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번역한 글은 10년쯤 묵은 논문이라 보는 사람에 따라선 건질 것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2004년 기준으로 고구려-수나라 관계사에 대해 이보다 주목할 만한 중국학자의 연구성과는 없는듯하다. 저자가 일본학계의 영향(특히 ‘동북아체제관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중국학계(위진수당사)의 전형적인 관점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명한 잡지에 실린 지명도있는 논문이고, 더군다나 대단히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 길더라도 일독을 권한다. 특히 수나라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참고할 만하다. 저자의 주연구분야는 위진수당사, 특히 고대동아시아 국제관계다.
큰 지장이 없는 것은 저자가 사용한 용어를 그대로 썼다. 예컨대 여기서 “조선”은 대략 남북한을 합쳐 부르는 말이고, “동북”은 이른바 중국의 동북3성지구이다. 또 “고구려”는 “고려”로, “수나라” 따위는 “수조(隋朝)”라고 원문에 표기되어 있다.
《海交史硏究》1998年 第2期 pp.8-20. (中國海外交通史硏究會)
[본래「隋と高句麗の国際政治関係をめぐって」『堀敏一先生古稀記念 中国古代の国家と民衆』汲古書院, 1995年 3月版 pp.351-372 에 일어로 실린 것을 동저자에 의해 중국어로 옮겨 적은 것.]
(隋朝與高麗關系的演變)
한승(韓昇)
[厦門大學歴史系敎授]
1. 연구 돌아보기와 문제 제기
대업(大業)7년(611), 수양제(隋煬帝)는 고구려[高麗]를 토벌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 백만의 수나라병은 잇달아 요동 전장으로 떠났는데, 이는 단숨에 온 나라를 기울여 군사력, 인력, 그리고 재력을 모아 이루어 졌다. 이리하여 국가의 명운이 걸렸음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심지어 세계사까지 거대하고 깊은 영향을 낳았던 공전의 군사사건이 서막을 열었다.
수양제가 전쟁을 일으킨 배경, 원인, 목적 그리고 의의는, 당나라[唐朝] 이래 수많은 정치가, 역사가가 끊임없이 여러 측면에서 논평을 발표하고 연구를 진행했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 실패는 직접적으로 수나라의 몰락을 초래했고, 이런 수나라를 본보기로 당나라의 통치자는 주로 어찌하면 국가를 오랫동안 안정하게 다스릴 수 있을 지 등에 대한 현실정치의 시각에서 그 사건을 따로 떼어 수양제의 사치스런 탐욕과 인력의 남용을 질책했다. 당나라인의 평은 합리적인 면도 있지만, 그 전쟁의 원인을 의심할 여지없이 편파적으로 정리했다. 사실, 당나라 통치자는 이 전쟁이 지니고 있는 심각한 의미에 대해 불 보듯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의 책임을 수양제에게 돌리는 동시에, 실제로는 수나라의 대조선(對朝鮮) 정책을 계승하고 있었다.
당나라인의 논평은 후대의 연구를 엄청나게 좌지우지했고, 심지어 학계의 전통적인 관점이 되었다. (신중국) 건국이래, 이런 류의 관점은 여전히 매우 큰 영향을 가지고 있었다. 잠중면(岑仲勉)선생은, 수양제의 고구려원정은 “명분없는 전쟁이며, 이상하리만치 큰 공 세우기를 좋아하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 이 전쟁은 응당 침략성 전쟁으로 꼽아야 한다.[1]” 고 생각했는데, 전쟁의 원인을 수양제 개인의 영토확장 야욕에서 찾은 것이다. 이런 류의 관점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를 구별치 못한 채, 한 국제정치사무 중의 선택자유와 국제정치상 개인의 역할을 과장했으며, 정치권력에 대한 운용을 정치권력에 대한 추구로 보았고, 동북아 지역 각국 사이의 가치관념과 현실이익을 밝힐 수 없으며, 전쟁 발생의 내재요소만을 전면에 내세웠다.
조려생(趙儷生)과 고소(高昭) 두 분 선생은 고구려가 “중국을 침입했을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네들은 돌궐에 비해 두드러지게 많은 중국땅을 점령한 뒤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위진남북조 시기의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는 지면의 제한상 자세히 기술하기 어렵다. 5호16국시기, 중국을 향한 고구려의 확장에 대해 대략 말하면 이러하다. 모용선비가 거듭 고구려를 대파한 뒤부터 고구려의 서북방 확장은 북방민족에 가로막혔고, 그래서 방향을 틀어 남쪽을 향하면서 백제 및 신라와 날카롭게 충돌했다. 650년 무렵이 되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뒤부터 삼국간의 대립과 충돌은 더욱 더 복잡하고 맹렬해져 전쟁의 불길이 해를 거듭하니, 고구려는 (중국의) 동북을 향해 확장할 힘이 더욱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조려생, 고소 두 분의 견해는 조선 삼국간의 대립-항쟁 시각으로 볼 때, 고구려의 중국 침입가능성과 실력을 지나치게 크게 본 것이다.
근년들어, 수나라 역사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수양제 및 그 내외정책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륭복(韓隆福)선생은 수나라 고구려원정의 주원인은, “고구려가 (중국) 동북지구에 대한 확장 및 동북지구 민족의 통제를 위해 끊임없이 (중국의) 변경을 침입하여 시끄럽게 했고,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수나라의 반격을 초래한 것”이라고 했다 [3]. 이런 류의 관점은 꽤 성립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수나라 건국이래, 고구려는 줄곧 수나라에 조공하며 책봉 받았었고, 겨우 개황(開皇)18년(598)이 되서야 말갈과 연합하여 요서(遼西)를 침입했다. 이를 제외하고 수나라 시대에 일어난 고구려의 침입기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 입장에서 동북민족의 통제권를 빼앗으려는 중국이 수나라시대 고구려의 일부(지역을) 건드린 것이 원인이라고 치더라도, 정의(正義)로운 것인지 아니면 정의롭지 않은 것인지 따위의 가치판단(value judgement)으로써 역대 동북아국제관계의 논의를 대신한다면, 이러한 연구방향은 어려움에 깊이 빠질 것이다.
상당수의 학자가 요하유역은 본디 중국의 영토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강대한 왕조는 중국을 통일한 후에 반드시 그 영토의 주권을 필요로 했고, 이는 곧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 근본적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수나라가 왜 이것을 고구려 토벌의 이유로 삼지 않았는지에 대해 연구를 해야만 한다.
주의할 것은, 당나라시대에 고구려는 (중국의) 변경을 침해한 거동은 일으킨 적이 없었음에도 당태종(唐太宗)은 마냥 고구려를 토벌했었다. 게다가 당고종(唐高宗)때에 이르러 당나라는 기본적으로 요하유역을 수복했음에도 여전히 고구려 멸망시키기 방침을 견지했다. 이것으로부터, 조선문제는 변방 침범, 영토분쟁 발단 등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비교적 멀거니와 더욱 심각하고 복잡함을 알 수 있다.
니시지마 사다오(西島定生)선생은 동북아 자체를 한 완전하고 자율적인 세계로 보고, 연계적 관점을 이용하여 보다 넓은 시야에서 동북아 각국간의 내재적 관계를 논의했는데, 동아시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한 “책봉체제”가 있고 이것이 동아시아 국제정치질서의 기본 축이라고 여겼다 [4]. 또한 동시에 6세기 이후, 북제는 이미 거듭해서 동북아시아 각국의 책봉체제를 새로 세웠고, 수나라가 이를 계승했다고 여겼다. 이런 류의 국제관계구도가 고구려로부터 도전을 받을 때, 수나라의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왜냐하면 “신절(臣節)을 위반한 외번국(外藩國)을 바로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국왕조 자신의 명운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와 내정의 상호관계로부터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 의미를 한층 더 자세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니시지마는 지나치게 이론상의 논술을 중시하여 “책봉체제” 모델로 복잡한 동아시아 국제정치관계를 완전히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때문에, 구체적 문제의 연구에서는 책봉형식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되며, 각 시기에 따른 책봉관계 껍데기 밑에 숨어있는 책봉에 대한 속뜻의 변화를 철저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동아시아 국제정치질서의 구축에 대한 중국의 노력은 중시하되 각국이 책봉관계 유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발전시킨 정황은 경시했다. 즉, 중국이 동아시아 각국을 제어한 측면을 강조했으되, 유연한 측면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지 못해 농락(籠絡), 기미(羈縻) 등의 형식과 수단에 대한 깊은 논술이 없고, 따라서 그 이론의 설득력을 약화시켰다.
호리 토시카즈(堀敏一)선생은 당나라시대의 기미체제(羈縻體制)를 깊이 연구하여 수당제국의 대외관계는 책봉체제에 국한되지 않음을 지적했다. 즉, 그는 각국의 실력에 따라 여러 종의 관계형식이 나타나는 “동북아 국제관계체계” [5]를 구축한 독자적인 형식을 창안하여 사뭇 일깨움을 주었다.
