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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콜라주를 통한 자아의 초상 그리기
-이태선의 《화투 한판 치고 싶다》
여세주
essaytown@daum.net
1. ‘내 안의 나’를 찾는 고통과 희열
이태선의 수필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감정이나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많은 작품에서 겉만 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속내를 숨겨두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수필집 《화투 한판 치고 싶다》(에세이문학 출판부, 2015.6)의 머리말에서 말했듯이 “내 안의 나를 찾아주고 싶었다”는 창작의식과도 닿아 있다.
삶의 숱한 고빗사위를 겪었다고도 했지만 그의 수필세계에 지나온 삶의 그늘은 관심 밖으로 던져져 있다. 그런 경험들이 작품화된 경우에도 낭만적 추억처럼 그려진다. 힘겨웠던 삶의 기억은 끌어내기에도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과거에 겪었던 삶의 고통보다도 현재의 삶이 가져다주는 희열이 더 크고 충만해서일까? 그것은 작가의 긍정적인 세계관에서 연유된 결과일 것이며, 현재의 삶에서 충족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필가 이태선에게 이런 긍정의 힘과 충일한 여유를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틈틈이 책을 읽고 밤잠을 설치며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이다. 그는 한 편의 글을 탈고하기까지의 고통과 희열의 가치를 간파하고, 그것이 삶에 활력을 주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내 안의 것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니 개운하다”고까지 말한다. 글쓰기의 맛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수필이 설사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 하더라도, 글을 쓰는 묘미를 느낀 것만으로도 이미 이태선은 우리시대의 수필가이고 작가이다.
2. 가족 콜라주 속에서의 자아
이태선의 수필집 《화투 한판 치고 싶다》에는 가족을 화제의 중심에 놓고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감정이입을 통해 사물에서도 가족들의 삶을 읽는다. <김치를 담그면서>나 <손빨래>가 그러하다. <김치를 담그면서>의 경우에는 보리깜부기에서 호적에 이름으로만 남은 동생들을, 덜 절여진 배추에서 상속 문제로 불평불만 하던 여동생들을 떠올린다. <손빨래>는 가족들의 옷을 손빨래 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상념을 펼쳐놓은 수필이다. 아들 옷의 듬직한 등판에서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나달나달한 소매 끝에서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본다. 며느리의 블라우스에서는 시원하고 사근사근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냄새를 맡아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생경스럽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받아들이기에 버거운 관계라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손자 옷의 초콜릿 냄새와 비릿한 젖내에는 마음을 달뜨게 하는 마술이 숨겨져 있음을 느낀다. 작가는 가지런히 널린 빨래 하나하나에 눈맞춤을 하고 꿈틀거리는 희망의 냄새에 취한다. 가족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기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통찰력이 번뜩이는 작품이다.
수필가 이태선의 글쓰기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조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숙모, 남편, 고모, 딸 등으로 확대되어 있다. 그래서 이태선의 수필세계는 이들 가족들과 함께한 시간을 한 권의 스케치북에 붙여놓은 가족 콜라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전업주부로 살아온 여류작가의 경우, 가정이 곧 삶의 터전이고 가족 관계가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정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가족 이야기가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는 자연공동체가 작가의 삶에 그만큼 소중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아의 가치나 의미는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자아가 가족내적 존재로 생성되고 있다. 그의 수필은 가족들과의 인간관계 속에서 자아의 다양한 정체성을 형상화하는 언어 공간으로 거듭난다. <담장>에서의 자아는 남편이 쳐놓은 담장에 갇혀 항상 관리되는 존재이며, <화투 한판 치고 싶다>에서의 자아는 시조부님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벗이며, <방귀할아버지 이야기>에서의 자아는 손자의 행복한 포로이며 전기수다. 그리하여 그의 수필은 가족공동체라는 공간성을 통한 자아의 텍스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은 만만하지 않다. 가족은 유전자를 나눠 가진 혈연집단으로서 반드시 동거하는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혈연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피를 나누지 않은 가족끼리도 혈연가족에서처럼 친밀감을 가질 수는 없는가? 이런 의문의 답을 찾아가다 보면 가족이란, 유전자를 나눠 가진 혈연집단이라는 전통적인 인식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은 더 이상 혈연을 근거로 한 자연공동체로 정의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필가 이태선은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의 울타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생물학적 가족공동체를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여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족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입장에서 가족과 자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딸이 보낸 메일>에서 갑상선 암을 수술하고 퇴원한 후, “내 몸이 내 것만이 아니었다. 소중한 내 가족의 것이었다.”라는 자각에 이르는 것은 작가의 가족공동체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수필이라는 문학적 공간에서뿐 아니라, 실제로도 세 아들의 살림집을 같은 아파트 단지의 울타리 안에 두고 산다. 세 아들네 집의 현관문 비밀번호도 동일하다. 멀리 떨어져 사는 딸네 집의 비밀번호도 휴대전화에 입력되어 있고, 남동생네 집 전자키도 가방 안에 매달아 두었다. 이런 이야기가 <열쇠가 다섯 개>라는 작품의 내용이다.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열쇠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화자는 만족감과 행복함을 느낀다고 했다. 이 작품에는 이처럼 작가의 가족관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에게 가족은 공유와 충족이라는 공간성을 지닌 것이다.
