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 야성 정공 묘갈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處士野城鄭公墓碣銘 幷序
일월산 남쪽 기슭 오리현(梧里峴) 학무산(鶴舞山) 계좌(癸坐) 등성이는 고 야성(野城) 정공(鄭公) 휘 근식(根植) 자 경립(敬立)의 묘이다. 처음에 가곡(佳谷)에 안장했다가 중간에 선성(宣城)으로 이장하고, 지금 또 여기로 옮겨서 부인과 합장하였다. 장차 비석을 세워 드러내려 하여 아들 휘덕(輝德)이 나에게 묘갈명을 지어줄 것을 청하니, 내가 비록 늙어서 정신이 없기가 심하지만 힘써 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은 내 조부의 택상(宅相)이다. 옛적 나의 조부께서 살아계실 때 공이 모친의 친정 행차를 따라 와서 우리집에 머물렀는데, 나는 공보다 다섯 살이 적었다. 나는 처음에 공을 따르면서 즐겁게 놀았는데 늙어서 백발에 이르도록 싫지 않았으니, 공의 평생을 아는 것은 나만한 이가 없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완후(完厚)하고 성품이 순실(淳實)하였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계를 잘 따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능히 알았다. 관례를 한 뒤 어버이 명으로 양자로 나갔는데, 당시에 생가와 양가가 모두 가난하니, 공이 학업을 버리고 몸소 농사를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에 그 심력을 다하여 가계가 점차 이루어졌다. 생가가 준령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나 틈이 나는 대로 가서 안부를 살피는 일을 거른 적이 없었다. 무오년(1918)부터 무인년(1938)까지 20년 사이에 생가와 양가의 부모상을 당하여 상례의 절차와 슬퍼하는 실정이 지극함을 갖추고, 장례의 절차가 정성스럽고 신중하여 유감이 없었다.
백형 중형과는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고, 공시(功緦)의 친족에 이르기까지 화목을 다하기에 힘썼다. 조상을 받들기를 반드시 정성으로 하여 큰댁의 여러 대 기일에는 몸소 참여하여 제사를 돕기를 노년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하였다. 생가 부친이 일찍이 선장(先庄)에 별장을 지으려다가 이루지 못했는데, 공의 형제가 그 유지를 따라 작은 정자를 지어 사모하는 정을 깃들이는 곳으로 하였다.
자손이 슬하에 많았는데 자애로움과 엄함이 아울러 지극하고 신구학을 겸하도록 가르쳐 각기 성취하게 하였다. 중년과 만년 이후로는 여러 아들이 힘든 일을 하지 말라고 애써 말렸기 때문에 드디어 그만 두고 한가로이 편하게 지냈다. 집이 제법 넓어서 벗들을 맞이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정답게 대접하고 문사에게는 더욱 돈독하게 좋아하였다. 이해를 따지는 생각을 마음에 싹틔우지 않고, 급한 말과 갑작스런 안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찍이 고을의 문주회(文酒會)에 참여했는데, 선배 여러분들이 공에게 역은(易隱)이라고 호를 지어주었으니, 대개 일월산 아래 은거하는 뜻을 취함이었다. 공은 곧 웃고서 받아들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 일로 칭찬함이 많았다.
공은 평소에 일찍 학문을 폐한 것을 회한으로 여겨으나 마음가짐과 행실은 유가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고 또 한 집안의 사업을 넉넉히 여유롭게 하였으니, 거의 자하(子夏)가 말한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말하겠다.”라는 사람일 것이다.
기유년(1969) 2월 5일에 돌아가시니, 태어난 갑오년(1894, 고종31)부터 향년 76세였다.