필자는, 북제(北齊)는 조선삼국에 대하여 책봉의 내용보다는 그 형식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 책봉의) 어마어마한 실질적 의미는 없다고 본다. 수나라부터 당고종(唐高宗)시대까지, 중국과 위와 같은 동아시아 각국의 관계는 형식상 책봉으로부터 실질적 신속관계로 전환되었고,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은 이 배경하에서 발생한 것이다.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문명지구(civilizational area)를 국제관계 연구의 단위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었다 [6]. 이 견해도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에 적합하다. 동북아시아는 확실히 하나의 유기적으로 연계된 세계이므로, 경상적인 각국 사이의 관계는 상호인과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북아시아 전체의 각도에서 수나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단지 책봉의 형식뿐 아니라 그 본질, 각국간 세력의 균형과 증감, 직접적인 국가이익과 간접적인 충돌도 연구해야만 한다. 게다가, 수나라의 對조선 정책은 당나라에 의해 계승되므로, 수당 두 나라를 연계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면의 제한상, 본문에서는 겨우 수나라의 고구려정벌 배경과 원인만을 모색하여 두 나라 사이의 정치관계를 불완전하나마 검토하고, 역사 및 문화배경 등의 측면에 대한 분석은 다른 논술에 남겨두기로 한다.
2. 고보녕이 끌어들인 이민족[外族]의 작란(作亂) 및 그 영향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에는 그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이 있는데, 어떤 것은 직접적이며 어떤 것은 간접적이고 숨어있다. 고보녕(高保寧)은 영주(營州)를 점거하고 북주(北周)-수(隋)에 반항하는 바람에 수나라와 고구려 관계에 미묘한 영향이 있었다. 이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문제로서, 고구려 문제에 대해 중국 내정이 끼친 한 측면의 영향을 반영한다.
고보녕은 북제 후주(後主) 무평(武平, 570-575) 말년에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임명되었는데, “중국인, 오랑캐 (모두) 그의 위신을 중요시 했다” [7]. 영주는 북제의 진(鎭)인데, 고구려, 거란, 고막해 등을 살피는 요충지로서 전략적 지위가 무척 중요했다. 북주 무제(武帝)는 건덕(建德)6년(577)에 북제를 멸한 후에, “북제의 행대(行臺), 주(州), 진(鎭)으로부터 오로지 동옹주행대(東雍州行臺) 부복(傅伏)과 영주자사 고보녕만은 떨구지 못했지만 그 나머지는 다 북주 손아귀에 들어갔다” [8]. 북주 무제는 거듭 사자를 보내 고보녕을 회유했지만 거부 당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보녕은 돌궐에 망명해있던 북제의 범양왕(範陽王)인 고소의(高紹義)에게 상표하여 황제를 칭하라고 권하면서 스스로는 고소의 정권의 승상이 되겠노라고 했다. 선정(宣政) 원년(578)에 유주(幽州) 사람인
필자는 고보녕의 누차에 걸친 침입을 두고 사서에 낱낱이 실려있는 그 군대의 구성과 상황을 주목했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북제서·고보녕전》:건덕(建德) 6년, “주나라 군대가 막 업(鄴)에 이르려 하자, …… 고보녕은 정예병 및 거란, 말갈 (다해서) 1만여기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周師將至鄴,……保寧率驍銳幷契丹·靺鞨萬餘騎將赴救].”《수서·돌궐전》: 개황 원년, 돌궐은 자신들에 대한 수문제(隋文帝)의 푸대접을 원망하고 차에, “마침 영주자사 고보녕이 난리를 일으키자 사발략(沙鉢略)은 그의 군대와 연합하여
그런데, 유독 선정(宣政) 원년때의 고보녕 침입을 두고 《북제서·고보녕전》과《자치통감》에 모두 “이·하(夷·夏, 오랑캐·중국) 수만 기병[夷·夏數萬騎]”이라고 적혀있다. 이 전쟁에서 돌궐을 끌어들여 침입한 자는 고소의(高紹義)라고 사서에 환하게 적혀있다. 그렇다면 고보녕이 이끄는 “이(夷)”는 도대체 어떤 종족의 군대란 말인가? 이것은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자못 있다. 뭇 사료에 따르면 고보녕이 통솔한 이민족[外族] 군대로는 거란과 말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다 동이(東夷)이고, 따라서 여기서의 “이(夷)”는 거란 혹은 말갈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夷)”란 무척 넓은 의미로도 지칭되므로 그 외의 가능성 또한 있다. 다만 중국측 사서에는 더 이상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다.
다행히도 필자는 조선측 사료인 《삼국사기·온달전》에서 한가지 무척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때 사람이다. …… 때마침 후주[=북주] 무제가 군대를 내어 요동을 치자 (평강)왕은 군대를 이끌고 배산(拜山)이란 들판에서 되받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이 되어 날래게 싸워 모가지를 몇 십 넘게 베니 여러 군사는 승세를 타고 힘차게 나가 크게 이겼다. 공을 따질 적, 온달을 으뜸으로 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왕은 몹시 칭찬하며 “이 놈이 내 딸 서방일세” 라고 말했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時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溫達爲先鋒,疾鬪斬數十餘級,諸軍乘勝奮進, 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是吾女婿也.]
북주 무제 시기를 살펴봐도 요동정벌로 꼽을 만한 것은 없다. 단 《주서·돌궐전》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선정 원년 4월, 타발(佗鉢, Taspar)이 드디어 유주에 쳐들어오자, …… 고조는 몸소 6군(六軍)을 거느리고 머지않아 북녁을 정벌코자 했으나 마침 임금께서 돌아가셨고, 이에 군대를 물렸다.
[宣政元年四月, 佗鉢遂入寇幽州, ……高祖親總六軍, 將北伐,會帝崩,乃班師.]
《주서·우문신거전》에 더욱 상세한 기록이 적혀있다.:
선정 원년, …… 고조는 몸소 무기를 들고 북녁을 정벌하는 차에 (우문)신거를 시켜 원국공 희원(姬願) 등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다섯 길을 갖춰 들어가게 했다. 고조는 운양(雲陽)에 이르러 무척 앓았고, 이에 군대를 물렸다. 유주사람
[宣政元年,……高祖親戎北伐,令神擧與原國公姬願等率兵五道俱入. 高祖至雲陽, 疾甚, 乃班師. 幽州人盧昌期·祖英伯等聚眾據範陽反, 詔神擧率兵擒之.]
이상의 두 사료 및《자치통감》의 기재에 근거하여, 북주 무제는 선정 원년 5월에 6군을 통솔하여 다섯 길로 나누어 북벌에 나섰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북벌은 무제가 중병에 걸려 중단되고 말았다.[11] 바로 이 때, 고소의, 고보녕,
이로써 우리는 고부녕이 통솔한 “이(夷)”군대에 대해 진일보한 분석을 할 수 있다. 주·수(周隋) 무렵, 거란과 말갈은 모두 부락 단위로 분립된 채 아직 통일국가 상태를 이루지 못했었다. 《북사·거란전》에 따르면, 거란은 “10부로 나뉘어 있는데 병사가 많은 부는 3천 명을, 적은 부는 1천 여 명을 지니고 있었다[分爲十部, 兵多者三千, 少者千餘]”. 말갈은 7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중국과 고구려 등의 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그 남쪽 자락에 자리한 속말부(粟末部)와 백산부(白山部)였다.《북사·물길전》에 속말부는 “정예병이 몇 천[勝兵數千]”이고, 백산부는 “정예병이 불과 3천이다[勝兵幷不過三千]”이라고 적혀있다.
이 때문에, 설령 거란과 말갈의 몇 부(部)가 고보녕에게 호응할 지라도, 그 병력은 아마도 기껏해야 몇 천뿐일 것이다. 여기에 고보녕이 통솔하던 영주”하(夏)”군을 더하여 셈하더라도 사서에 적힌 “이·하(夷·夏) 수만 기병[夷·夏數萬騎]”과는 거리가 멀며 그 차 또한 무척 크다. 위에서 인용한《삼국사기》에서, 주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던 군대는 고구려왕이 몸소 통솔했었으며, 선봉관도 평강왕의 사위인 온달이다. 때문에 이들의 군대는 적은 수는 결코 아닐 것이다. 이로써 아래와 같이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낼 수 있다.
(1) 주 무제가 동북의 반군을 토벌하여 북방을 통일 할 무렵, 고구려도 비교적 대규모 지역에서 중국의 내전에 휘말려 주나라 군대에 저항했다.
