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영국의 강도들
집에서 조용히 책을 보거나 글을 쓸 때가 더 많아졌습니다.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모든 시름을 잊고 글 속에 몰두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때는 아픔도 잊고, 걱정도 잊고 완전히 몰두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배고픔도 잊고 가난도 잊고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인가 봅니다.
그런 때 초인종을 누르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같이 연구하고 공부하자’고 오는 사람들과 개척교회에 나오라는 사람들, 애기들 공부에 대해서 상담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나와 논쟁을 벌이려고 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내 생각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기도 하고, ‘천주교우의 집‘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불나비처럼 달려드는 불청객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과 논쟁을 하고나면, 머리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입만 아플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밀린다고 생각되면 더 말발이 센 사람을 다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을 따발총처럼 떠들고는 나를 화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내 귀중한 시간을 방해 받는다고 생각해서도 있지만 정말 귀찮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관심으로 변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빗장을 걸어버리고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십 여 년 전에 영국에서 무장 강도들이 귀금속 가게를 털려다가 70대 할머니의 용감한 행동으로 잡힌 사건이 방송에서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대낮인데도 강도들이 보석가게를 연장으로 부수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합니다. 다만 빨간 옷을 입은 할머니가 길 건너에서부터 달려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강도들을 손가방으로 물리칩니다. 그래서 강도들을 잡게 되고, 보석가게는 강도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영웅적인 행동을 두고 사람들의 말이 참으로 무성합니다. 할머니의 행동은 무모했다고 하기도 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했다고 칭송하는 말도 많습니다. 그리고 당황했던 강도들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가 있습니다.
그 강도들은 참으로 착하면서도 황당한 강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도심의 귀금속 가게를 털 정도의 강도들이 할머니의 힘없는 손가방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노인 할머니를 해코지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고, 할머니가 그렇게 용감하게 달려올 것을 상상도 못했을 뿐이고, 자신들이 잡혀가도 할머니를 때리거나 다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좋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 젊은 강도들이 할머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이 대견하다고 생각됩니다. 내 생각이 실제와 많이 다를지라도 돈 보다 생명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강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영국의 그 할머니 사건이 요즘 사회의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관련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수수방관으로 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 더 집착하고, 욕망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이 세대의 모습입니다. 생명을 경시하고 생명에 대해서 점점 잔인해지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을 함부로 대하고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만삭인 아내를 죽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 때 노약한 할머니의 손가방에 당황하고 모두 꽁무니를 빼는 그런 영국의 강도들의 노인과 여성에 대한 그 심성은 부럽기도 합니다. 영국의 황당한 강도들이 노인과 여자들에게 잔인해지는 이 세대에 실제로 생명을 존중하는 착한 표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마르코 8, 12)이 두렵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리하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야고보서의 시작입니다. 1,1-11
1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9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10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축일2월 12일 성 안토니오 카울레아 (Anthony Kauleas)
신분 : 주교
활동 지역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활동 연도 : +901년
같은 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성 안토니우스 카울레아(Antonius Kauleas, 또는 안토니오)는 프리지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성상 파괴 정책을 반대하여 이곳에 숨어살고 있었다. 모친과 사별한 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지냈다. 그는 수도원장이 된 후 자기 부친에게도 수도복을 입혀드리는 등 지극히 모범적인 수도자였다.
레오 6세 황제의 형인 스테파누스(Stephanus)가 죽자 성 안토니우스는 893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특히 전임자인 '성 이냐시오(Ignatius, 10월 23일)와 성 포티우스(Photius, 2월 6일) 사건' 등 어렵고 힘든 난국에서 평화의 수호자로 활약하여 '순결한 영혼과 균형 있는 사람'이란 평을 들었다. 공적인 기도 외에 그는 고행, 보속, 기도에서 어느 수도자보다 탁월하다고 하여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안토니오 카울레아 (Anthony Kauleas)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