야성 정씨(野城鄭氏)의 선계는 본래 연일(延日)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 야성군(野城君)에 봉해진 휘 가후(可侯)가 있었던 까닭으로 야성을 본관으로 삼는다. 조선 조에 들어와 휘 송(松)은 개국 공신에 참여하여 야성백(野城伯)이 되었다. 중세에 영해에서 영양 가곡(佳谷)으로 이사하여 대대로 유업을 계승하였다. 고조 시묵(時默)은 호가 효재(曉齋)이다. 증조 붕규(鵬逵)는 호가 우포(寓浦)이다. 조부는 우현(禹鉉)이다. 부친은 춘영(春永)이다. 모친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니 성찬(星燦)의 따님이다. 생가의 부친은 원영(元永)이고 호는 소암(小庵)이다. 모친은 흥해 배씨(興海裵氏)이니 영두(永斗)의 따님이고 임연재(臨淵齋) 삼익(三益)의 후손이다. 공은 막내인데 양자로 나가 숙부의 뒤를 이었다.
배위는 반남 박씨(潘南朴氏)이니 부친은 기양(氣陽)이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태어나고, 기사년(1929) 5월 12일에 돌아가셨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휘덕(輝德)·양자로 나간 휘룡(輝龍)·휘만(輝萬)이고, 딸은 금병익(琴秉益)의 처이다. 계배는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니 부친은 언화(彦和)이다.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휘옥(輝玉)·휘서(輝書)·휘상(輝祥)이고, 딸은 김동한(金東漢)·이유갑(李裕甲)의 처이다. 휘덕의 아들은 재칠(在七)·재기(在琪)이고, 딸은 조동만(趙東萬)·고흥달(高興達)의 처이다. 휘만의 아들은 재득(在得)·재두(在斗)·재원(在院)이고,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휘옥의 아들은 재헌(在憲)·재건(在建)이고, 딸은 어리다. 휘룡의 아들은 재경(在京)·재인(在寅)·재범(在範)이고, 딸은 이승교(李承敎)·조무기(趙武基)의 처이다. 금병익의 아들은 세환(世煥), 국환(國煥), 명환(明煥)이다. 김동한의 아들은 재년(在年), 화년(華年)이다. 이유갑의 아들은 재목(在睦), 재용(在容), 재열(在烈)이다.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을 붙인다.
크게 졸박한 기운 흩어지지 않으니 大朴不散
천진을 홀로 보존하였네 天眞獨葆
효도를 행하고 우애를 행하니 維孝維友
한 집이 화락하였네 一室熙皞
집에는 난곡이 있고 鸞鵠于庭
채마밭에는 토란과 밤을 가꾸었네 芋栗于圃
남은 경사 끊임없이 이어지니 餘慶綿綿
선을 행한 것에 반드시 보답하네 爲善必報
돌아가 잠든 곳 또 길지이니 歸藏又吉
좋은 기운이 일월처럼 빛나네 佳氣兩曜
사실을 모아 명을 지으니 摭實爲銘
내가 사사로이 아부함이 아닐세 匪我阿好
택상(宅相) : 외손 또는 생질을 말한다. 진(晉)나라 위서(魏舒)가 어려서 고아가 되어 외가인 영씨(寗氏) 집에서 자랐다. 영씨가 집을 새로 지었는데, 풍수가(風水家)가 “마땅히 귀한 외손[貴甥]이 나올 것이다.”라고 하니, 외조모가 내심 위서를 떠올렸다. 이후 위서는 나이 마흔 남짓하여 상서랑(尙書郞)이 되었다. 《晉書 卷41 魏舒列傳》 여기서는 생질을 말한다.
공시(功緦) : 상복의 다섯 가지 복제에 있어서 아홉 달의 대공(大功), 다섯 달의 소공(小功), 석 달의 시마(緦麻)를 말한다. 대공은 종형제가 여기에 속하고, 소공은 재종형제가 여기에 속하고, 시마는 삼종형제가 여기에 속한다.
나는……말하겠다 : 이 말은 《논어》〈학이(學而)〉에 보인다.
난곡(鸞鵠) : 남의 집 훌륭한 자제를 일컫는 말이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