(2) 고구려 군대는 고보녕의 “이·하(夷·夏)” 연합군의 일부를 구성했거나 이들과 서로 호응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고보녕은 한 지방에 할거하지 못했고, 중원왕조에 맞설 만한 실력도 결코 없었다. 주말-수초, 고보녕을 즉시 진압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그 배후의 이민족[外族]을 우려했던 바인데,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섣불리 이민족과의 대규모 전쟁을 벌리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국내외 적대세력이 결탁하여 중국 안전에 심각한 위협으로 될 것이 아주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로 할 것 같으면 위·진(魏晉) 이래 중국의 내란을 틈타 서북쪽으로 확장하면서 여러 차례 조위(曹魏)와 모용선비 등과 나라의 생사를 걸고 크게 치고박으며 요하유역을 통제했다. 요하유역 점령은 고구려에 있어 다방면의 중요의의가 있다. 우선, 동북민족에 대한 통제권을 두고 다른 나라와 쟁탈할 수 있다. 다음으로, 비옥한 농경지를 대량으로 획득하여 국내의 부족분을 채우고 경제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 또 다음으로, 이곳에서 항복자나 반란자를 리크루트해서 노동력을 불러들이고 인재를 끌어들여 중원의 선진적 문화 및 과학기술을 직접 도입할 수 있다. 또 다음으로, 공격은 어렵되 방어는 쉬운 요하유역의 지리적 환경을 본국의 울타리로서 이용할 수 있다. 요동유역에 대한 통제를 잃으면 고구려는 북방으로부터의 압력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음은 역사가 거듭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요하유역 쟁탈은 고구려에 있어 중대한 이익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위기를 무릅쓰고 중국 혹은 기타 북방종족과 수 백년 간에 한 번 꼴로 거듭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걸고 다투었다. 막 북주 무제가 중원을 통일하고, 고보녕의 반란을 평정하는 군대가 요동 가까이 임박했을 때, 고구려와 이 지역에 대한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그 신속(臣屬)이라는 북주의 명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12], 서슴없이 무력을 써서 북주 군대를 막아냈다. 이 사건은 적어도 아래와 같은 두 가지 문제를 반영할 수 있겠다.
첫째, 고구려가 북주 군대에 맞서 싸운 것의 목적은 그 요동의 기득이익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결코 중국의 내전에 참여할 의도가 있음을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장기적 이익 측면에서 말하자면, 한 강대한 통일 중국왕조의 출현에 따라 반드시 고구려와 직접적인 이익충돌이 발생했고, 이는 고구려가 원치 않는 것이라 심지어 (통일왕조의 성립을) 저지하려고까지 한 것이다. 또한 눈앞의 이익 측면에서 말하자면, 외세를 빌어 북주 군대에 저항한 고보녕은 객관적으로 요동의 울타리로 삼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고구려와 고보녕은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이다.
둘째, 남북조시기 중국의 대외적 책봉에는 단지 책봉이란 이름[名]만 있었지 신속(臣屬)이란 알맹이[實]는 적으며, 아울러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주춧돌이 될 수도 없음을 반영한다. 이런 류의 책봉관계는 국가간 이익의 모순과 충돌을 억제할 수 없었고, 외교상 전략전술적 수단의 성격을 더 띠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 는 세력과 이익의 경쟁 및 균형의 기초 위에 구축되었고, 친밀함과 소원함의 이합집산은 주로 실력 증감의 전이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요하유역의 통제는 마찬가지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그 자연자원과 경제방면의 이익도 물론이지만 단지 정치 및 군사 분야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우선, (중국의) 동북지역을 장악하고 나아가 동호(東胡) 각 민족 및 그 국가를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강대한 돌궐이 이미 이곳에 도달해 대항세력으로 있을 무렵엔, 의심할 바 없이 이들의 오른팔을 잘라내어 돌궐을 협공하는데 유리한 태세를 엮을 수 있었다. 일찍이 한무제(漢武帝)가 요동과 조선을 경략한 것도 엄청난 규모로 흉노에 맞서 싸울 전략상 수요에서 나온 것인데, 그 수비측면에선 화북지방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중국의 주요 경제구역이 관중으로부터 화북으로 전이된 뒤부터 동북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다음으로, 북주 및 그 계승자인 수나라는 관중으로부터 중원을 통일한 점이다. 이 때문에, 화북을 안정시키는 것은 곧 새 왕조의 운명을 결정하는 긴요한 과제가 되었다. 특히 양씨(楊氏)는 왕위 찬탈을 통해 북주 정권을 빼앗은 탓에 그 정통성 측면에서 지위가 누차 의심을 받았고, 또한 화북지방에선 거듭해서 수나라 중앙 정권에 반항했었다.[13] 이런 상황은 모두 수나라가 화북을 안정시키는 일이 어려웠음을 반영한다. 이 때문에, 만약 화북에 인접한 동북지역에서 수나라에 대립하는 정권이 존재한다면 장차 화북의 반항세력이 의지할 곳이 될 것이므로, 분열의 경향을 부추기고 증강시켜 왕조 통치의 견고성과 안전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고보녕은 영주(營州)를 근거로 북주에 저항했고, 아울러 북주와 고구려 사이의 군사대항을 유발했다. 일찌감치 동북지방 문제는 북주 및 수나라 통치자의 안건이 되었던 바,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은 일종의 겉치레에 불과한 현상임을 분명히 간파하고 있었고, 실제로는 고구려와 국내분열세력의 결탁이야말로 중국통일정권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큰 근심거리였다. 온나라의 통일을 견고히 하기 위해선 반드시 국외의 적대세력을 철저히 제압해야만 했는데, 이는 한가지 문제의 두 가지 측면이었다. 고구려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나자 새 왕조는 동북지방, 심지어 조선까지도 한때 중국이 직접 통치했던 땅이었음을 상기하고 벌컥 화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수나라는 건국 당초부터 고구려에 대해 경계심을 깊이 품고 있었고, 아울러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국가의 이익, 정권의 확립, 그리고 영토의 주권이 교차하며 함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하느냐는 새 왕조의 통치능력, 의지, 그리고 수완에 대한 가혹한 시험이었다.
3. 거란, 말갈 문제
개황 원년(581), 양(楊)씨가 북주를 찬탈하여 수나라를 세우자, 고구려는 신속하게 이 갑작스런 변화를 파악하고 사자를 수나라에 보내 북주 선정(宣政) 원년 이래 중단되었던 조공관계를 회복한다. 수문제(隋文帝)도 기민하게 고구려 위덕왕(威德王)을 대장군-요동군공(大將軍-遼東郡公)으로 책봉해서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는 국면을 타개했다. 이로부터 개황 4년(584)까지 고구려는 해마다 조공했다. 이로써 쌍방간 한 번의 긴장관계는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지듯 풀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새로운 한바탕의 쟁탈전이 숨죽인 채 진행되고 있었다.
요하유역은 일찍부터 고구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백제가 연흥(延興) 2년(472)에 북위 효문제(孝文帝)에게 올린 상표문에 고구려에 대해 “풍씨(馮氏)의 운수가 끝장나자 남은 무리는 다 달아나 몹쓸 놈들이 차츰 짱짱해졌다.”라고 지적했다 [14]. 이 설은, 한때 백제에게 중상을 입은 고구려가 태연(太延) 원년(436)에 북위와 유송(劉宋 = 남송)의 반목을 감히 무릅쓰고 북위에게 패망한 북연의 군주인 풍홍(馮弘) 및 그 군대, 인호(人戶)와 대량의 군수자원 등을 받아들였고, 이 때문에 다시 강성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고구려 융성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북방인구의 대규모 유입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낙랑 및 현도군의 공략, 그리고 부여족 합병은 고구려의 규모를 자못 갖추도록 했다. 4세기 전엽, 고구려는 또 차례차례 진(晉) 평주자사 최비(崔毖)와 흉노 우문부(宇文部) 등을 불러 거두었다.[15] 이런 류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요하 유역을 통제하려면 반드시 동호 각 종족을 정복해야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5세기 후엽의 거란 쟁탈이 이 점을 반영한다.
