했다.
베스놈도 처음 몸을 날려 뛰어나갈 때는 슬쩍 한번 메리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더니, 더 이상 거기에는 정신을 흘릴 수가 없는 듯 부리나케 혼자서 누렁이 놈에게로 돌진을 해 들어갔다.
"물어라, 베스! 베스야, 물어!"
석구는 끝끝내 메리년의 목덜미를 놓아 주지 않은 채 악을 쓰듯 베스를 응원하고 있었다. 응원은 금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석구보다도 더 억척스럽게 악을 악을 써대고 있었다.
"물어라, 누렁아! 물어 죽여! 누렁아 물어 죽여!"
와르릉와르릉...
"물어라 물어! 베스 물어라!"
석구의 응원소리와 자신들의 위협은 속에서 두 마리의 개는 엎치락뒤치락 실력을 가려내기 어려울 만큼 치열한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논바닥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베어 놓은 볏줌은 말할 것도 없고 개들이 딩굴이 들어간 데서는 아직도 낫이 가지 않은 것까지 볏줄기들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쓰러져 나갔다. 싸움은 좀처럼 끝나지를 않았다. 실력의 우열도 잘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누렁이를 타 누르고 있을 때 보면 베스놈이 허리 힘이 조금은 나은 듯싶기도 했지만 그것은 잠깐뿐이었고, 바로 그다음 순간에는 또 누렁이놈이 다시 베스의 배를 타고 올라와 녀석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대곤 했다.
하지만 싸움은 결국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드디어 어느 쪽인지 비명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자 석구와 금옥은 똑같이 긴장을 하여 순간적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 건너다보았다. 아직은 어느 쪽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것은 정말 순간이었다. 놈들이 이내 둘로 떨어져 나갔다. 한 놈이 재빨리 몸을 빼어 달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놈도 역시 이젠 기운이 다 한 듯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찰싹 사려 붙이고 날 살려라 달아나고 있는 놈을 한두 발짝쯤 쫓아가는 시늉만 하다 말고 금방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버렸기 때문이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러자 그때였다. 목이 메져라 누렁이를 기세를 돋아 주고 있던 금옥이 이번에는 또 다른 식으로 갑자기 발작을 시작했다. 꼬리를 사리고 달아난 놈이 바로 금옥이네 누렁이쪽이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누렁이는 이제 나이를 너무 먹어서 기력이 좀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직접 싸움을 거들지는 않았지만 한창 원기가 왕성한 베스놈 곁에 메리년이 있어 주어서 놈의 투지를 북돋아 준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번 싸움에서 먼저 비명을 울리고 뺑소니를 치기 시작한 것은 금옥이네의 누렁이쪽이 분명했다.
"나가 죽어! 바보! 어디로 나가 싹 죽어 없어지란 말야!"
그 누렁이를 향해 그리고 억울한 듯 아직도 건너편 언덕에서 차마 더 달아나질 못하고 멍하니 이쪽을 건너다보고 서 있는 누렁이놈을 향해 금옥은 그 어느 날인가의 석구처럼 마구 돌까지 집어 던지며 악을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옥은 어느 순간 갑자기 베어놓은 볏줌 위로 몸을 펄썩 주저앉히고는 느닷없이 울음까지 터뜨려 버리는 것이었다. 하고 보니 석구는 이제 싸움에 이기고 난 베스놈을 추어 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랜만엔 누렁이를 거꾸러뜨린 기분에 으쓱해질 여유마저 없었다. 아니, 사실 이제는 그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이 마당에 그는 느닷없이 맥이 풀려 버리고 만 것이었다. 갑자기 누렁이를 저주하고 나서는 금옥을 보자 터무니없이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중에는 몸을 헐고 주저앉아 눈물까지 쏟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는 숫제 그녀가 측은하기까지 해진 것이었다.
"저놈의 새낄 이젠 어째야지, 응? 저 병신새끼를!"
눈물을 짜며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금옥에게로 그는 오히려 까닭 모를 연민을 느끼며 슬금슬금 발길을 옮겨 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뜻을 잘 알 수 없는 소리로 금옥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금옥아. 내 금옥이 속 다 안다. 울긴 바보같이 왜 울어. 누가 정말 누렁일 쫓아내라고 할까봐서?"
말하는 그의 손이 어느새 금옥의 어깨 위에 닿아 있었다. 금옥은 석구의 말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젠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금옥에게선 처음 보는 일이었다. 금옥은 어깨 위에 닿아 있는 석구의 손도 얼핏 치워 버리려 하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슬프다 슬픈 눈에서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석구는 그게 더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든지 위로해 주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주변 없음이 못내 안타까왔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뭐라고든 자기 쪽에서 말을 계속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자, 이젠 눈물 그치고 일어나라구. 해가 많이 기울었잖아. 이 논배미 하나라도 해 전에 다 베어내려면 이젠 그만 일어나서 서둘러야 한단 말야. 개새끼들 통에 흐트러진 것두 추려야 하구."
석구는 이제 마구 금옥의 겨드랑까지 껴 일으키려 하면서 까닭이 없이 목이 메어 가고 있었다. 금옥은 그제서야 간신히 눈물을 좀 그치는 듯했다.
"자 어서. 이젠 그까짓 개새끼들에게 신경 쓰지 말구, 글쎄 시시한 개짐승들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뭘 그리 속을 상해하고 있어. 나도 낫을 가져왔으니까 같이 도와줄게. 응 어서."
하지만 금옥은 여전히 몸을 일으키려는 기색이 안 보였다. 할 수 없었다. 석구는 드디어 자신이 먼저 낫을 찾아들고는 논 가운데로 스적스적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금옥은 역시 그러는 석구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그냥 그대로 몸을 풀고 앉은 채 곰곰 석구의 거동만 바라보고 있었다.
건너편 산기슭에선 누렁이놈이 좀 전의 적수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사람들의 동정에만 넋이 팔려 어슬렁어슬렁 이따금 아쉬운 눈초리를 건네오곤 했다.
어디선가 철늦은 장끼 울음소리가 그 느긋한 가을 산골의 정적 속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메아리져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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