거란의 위치는 중국, 고구려 그리고 돌궐 3대세력의 사이에 있으므로 그 전략적 지위는 두말할 나위 없고, 따라서 몇몇 대세력 간의 쟁탈전이 시작되자 마자 거란이 그 대상으로 결정되었다. 북위때, 연연(蠕蠕)이 강성하자 고구려는 연연과 손을 잡고 거란 서북지역의 지두우(地豆于)를 분할하자고 모의했었다.《위서·거란전》에 따르면, “태화3년(479), 고구려는 몰래 연연과 짜고 지두우를 나눠먹으려 했다. 거란은 이들의 침입을 두려워했고 그 막불하물우(莫弗賀勿于)는 그의 부락의 수레 3천 대, 무리 1만 여 구, 그리고 온갖 가축떼를 몰고 (북위에) 들어와 내부하겠다고 하면서 백랑수(白狼水) 동쪽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해마다 조공했다 [太和三年, 高句麗竊與蠕蠕謀, 欲取地豆于以分之. 契丹懼其侵軼, 其莫弗賀勿于率其部落車三千乘·衆萬餘口, 驅徙雜畜, 求入內附, 止於白狼水東. 自此歲常朝貢.]”. 고구려의 지두우 정벌은 실제론 ’길을 빌어 괵나라를 무찌른다[假途滅虢]’는 계책이다.《수서·거란전》에 거란은, “후위(= 북위)때 마침 고(구)려의 침입을 받자 부락 1만 여 구가 (중국에) 내부하게 해달라고 하며 백비하(白貔河)에 머물러 있었다 [當後魏時, 爲高麗所侵, 部落萬餘口求內附, 止於白貔河]”고 적혀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고구려가 거란을 집어삼키려고 시도한 결과가 오히려 거란으로 하여금 중국에 달라붙게 하고 말았다. 이후 돌궐 또한 강대하게 일어나자 거란 쟁탈에 말려들었다.《수서·거란전》에 따르면, “그 후 돌궐의 핍박을 받자 또 1만 여 가(家)가 고(구)려에 의지했다. [其後爲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돌궐 세력의 개입에 따라 마침내 요동에서 고구려와의 무장충돌이 발생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7》양원왕(陽原王) 조에 따르면, “7년(551) 가을 9월, 돌궐이 와서 신성(新城)을 에워쌌지만 (우리를) 이기지 못하자, 옮겨가 백암성(白岩城)을 쳤다. (양원)왕은 장군 고흘(高紇)을 시켜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저들을 막아 꺽게하니 죽여서 1천 여 모가지를 얻었다. [七年(551)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岩城. 王遣將軍高紇領兵一萬拒克之, 殺獲一千餘級.]” 돌궐의 갑작스런 고구려 진격은 현저하게 거란 쟁탈과 아주 큰 관계가 있다.[16] 결과적으로 거란은 분열되어 일부는 돌궐로 들어갔고 일부는 고구려에 붙어 의지하게 되었다. 거란의 향배는 북제의 북쪽 변경 안전과 관계가 있다.《북제서·
수나라는 건국 초에 사방이 모두 적이었다. 내란은 논외로 하고, 외적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북방의 돌궐과 남방의 진(陳)나라였다. 수문제(隋文帝)는 비록 요동을 경략할 힘은 없었지만 장래에 대한 플랜의 본색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개황 4년(584) 당시의 거란에 대한 사료의 기재를 눈여겨 보면,《수서·高祖上》에, 5월 계유날, 거란의 군주 막하불(莫賀弗)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니 대장군에 배수했다. ……9월, 거란이 내부했다. [五月癸酉, 契丹主莫賀弗遣使請降, 拜大將軍. ……九月, 契丹內附]” 이듬해, “여름 4월 갑오날, 거란의 군주가 다미(多彌)를 사자로 보내 방물(=토산품)을 바쳤다 [夏四月甲午, 契丹主多彌遣使貢方物]”고 적혀있다. 또한《수서·거란전》에, “개황 4년, 여럿을 이끌고 막하불이 찾아와 알현했다. (개황) 5년, 그 무리가 죄다 새(塞)를 그리워하니 고조는 이를 받아들여 그 옛땅에 살도록 들어주었다. (개황) 6년, 그 여러 부(部)가 서로를 공격하길 그칠 줄 몰랐고, 또한 돌궐과 서로서로 쳐들어가니 고조는 사자를 보내 이를 꾸짖어 타일렀다. (그러자) 그 나라는 사자를 보내 궁궐에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開皇四年, 率諸莫賀弗來謁. 五年, 悉其衆款塞, 高祖納之, 聽居其故地. 六年, 其諸部相攻擊, 久不止, 又與突厥相侵, 高祖使使責讓之. 其國遣使詣闕, 頓顙謝罪.]”고 적혀있다. 이렇듯 수문제의 동북지역에 대한 전략은 거란으로부터 포석되었음이 꽤 명백하고, 이는 개황 4년에 이르러 현저한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많은 나라의 세력이 개입하여 쟁탈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거란 내부는 첨예하고 대립하여 내전이 끊임없었다. 수나라의 거란 각 부(部)에 대한 리크루트 공작은 착실하게 진전되었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상술한 과정 중에 필자는 특히 개황4 년에 발생한 변화에 주목한다.
앞에 기술했듯이 수나라가 건국되자 고구려는 해마다 조공했었다.《수서》와《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입조(入朝) 상황은 개황 원년에 1번, 개황 2년에 2번, 개황 3년엔 3번이나 되고, 개황 4년은 1번 있었다. 이후, 고구려는 갑자기 수나라에 대한 조공을 멈추고 방향을 바꿔 진(陳)나라에 사자를 보내면서 양국관계는 악화로 기운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조공의 횟수는 결코 관계의 친소(親疏)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지나치게 빈번한 왕래는 이 속에 필히 중요한 교섭이 있었음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짐작컨대 적어도 3가지 문제가 교섭되었는데, 첫째는 고보녕 문제고, 둘째는 돌궐 문제, 셋째는 거란 문제다. 개황 3년에 고구려는 3번 입조했는데, 반드시 수문제의 대대적인 돌궐 및 고보녕 토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해에 돌궐은 패북하고 고보녕은 피살되었다. 이듬해, 거란은 수나라로 마음을 돌렸고, 전체 동북지방의 세력균형은 완전히 변모하여 고구려의 대외전략은 중대한 좌절을 당했다. 특히 거란의 수나라 전향은 고구려로 하여금 필히 직접 강대한 수나라와 대면케 만들었는데, 마치 날카로운 가시를 등지고 있는 것과 같아서 춥지도 않은데 고구려를 떨게 만들었다. 그래서 거란이 수나라에 내부한 뒤부터 고구려는 곧 대외정책을 바꿨는데, 한편으론 거란 쟁탈을 계속하고, 한편으론 진(陳)나라와 결속하고 돌궐과 몰래 통하여, 새로운 세력균형을 모색했다.
개황 6년(586) 이후,《수서·거란전》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갈래의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그 후, 거란별부 출복(出伏) 등이 고(구)려를 등지고 무리를 이끌고 (수나라에) 내부했다. 고조는 이들을 받아들여 알해나힐(謁奚那頡) 북쪽에 안치했다. 개황 말년, 그 별부 4천 여 가(家)가 돌궐을 등지고 항복해 왔다.[其後, 契丹別部出伏等背高麗, 率衆內附. 高祖納之, 安置於謁奚那頡之北. 開皇末, 其別部四千餘家背突厥來降]” 거란별부가 고구려를 배반하여 수나라에 귀부한 사건이 어느 해에 발생한 것인지는 사료에 자세히 실려있지 않다. 서술로 미루어 보아 개황6년부터 말년 사이여야 할 것이고, 개황 17년(597)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먼저 수문제는 진나라 평정 후인 개황 10년(590)에 고구려왕에게 조공하라고 위협했다.[17] 이에 연거푸 2년 동안 고구려는 입조했는데 시기는 다 정월이므로 조하(朝賀)하는 예(禮)가 분명하다. 이후 개황 17년에 고구려는 재차 입조했는데 시기는 5월이었다.[18] 이때는 확실히 교섭한 일이 있었다. 짐작컨대 교섭은 결렬되고, 그래서 수문제는 새서(璽書)를 내려 고구려를 호되게 질책했다. 다음으로 수문제가 새서에서 열거한 고구려의 허물을 보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첫째 신절(臣節)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 “말갈을 핍박하고 거란을 고금(固禁)한 것[驅逼靺鞨, 固禁契丹]”이다. 이른바 “고금(固禁)”이란 강력하게 구속한다는 뜻이다. 이상의 분석은 개황 17년에 수나라와 고구려의 관계에 중대한 위기가 나타났음을 표명하는데, 수문제의 새서에 드러난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이 위기는 거란이 고구려를 이탈하여 수나라에 전향한 탓에 일어난 것이다. 이는 또한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거란 쟁탈에서 철저히 실패한 것이고, 이윽고 자기한테 들러붙어있던 거란별부마저 수나라로 기울었다. 이런 쟁탈은 상당히 격렬했고, 그래서 고구려는 강력하게 “거란 고금하기[固禁契丹]”를 쓰기까지 이르렀고, 이에 수문제는 곧 고구려에게 최후통첩식 새서를 보낸 것이다. 거란문제는 쌍방 관계를 일촉즉발 지경까지 밀어붙였다.
이렇게 준엄한 정세에 대면하자 고구려는 다소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냉정을 잃었고, 마침내 개황18년에 말갈과 연합하여 요서에 침입해서 먼저 전쟁의 시작을 열어 국면을 회복하려 했고, 방어선을 전진시켰다. 이는 고구려가 정치상, 외교상, 그리고 도의상 모두 실패를 선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수나라는 조선문제의 철저한 해결과 동아시아 국제정치질서 재구축 두마리 토끼를 위해 정정당당히 요동에 출병할 이유가 더욱 충분해졌을 뿐이다.
동북지방을 두고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또 다른 쟁탈은 말갈문제다.
말갈은 고구려 동북방에 자리하며 무척 넓게 분포했는데, 수나라 시대에는 7부로 나뉜 채 서로 통속관계에 있지 않았고, 조선은 물론 중국과도 유구한 역사관계가 있다. 북제 시대에 말갈은 자주 조공하러 왔었다. 수나라 건국 후, 문제(文帝)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회유했다. 개황 원년에 그 추장이 방물을 바친 것이 바로 보인다.[19]《수서·말갈전》에 “개황 초, 서로를 이끌고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치자 고조는 이 사자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길 ‘……짐은 너희들을 아들처럼 보니 너희들도 짐을 아버지처럼 모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했다. 이에 대꾸해 말하길, ‘……오래도록 노복(奴僕)으로 삼아 주셨으면 합니다 [開皇初, 相率遣使貢獻, 高祖詔其使曰:……朕視爾等如子,爾等宜敬朕如父. ’對曰……願得長爲奴僕也]”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개황 초년에 말갈은 이미 수나라 건국과 함께 군신복속 관계에 있었다. 이후 개황 3, 4, 11, 12, 13년에 다 그 조공기사가 보인다.[20] 양제(煬帝)때가 되자 말갈과 수나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대업(大業) 초, 그 “거수 도지계(度地稽)가 그 부를 이끌고 찾아와 항복했다 [渠帥度地稽率其部來降]”[21]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말갈은 심지어 수나라와 군사동맹을 결성하고 적극적으로 동북지방에 대한 수나라의 세력확장을 도왔다. 거란 문제를 두고, 문제(文帝)는 그들과 거란 사이의 모순을 이용하여 어부지리를 취했다. 고구려에 대응할 때, 양제(煬帝)는 먼저 이들의 군대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경상적으로 술렁이게 했고, (양제는) “요동 원정에서 도지계가 이끄는 그 무리도 종사하여 언제나 전공을 세웠다 하여 상을 후하게 내렸다 [及遼東之役, 度地稽率其徒以從, 每有戰功, 賞賜優厚.”] 이렇게 이들의 군대를 보다 직접적으로 고구려작전에 이용했었다[22]
말갈에서, 직접 중국 및 조선과 관계한 주요 집단은 속말부(粟末部)와 백산부(白山部)다.[23]《수서·말갈전》에 따르면, “그 하나는 속말부라고 부른다. 고(구)려와 서로 맞붙어있고 정예병은 수 천명인데 날램과 굳셈이 넘쳐나니 걸핏하면 고(구)려 안을 쑤셔댔다 [其一號粟末部, 與高麗相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中]”. 실제로 말갈이 고구려를 적대한 것은 오래 전부터다.《위서·물길전》에, 말갈이 북위 태화(太和) 초년에 내조해서, “스스로 말하길, 그 나라는 앞서 고구려의 10락을 깼던 적이 있고, (이제) 몰래 백제와 짜고 물길[水道]로부터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하려는 터, (우선) 을력지(乙力支)를 큰나라에 사자로 보내 그 가부를 묻고자 한다고 했다 [自云其國先破高句麗十落, 密共百濟謀從水道幷力取高句麗, 遣乙力支奉使大國, 請其可否]”고 적혀있다. 바로 이 기사가 그것을 환히 뒷받침한다. 필자는, 수나라가 말갈 각 부가 서로 통속관계에 있지 않은 점과 속말부와 고구려 사이의 모순을 충분히 이용했다고 보는데, 그래서 수나라는 일찌감치 속말부를 빼앗아 자기들한테 달라붙게 하고, 아울러 공동으로 고구려에 대응한 것이다. (때문에)《수서》에서 보이는 고구려에 적대적인 말갈은 응당 속말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상의 추측은 당나라인의 저작으로부터 뒷받침할 수 있다.《통전·州郡八》歸德郡 燕州條에, “수문제때, 속말말갈에 있는 돌계부(厥稽部)의 거장(渠長)이 몇 천 사람을 이끌고 부락을 들어 내부했기에 이들을 유성(柳城)에 자리하게 했는데 (이곳은) 연군(燕郡)의 북쪽이다 [隋文帝時,粟末靺鞨有厥稽部渠長, 率數千人, 擧部落內附, 處之柳城, 燕郡之北.]”고 적혀있다. 그러므로 수나라에 신복한 무리는 응당 속말부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개황18년 고구려와 말갈이 연합해서 요서에 쳐들어온 사건을 더욱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신·구당서·북적전》에 의하면 분명히 백산부는 평소부터 고구려에 붙어있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줄곧 말갈병을 대외작전에 사용해 왔는데 그 씀씀이로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작전사례가 자주《삼국사기》에 나타난다. 그리고 주지하듯 수나라와 당나라에 대한 작전에도 이들이 사용되었다. 이러하듯, 수나라와 고구려 모두 적극적으로 말갈을 쟁취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분명히, 수나라의 노력은, 본래 고구려와 대립했던 속말부를 제외하고는 거란의 경우처럼 순조롭지 못해서, 줄곧 고구려와 백산부의 연맹을 타파하지 못했다. (따라서) 수문제 및 양제가 고구려를 규탄하며 보낸 조서에 이것에 대해 분노를 나타낸 일은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동호족(東胡族)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수서·실위전》은 실위(室韋)를 두고 “그 나라는 철이 없어 고(구)려가 대준다[其國無鐵, 取給於高麗]”고 했는데, 이는 고구려가 각종 수단을 이용하여 동호 각 종족에 대한 영향을 확대했음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수나라 입장에선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동호족 쟁취는 결국 그 해당 지역에 대한 통제를 쟁취하는 것이다. 이는 수나라와 고구려 쌍방의 국방안전에 관계될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쌍방 세력의 증감까지 관계된다는 점이다. 수나라 입장으로 말하자면, 동호족 쟁취의 한가지 중요측면은 고구려와 돌궐의 연계를 끊는 것인데 그리하면 각개격파해서 분할 통치하기가 이롭게 된다. 반대로 고구려측에선 단독으로 수나라에 대항할 힘은 없지만 만약 동호족을 장악한다면 수나라에 맞설 만한 세력권을 동북지방에서 형성할 수 있으며, 나아가 북방의 돌궐과 의기투합할 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를 신복시키겠다는 국부적 목표도 실현시키기 어려운데, 심지어 수나라의 세계적 지위 및 그 국제관계질서 재건이란 전략이 얼마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것인가는 뻔하다. 의심할 나위 없이, 수나라와 고구려는 동호족 쟁취문제 측면에서 근본적인 이해관계의 충돌이 존재한다. 그리고 거란 및 말갈 쟁취는 수나라가 상술한 대외전략의 중요 구성요소를 실현하는 것이다.
4. 세력균형의 변동과 수나라의 전략목표
수나라가 건국되면서 불안정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즉, 다계층 간의 세력균형으로부터 수나라를 중심으로한 일원화(一元化) 국제관계로 전환되는 추세를 낳았다. 개황 3년, 수문제는 대대적으로 돌궐을 토벌했다. 이듬해, 돌궐의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 달두가한(達頭可汗) 등은 수나라에 신복했다. 거란 또한 하나둘 잇달아 내부하니 주변국가는 모두 수나라의 강대한 압력을 느꼈다. 그래서 개황 4년부터 고구려는 방향을 틀어 진나라에게 조공하고, 동시에 돌궐과의 연계에 박차를 가해서, 하나의 약소국가연합을 통해 강력한 수나라의 미묘한 변화에 맞서 나아갔다. 이는 두 포스[force, 力量]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나라는 장장 3백년에 걸친 분열을 철저하게 매듭짓기 위해 일부러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했다. 대외관계상에도 한제국(漢帝國)을 자부했기에[24], 수나라를 중심으로 국제관계체계를 세워야만 했다. 그 대외정책은 국내정책의 연장으로서, 마찬가지로 권력집중을 나타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마땅히 지적해 둘 것은, 국제관계 속의 권력집중을 단순히 권력추구로 이해해선 않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권력집중이란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수나라의 목표는 세계적인 제국과 이것에 조화롭게 적응된 국제관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수나라의 대외정책은 현실적이지 권력욕에서 나온 충동이 아니다. 이 한가지는 수양제는 공적 세우기를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이란 평가 속에 늘 묻혀 희석되고 말았었다.
한편, 고구려, 돌궐, 그리고 진나라의 연합은 의심할 바 없이 수나라의 국제전략에 저항하여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각자의 기득이익을 지키기 위함이다. 이런 연합은 국제사회구조상 보편적으로 있는 경향을 나타낸 것인데, 다름아닌 권력분산이다.
고구려의 새로운 동향은 남북조 이래 중국과 그 인접국 사이의 책봉관계에 대한 검증이었다. 남북조시대에 고구려는 동시에 남북 두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아들였다. 북조(北朝)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북위 세조(世祖)가 고구려왕을 책봉한 이후, 쌍방은 줄곧 군신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구려가 “신절(臣節)”을 지키지 않는다는 기사가 여러 번 보인다. 단지《위서·고구려전》의 기사만 보더라도, 북위 세조(世祖)때 고구려는 공공연히 북위가 토벌하려고 뒤쫓고 있는 북연(北燕)의 풍홍(馮弘)을 군신으로 받아들여서 거의 쌍방간의 무력대결까지 이어질 뻔했다. 또 현조(顯祖)때, (북위의) 궁궐에 여인을 보내라는 것을 거절했고, 고조(高祖)때 또 세자를 입조시켜 교구(郊丘)의 예에 참가하라는 것도 거절했다. 이렇게 혼인 및 볼모[質子] 보내기를 거절한 것은 “신절”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고, 고구려는 북위를 향해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세종(世宗)때, 고구려는 조공 예물을 구비하지 않았거니와 심지어 그 책임을 물길(勿吉)과 백제에게 전가시켰고, 이 기회를 빌어 북위와 이 두 나라의 관계를 충동질까지 했기에 세종의 질책을 받았다. 니시지마 사다오(西島定生)에 의하면, 6세기 중국에 대한 고구려의 외교는 북조에 치중했고, 6세기 후엽에 이르러 북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책봉체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헌기재상 그런 경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제 시대에 대해서만 말해본다면, 고구려는 북제한테 6번 조공했고 진나라한테도 6번 조공했다(한 번의 책봉 포함).[25] 통계치는 남북조 양측에 대한 고구려의 외교는 균등하게 유지한 편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북제 중심의 동아시아책봉체제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몹시 어렵다.
고구려는 남조(南朝)와 유구한 역사관계가 있고, 그 사절은 여러 번 남조에 이르렀다. 심지어 그 사절이 북위에게 사로잡혀 준엄한 문책을 받은 뒤에도 이런 왕래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또한 남조와 실질적인 상조관계에 있었다. 남송 문제(文帝)가 북위를 정벌할 때, 고구려는 말 8백 마리를 바쳐 그 군사행동을 직접 지원했었다[26]. 남북조에 대한 고구려의 양면외교는 의심할 바 없이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책략의 판박이다. 그것은 남조를 이용하여 북조를 견제하여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니시지마는 북제가 실현한 삼한(三韓)에 대한 책봉을 그 책봉체제의 완성이라고 보았는데, 이 견해는 지나치게 표면에 드러난 형식을 중요시한 것이다. 어떠한 국가라도 결코 겉치레적 권력명성을 얻기 위해 외교를 하지 않는다. 백제는 북위에게 상표하면서 고구려를 두고 “겉으로는 하찮은 번국이라 말하며 받드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개돼지 마냥 날뛰며 괘씸한 생각을 하더이다. 남으로 유씨(劉氏 = 남송)와 통하거니 북으로 연연(蠕蠕)과 맺어지거니 끼리끼리 입술과 이빨처럼 맞물려 제왕의 다스림을 짓밟으려고 꾀합니다 [外慕隗囂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唇齒, 謀陵王略]”라고 폭로하였다.[27] 실제로 이 말은 고구려와 북조의 관계에 대한 가장 생동적인 묘사였다. 북조 또한 이러한 고구려와 남북 사이의 상황에 대해 제 손금 보듯 훤했지만, 남북 양쪽에서 외적으로부터 견제를 받는 터라 생각만 넘치고 힘은 모자라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표면상의 책봉관계만 유지해서 고구려를 구슬려 묶어둘 뿐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다.[28] 이런 책봉관계의 실상은 구슬려 붙잡아 두는 성격의 임시방편[權宜之計]이었다.
고구려와 중국의 이와 같은 관계는 고구려가 남송[劉宋]을 지원한 사건에서 나타나듯이 고구려와 남조의 왕래가 더 실질적 의미를 갖추고 있었다. 강대한 남조는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이 오랫동안 형성된 관계야말로 고구려가 개황 4년 이후 수나라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진(陳)나라와 연계했던 일의 바탕이 되었다.《수서·고려전》에 따르면, 고구려왕은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서 냉큼 “병사를 가다듬고 곡식을 모아서 막아 지킬 대책을[治兵積穀, 爲守拒之策]”,세울 정도로 양국관계는 아래로 가파르게 죽죽 내려갔다. 고구려왕이 두려워한 것은 수나라가 진나라를 타파하여 동아시아 국제간 세력균형을 제거한 것이다. 또한 고구려왕이 즉시 대규모로 전쟁에 대비한 것은, 고구려와 진나라 사이의 對수나라 전략적 동맹을 따른 측면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로 인해 수나라로부터 공격받는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돌궐 사이는, 공통적으로 對수나라 문제에서 마찬가지 공동 이해관계가 있었다. 잠중면(岑仲勉)은 큘테긴비문 연구를 통해 돌궐이 강성할 때는 언제나 고구려와 우호관계가 맺어있었고 사절이 왕래했었다고 지적했다.[29] 개황 3년, 수문제가 북벌하여 돌궐병을 패퇴시키자 돌궐은 신하를 일컬었지만 그 마음속은 재기의 뜻을 가득 품고 있었다.[30] 서로 같은 곤경에 처하자 고구려는 몰래 돌궐과 통교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사료에 한계가 있어 상세히 규명하기 어렵지만, 대업 3년(607)에 양제(煬帝)가 계민가한(啟民可汗)의 천막집에서 고구려의 사절을 발견한 사건[31]은 양제가 그곳에 도착하기 앞서 고구려와 돌궐이 대책을 함께 논의했음을 나타내고, 나아가 그 은밀한 결탁관계는 하루에 그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개황 4년 이후, 고구려의 각종 동향은 수나라의 강한 불만을 유발했다. 특히 돌궐과의 은밀한 통교는 더욱 수나라의 높은 경계와 걱정을 유발했다. 양제가 계민가한의 천막집에서 고구려의 사자에게 경고할 때 특히 힘주어 “입조하지 않든지 해바라. 계민(가한)을 데리고 가서 저짝 땅을 돌거야[苟或不朝, 將帥啟民往巡彼土]”라고 말했다.[32] 이는 생각하건대, 수나라와 돌궐간의 긴밀한 관계를 부각시켜 돌궐과의 연맹을 염두해둔 고구려의 계획을 분쇄하겠다는 것이다. 고구려-돌궐 결맹의 잠재적인 위험은 수나라의 대외전략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고, 결국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선 또 하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수나라와 고구려의 격렬한 충돌을 유발시킨 또 하나의 측면은 삼한(三韓)간의 상호전쟁에서 비롯된다. 조선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고 끊임없이 남쪽을 향해 확장을 시도했었다. 수나라 건국 후, 백제와 신라 모두 수나라에 조공하여 책봉을 받아 수나라의 봉신(封臣)이 되었다. 때문에 고구려의 백제 및 신라 공격은 수나라와 이 두나라 사이의 군신관계를 멸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수나라의 국제관계질서에 도전하는 것이다.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도 당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선 중요원인이다. 번국(藩國)간은 상호침벌을 해서는 않된다는 점은 ”신절” 지키기의 중요내용임을 알 수 있다. 수나라가 다시 한번 고구려의 신절 위반에 화를 내며 책망한 것도, 마찬가지로 응당 이 측면의 내용을 포함된다. 고구려의 공세에 직면한 백제와 신라는 또 다시 수나라에 도움을 구해 고구려를 정벌하라고 청했었다.[33] 이를 수나라가 좌시하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장차 위신은 떨어질 것은 물론이고 국제관계질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삼한간의 충돌은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수나라에 의한 동아시아 제패의 큰 걸림돌임을 나타내고 있다.
대업 3년, 수나라 군신은 일찍이 고구려문제를 토론했는데, 배구(裴矩)는, 첫째 고구려는 원래 중국의 영토이고, 둘째 고구려가 신복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큰 이유를 들면서[34] 힘을 기울여 고구려를 정벌하자고 했다. 배구가 여기서 제기한 것은 영토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 수문제 및 양제가 고구려를 규탄하며 보낸 조서에는 오히려 영토문제를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요동은 원래 중국영토였다. 그러나 진(晉)나라 말에 중원이 난리에 휩싸인 뒤부터 고구려는 끊임없이 서북쪽을 향해 확장하면서 요동은 여러 손을 거쳤고, 모용선비가 쇠락하자 요동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수중에서 통제되었다. 후연(後燕)은 일찍이 고구려왕을 평주목-요동·대방2국왕(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으로 봉한 바 있다. 북위(北魏)도 곧 고려왕을 봉해 요동군개국공(遼東君開國公)으로 삼았다. 이후 수나라때까지 각 왕조는 모두 이런 (책)봉을 그대로 답습했다. 남조 동진(東晉)은 의희(義熙) 9년에 고구려왕을 도독영주제군사(都督營州諸軍事)로 임명했는데, 남송 무제(武帝)가 독평주제군사(督平州諸軍事)를 더한 이래 각 후대 또한 이를 그대로 따르며 고치지 않았다.[35] 이는 또한 남북의 각 왕조 모두가 모종의 어느 정도상 요동에 대한 고구려의 실제점령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동영토는 역사가 남긴 퍽 복잡한 문제다. 그래도 우리는 고구려의 실제 구역통제에 대한 남북 각 왕조의 승인에 선결조건이 있음을 주의해야 하는데, 이는 책봉을 전제로 한 것이다. 또한 (중국이) 고구려왕을 두고 중국황제의 속신(屬臣)으로서 그 관할구역의 관리를 허락한 것이라고 쳐도, 결코 이것은 영토주권의 양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신속관계(臣屬關系)의 전제조건에 동요가 발생하면 영토문제가 자연스레 안건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수당(隋唐) 양대에 요동영토문제는 줄곧 고구려의 불신문제(不臣問題)에 연계되어 제기되어 왔었다. 수나라가 고구려토벌 조서에서 요동영토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수나라 통치자는 국제관계질서의 각도에서 영토문제를 이해하고 처리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요동영토문제는 수나라의 고구려정벌에 내재한 한가지 원인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고구려의 불신(不臣)이 조성한 동북아지역의 긴장국면이 수나라의 국제관계질서에 대해 심각한 위협이 된 점이다. 이 근본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영토문제 또한 이에 따라 순리적으로 해결된다. 바로 수양제가 출사표를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 말과 같다. “고(구)려 고원(高元)은 번국의 예를 손상시켰으니 장차 죄값을 요동[遼左]에 물어 승리의 전략을 널리 퍼트리고 싶노라 [高麗高元, 虧損藩禮, 將欲問罪遼左, 恢宣勝略]”[36]. 수나라가 고구려문제 해결의 방침을 나타낸 것이다.
5. 승리자의 애도가
대업 년간, 수나라는 이미 동·서돌궐을 신복(臣服)시켜 서역을 뚫었고, 서남을 정복하여 사방에서 내조하니 수나라 중심의 국제관계질서는 기본적으로 구축되었다. 고개를 빙 둘러보면 오직 고구려만은 신복하지 않은 채, 심지어 돌궐과 몰래 통교하고 동아시아 국가의 입조를 방해하며, 수나라의 마음속 걱정거리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대업 7년, 양제는 고구려 토벌 조서를 내려 동아시아에 그 국제전략목표를 최종 실현하려 했다.
이듬해, 113 만 대군이 24군대로 나눠 날마다 1군대씩 출발하여 서로 40리씩 거리를 두었는데,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가 960리에 달했다. 게다가 만약 2백 여만의 군수운반 짐꾼을 더하면 정말로 온 산천을 꽉 메운 횡액[地殺]이 요동을 향했다고 말할 만하다. 이렇게 소설가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출정규모는, 그 어처구니없는 포장 탓에 이 자체가 내포한 중대한 의도를 가려버렸다.
우선, 출병규모가 수나라 상비군의 총수를 훨씬 초과했다. 아사미 나오이치로(淺見直一郞)의 연구[37]에 따르면 수나라때 부병(府兵)의 최대 징발수는 60만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수양제의 이 출병은 의심할 바 없이 전국에서 조달 가능한 군사력, 인력, 재력을 총동원하여 나선 것이다.
다음으로, 부병이 부족해서 군대의 대부분은 모병(募兵)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모병은 근본적으로 평상시에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일반백성[民丁]이므로, 그 전투력은 큰 문제가 되었다.
또 다음으로, 고구려 전성기의 병력조차 불과 30만인데도[38], 수양제는 이를 토벌하려고 1백만 대군이나 동원했다. 확실히 이는 너무 과도한 것이다. 그렇게나 많을 필요가 없었거늘 후방 업무의 부담만 가중시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대군의 원정은 속전과 야전에 이롭다. 수나라 병부상서 은문진(段文振)이 양제에게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한 적이 있으나 수양제의 여러 부서(部署)가 모두 그 시행을 반대했다.
수양제는 진나라평정군사령관[平陳軍統帥] 노릇을 한 적이 있음에도 (여기서의) 군사업무는 노련하다고 말할 순 없다. 이처럼 할 수도 없고 들은 적도 없을 만큼 엄청 과도한데다 병법에도 어긋난 출병에는 사실 어떤 의도가 있다.
우선,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대업 3년 6월에 수양제가 돌궐을 순시할 때, “태부경 원수(元壽)가 (양)제에게, ‘한무(제)가 관(關)을 나갔을 적에 1천리에 걸쳐 깃발이 나부꼈다고 합니다. 이제 어영(御營) 밖에 청해서 24군을 나누어 날마다 1군씩 보내되 서로 30리씩 거리를 두면, 깃발을 서로 보거니와 징과 북소리도 서로 들을 것이며, 머리와 꼬리 사이는 1천리나 끊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또한 출사(出師)의 성대함입니다’”라고 한 말이다 [太府卿元壽言於帝曰:‘漢武出關, 旌旗千里. 今御營之外,請分爲二十四軍, 日別遣一軍發, 相去三十里, 旗幟相望, 鉦鼓相聞, 首尾相隔, 千里不絶, 此亦出師之盛者也.]. 티끌만치도 의심할 바 없이 고구려토벌은 이 돌궐에 대한 병사 순시[兵巡]의 복제판이다.《자치통감》은 아주 분명하게 돌궐에 대한 병사 순시 목적은 “새(塞)를 나가 병사를 과시한 것[出塞耀兵]”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정벌 또한 한차례 대규모의 병사 과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병사 과시의 대상이 고구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자치통감》대업 8년 2월조에 양제는 “갈살나가한(曷薩那可汗) 및 고창왕 백아(伯雅)을 겁주려고 전투를 내다보는 곳까지 이들을 불러내었다 [引曷薩那可汗及高昌王伯雅觀戰處以懾憚之.]”고 적혀있다. 갈살나가한은 다름아닌 서돌궐 처라가한(處羅可汗)이다. 요동정벌에는 그의 아우인 궐달설(闕達設)과 특근대내(特勤大奈)도 참가하고 있었다.[39] 전술한 말갈의 거수(渠帥)인 도지계(度地稽)도 부(部)를 이끌고 고구려원정에 종사했었다. 수양제는 돌궐 등의 국가가 입조하는 것은 형세가 절박해서이지 마음으로 감복해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국의 병력을 소집해서 한편으론 먼저 큰소리를 내질러 남의 기세를 꺽자는 식으로 고구려를 힘으로 굴복시키려 했고, 동시에 각국에 시위하여 섣불리 반발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고구려 출병은 일거양득의 위협행동이었다.
그 다음으로, 매우 명확하게, 수양제의 대규모 출병은 그 뜻을 싸움에 두지 않되 싸우지 않고 이기는 데 두었다. 이 점은 수양제의 다음과 같은 조치에서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우선, 24군의 모든 군대마다 항복을 접수할 사자를 설치했는데 “(양제의) 조서을 받들어 (항복자를) 위무하되 대장의 지휘는 받지 않았다[承詔慰撫, 不受大將節制]”[40]. 이런 수항·위무사자(受降·慰撫使者)는 수양제로부터 직접 명을 받았기 때문에 권력이 커서 심지어 전장 사령관의 지휘를 좌지우지까지 할 수 있었다. 예컨대 위무사자 유사룡(劉士龍)이 우중문(于仲文)의 고구려의 대장 을지문덕(乙支文德) 체포를 제지해버리는 중대한 착오를 저지른 것도 이를 증명한다. 둘째, 수양제는 삼군(三軍)에게 엄히 명하길, “만약 고(구)려(군)이 항복하면 즉시 거두어 위로해야지 병사를 풀어놓으면 않된다 [高麗若降, 卽宜撫納, 不得縱兵.]”[41]고 한 점이다. 이는 전선 지휘를 흔들어놓아 누차 불리함에 처하게 했다. 셋째, 전술한 은문진(段文振)이 상표하여 다음과 같이 수양제를 일깨운 점이다. ”이적(夷狄)은 속임수를 일삼으므로 모름지기 깊이 의심하고 방비해야지, 입으로 항복할 마음을 내뱄는다해서 덥석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但夷狄詐, 深須防擬, 口陳降款, 毋宜遽受]” 이는 (수양제가) 결코 과녁없이 마구 화살을 쏴댄 것이 아니라 출병 당초부터 수양제는 고구려를 항복으로 몰아가려는 방침을 정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다. 책략결정 분야에선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은문진이 이 방침의 위험성을 보고서야 비로소 상대방을 깊이 경계하도록 타일렀을 따름이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수나라군의 여러가지 병법[兵理]에 어긋난 행동에 관해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었다. 수양제의 요동정벌을 다시 말하자면, 이는 고구려를 힘으로 굴복시켜 각국을 전율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둔 한차례 위협행동이다. 전에 없는 규모의 출병은, 수문제때 단순한 군사수단을 이용한 고구려토벌은 실패로 끝난다는 교훈을 경계하여, 위협을 통하여 싸우지 않고 이기기를 목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군사적 의미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많은 출병이다. 수양제는 진심으로 고구려가 반드시 수나라군의 위압에 굴복할 것으로 여겼고, 때문에 뜻밖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군사일에 대해선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 오히려 군대의 행동을 제한하면서 한마음으로 고구려가 눈앞에 와서 항복하길 기다렸는데, 심지어 각국의 수령을 불러들여 함께 관전하면서 흥을 돋우기까지 했으니, 마침내 천하의 대 코미디극을 연출하여 웃음거리를 남겼다. 수양제의 제1차 고구려원정은 군사수단으로 진행된 정치적 큰 도박이라 말할 수 있다.
수나라의 대외정책은, 의심할 바 없이, 국가실력의 기초 위에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세워진 것이고, 아울러 원숙하고 출중한 외교수완을 나타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수나라는, 고구려가 돌궐과 결탁을 기도하는 것을 저지했고, 말갈을 쟁취했으며, 거란을 구슬렸고, 백제와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수나라가 정치·외교 등 각 방면에서 거둔 일련의 중대한 승리는 고구려를 신복(臣服)하기 위한 좋은 조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승리는 수양제로 하여금 죽기로 저항하는 고구려의 완강한 의지를 과소평가하게 했거니와 일련하는 군사일의 실수와 착오를 불러일으켜, 앞에서 쌓은 공은 물거품이 되었고, 마침내 승리자의 애도가[挽歌] 가락이 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 원인과 배경을 단서로,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제정치관계를 살펴보았다. 분석을 통해,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에는 직접과 간접, 단기간과 장기간, 국부성과 전국성 등의 모순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런 모순의 배후에는 요동지역에 대한 양국의 이익충돌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원인은, 수나라가 한제국(漢帝國)을 자부한 탓에 중국의 수 백년 내란을 초래한 외부원인을 철저히 제거하고, 수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질서를 구축해서, 세계적인 대제국을 재건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가 기회를 엿보고 있는 서진(西進) 정책과 근본적인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남북조시기를 말해본다면, 중국이 동아시아 각국에 시행한 책봉은, 내용보다 형식에 비중이 있었으며 구슬려 묶어두는 구실로서 더 많이 표현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수나라의 대외정책은 그 권력의 실질을 추구해야만 했었다. 이것이 수나라 시대에 발생한 중국의 대외“책봉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이며, 그리고 이는 당나라가 계승하여 실현시켰다.
[1]岑仲勉《隋唐史》上冊, 中華書局, 1982年新一版, 第71頁. “隋煬帝征高麗“師出無名, 無非好大喜功的思想在作怪. ……此一戰役應列爲侵略性戰爭”
[2]同上. “不僅具備入侵中國的可能, 它還較之突厥更多地具備著於占領之後統治中國的可能.”
[3]韓隆福《隋煬帝評傳》,武漢大學出版社,1992年第一版. “高麗在東北擴張、企圖控制東北民族以及不斷侵擾邊境, 因而引起隋朝的自衛反擊.”
[4]西島定生 a.《中國古代國家與東亞世界》,東京大學出版會,1982年初版;b.《日本歷史的國際環境》,東京大學出版會, 1985年初版.
[5]堀敏一<東亞前近代史是如何形成的>,《歷史學硏究》276, 1963年.《近代以前的東亞世界》,同上281, 1963年.《關於古代東亞國際關系的若幹問題──史學會報告聽後感──》,同上286,1964年.<隋代東亞的國際關系>,唐代史硏究會編《隋唐帝國與東亞世界》,汲古書院, 1979年版.
[6]
[7]《北齊書·高保寧傳》 “夷夏重其威信”
[8]《資治通鑒》陳宣帝太建九年. “齊之行臺·州·鎭, 唯東雍州行臺傅伏·營州刺史高保寧不下, 其餘皆入周.”
[9]《北齊書·高保寧傳》,《周書·宇文神擧傳》,《資治通鑒》陳宣帝太建十年. “帥夷·夏數萬騎”
[10]《資治通鑒》陳宣帝太建十二、十三、十四、至德元年,《隋書·突厥傳》.
[11]《資治通鑒》陳宣帝太建十年五月條에는 “詔停諸軍”라고 적혀있다.
[12]고구려는 북조의 동서대립시기에, 동서 두 왕조로부터 동시에 책봉을 받았다. 그 서위와 북주에 대한 조공기사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璉五世孫成, 大統十二年, 遣使獻其方物.” 2. “建德六年, 湯又遣使來貢, 高祖拜湯爲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開國公·遼東王.”(《周書·高麗傳》)이 기사는 또《三國史記·高句麗本紀第七》平原王 19년조에도 보인다. 이후 수 개황원년까지 고구려의 입조기사는 보이지 않는데, 어쩌면 고구려와 북주 군대간의 분쟁과 유관할 것이다.
[13]졸작 <論隋朝統治集團內部鬪爭對隋亡的影響>,《廈門大學學報》1987-2. 人民大學資料中心《魏晉南北朝隋唐史》1987-7。
[14]《魏書·百濟傳》.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15]풍홍의 고구려 망명은《魏書·高句麗傳》、《三國史記·高句麗本紀第六》에 보인다.;고구려의 낙랑, 현도 공략 및 崔毖의 망명은《三國史記·高句麗本紀第五》에 보인다.;흉노 우문부의 고구려 망명은 《魏書·匈奴宇文莫槐傳》에 보인다:“建國八年, 晃伐逸豆歸, ……逸豆歸遠遁漠北, 遂奔高麗.” 아울러《三國史記·高句麗本紀第五》美川王에도 보인다.
[16]
[17]《隋書》및《資治通鑒》엔 이것의 관련사건을 개황17년(597)으로 두었다. 그러나《三國史記·高句麗本紀第七》에는 平原王32년(590) 라 했는데, 이것이 합당하다. [18]《三國史記·高句麗本紀第八》;《隋書·高祖下》.
[19]《隋書·高祖上》。
[20]同上.
[21]《隋書·靺鞨傳》. 中華書局標點本:“煬帝初與高麗戰, 頻敗其衆, 渠帥度地稽率其部來降.”《北史·勿吉傳》:“煬帝初, 與高麗戰, ……”《北史》의 표점(標點)은 비교적 명확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구절의 주어는 분명치 않고, 게다가 대업 1년에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교전(交戰) 기록이 실려있지 않다. 때문에 《通典》卷186《勿吉》은 이 구절을 생략하여 “煬帝初, 其渠帥度地稽率其部來降.”라고 했는데, 필자는《隋書》에 적혀있는 “與高麗戰”의 주어는 응당 말갈이라고 생각한다.
[22]同上.
[23] 同上載:“然其國與隋懸隔, 唯粟末·白山爲近.”
[24]전형적인 예는《資治通鑒》大業三年八月條의 기록과 같은데, 수양제는 돌궐을 순시하여 啟民의 천막집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呼韓頓顙至, 屠耆接踵來;何如漢天子, 空上單于臺!”
[25]西島氏의 견해는 (4)a에 보인다. 고구려의 북제에 대한 조공연대는 이러하다:天保元年, 二年, 六年, 河淸三年, 天統元年, 武平四年.(《北齊書》帝紀)진(陳)에 대한 조공 연대는 이러하다.:天嘉二年, 三年(冊封), 七年, 太建二年, 三年, 六年.(《陳書》帝紀)
[26]參見《南史·高句麗傳》。
[27]《魏書·百濟傳》. 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견해는 뚜렷한데 예를 들어 《南齊書·高麗傳》에는 고구려를 두고 “亦使魏虜, 然强盛不受制.”라고 했다.
[28]고구려에 대한 북조(北朝)의 태도는 북위 현조(顯祖)가 백제의 상표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답변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魏書·百濟傳》:“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麗卽敘, 未及蔔征.……”
[29]同注1.
[30] 돌궐이 반드시 장차 또 중국에 해(害)가 될 것은 수나라의 정치가가 일찍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資治通鑒》大業三年七月條載:“(高)熲又以帝遇啟民過厚, 謂太府卿何稠曰:‘此虜頗知中國虛實, 山川險易, 恐爲後患.’” 수나라의 병부상서 단문진(段文振)도 똑같이 지적하여 돌궐은 “異日必爲國患”라고 했다.(同上書大業八年二月)
[31]《資治通鑒》大業六年。
[32]同注31.
[33]백제가 고구려 정벌을 청한 일은《隋書·百濟傳》에 보인다. 신라가 수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은《三國史記·新羅本紀第四》眞平王三十年에 “王患高句麗高句麗屢侵封疆,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라고 적혀있다.
[34]同注31.
[35] 《北史·高句麗傳》、《魏書·高句麗傳》、《南史·高句麗傳》참조.
[36]《隋書·煬帝上》.
[37]《煬帝首次討伐高句麗的遠征軍──其規模與兵種──》,《東洋史硏究》44-1,1985年. 이 글에 따르면, 1. 隋軍 113만3천8백인이란 기록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다. 2. 隋代의 부병(府兵) 총수는 60만인을 넘지 못한다. 3. 隋軍의 반수 이상은 募兵이다.
[38]《三國史記·地理四》高句麗條:“渤海人武藝曰:‘昔高麗盛時, 士三十萬.”
[39]《舊唐書·突厥下》.
[40]《資治通鑒》大業八年.
[41]同上.
첫댓글 이 논문이야 말로 지금 제가 연구하는 주제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내년에 발표할 논문에 필수 참고자료인 이 논문을 번역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해주십시요. 감사합니다.
와... 이런걸 두고 '레어 아이템'이라 하나요?^^ 외국 논문 번역본 구하기는 정말 어렵죠.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구요... 퍼갑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이 논문이 도는 것 보고 어디있나 했더니 카페에 코앞에 있었습니다. 이런걸 모라고 하나. 불경찾으러 인도로 떠났는데 인도에는 원문이 없고 자주들어가는 카페에 왔더니 걸려 있더라고 하나. 등잔밑이 어둡다고 그말이 딱입니다. 다음부터는 카폐게시판을 24시간 감시해야겠습니다. 이런 중요한 논문이 있었다니. 하여간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