3.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아의 초상
가족의 형성은 혼인과 출산에 의해 이루어진다. 가족공동체의 이상은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구성원 사이의 친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제도적 유대로 생성된 친밀도보다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유대에서 나타나는 친밀도가 더 농도 짙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가부장제에서 편입된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동등한 가족 유대의식을 갖는 게 쉽지 않다. 특히, 결혼으로 가족공동체에 편입된 여성은 양면성을 지닌 가족 구성원이다. 며느리나 아내라는 지위에서는 혈연적 관계를 지닌 존재가 아니지만, 어머니의 지위에서는 혈연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가족이데올로기에서조차 양면성을 떨쳐내지 못하곤 한다.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관계와 비혈연관계에 놓인 가족관계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태선의 수필에는 혈연 중심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가 곳곳에 뿌리박혀 있다. 그것에서 파생되는 갈등을 문제 삼기도 한다. 갈등이라기보다는 가족 내에서 혈연적 유대감 이상의 친밀성을 생성시키고자 하는 자아의 의지가 혈연에 의한 결속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무산되는 데서 오는 감정적 혼란이 그것이다. 시어머니에 대한 친밀감과 서운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시어머니의 갈치구이 접시>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사다놓은 새 고무신을 신지 않고 코와 뒤꿈치를 검정실로 꿰맨 채 신고 다니던 시어머니의 헌 고무신을 몰래 버린 경험과 시어머니가 두레상 가운데 놓아 둔 갈치구이 접시를 조끔씩 시누이 쪽으로 밀어놓던 경험이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시어머니에 대한 친밀감과 서운했던 감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윤회>에서도 시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하려고 하면서도 쌀쌀맞게 굴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성찰하고 있다. 아들의 여자친구가 갓 버무린 김치를 입에 넣어주며 보여준 살가운 행동에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 것이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감정의 교착과 반성적 자아 성찰은 <인연>이나 <국화차를 마시며>에서도 되풀이 되어 있다. 같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를 더 소중히 여겼기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운한 관계에 놓여버렸다.
개털은 석삼년을 땅에 묻어도 황모가 되지 않는다지만 어머님 품을 차지하기란 내 하기 나름이라 여겼다. 하지만 석삼년이 아니라 삼십 년 넘게 묻어도 개털이 황모가 되지 않듯 어머님 품은 내 차지가 되지 않았다. -<국화차를 마시며>에서
시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작가 이태선도 혈연적 가족관계를 제도적 가족관계보다 더 중시하고 있다. <어떤 배반>에서 혈연 중심의 가족 관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할머니는 할머니야. 우리 가족이 아니잖아.”라는 손자의 철없는 말에 서러웠다고 하는 데서 작가의 이데올로기가 확인된다. 함께 살지 않는 혈족은 가족이 아니라고 여기는 손자의 생각이 섭섭하게 들리는 것은, 함께 살지 않더라도 가까운 혈족이라면 한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느끼는 감정인 것이다. 작가가 시어머니의 품을 파고드는 살가운 행동도 한 가족으로서의 친밀감이라기보다는 혈연인 친정어머니의 포근함을 느끼고자 하는 대리만족이었다. 시어머니의 품에서 친정어머니를 느끼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저승에 계신 내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어미닭 품을 파고드는 병아리처럼 어머님 품을 파고들었다. …(중략)… 그러나 나는 어미닭의 병아리가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갈치구이 접시>에서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더듬으며 찾아낸 자아의 초상과 그 성찰이 며느리와의 인간관계에서 실천적 자아로 거듭난다. 남의 배를 빌려 낳은 자식이라고 표현했듯이, 며느리를 혈연적 관계의 가족처럼 여기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여러 작품에서 보이고 있다. <나의 엔딩노트에는>에서는 장례를 치르고 부조금이 남으면 큰며느리에게 못해 준 다이아몬드 반지를 해주라고 썼다. 온통 손자 이야기로 도배하긴 했지만 산달을 앞둔 며느리를 위한 나들이를 소재로 삼아 쓴 <별 하나 뚝 따다 박은 눈을 가진 놈>에서도 혈연 중심의 가족이데올로기를 넘어서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진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며느리와의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는 <부처님을 모시고>와 <며느리의 남편>에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넘어 서려는 의도 속에 며느리에 대해 서운하거나 못마땅한 감정이 숨어 있다. <부처님을 모시고>는 부처님을 모신다는 각오가 아니면 아들네와 합가하지 않는 게 좋다는 숙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들집에 합가하여 살면서 경험한 며느리와의 불편한 관계를 제재로 삼은 작품이다. 설거지 하는 고무장갑을 끼고 마루를 닦다가 며느리에게 핀잔을 들으면서 서운하고 못마땅했지만 치받는 감정을 삭여야 했던 경험을 표현했다. <며느리의 남편>에서도 며느리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드러나 있다. 백일을 막 지난 손녀가 칭얼대는데도 며느리는 텔레비전 화면에 빠져 있고 종일 일하고 온 아들이 손녀를 안고 달래는 풍경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을 그린 작품이다. 아들의 모습에서는 짠한 감정이, 며느리의 모습에서는 얄미운 감정이 솟구쳤지만 얼른 방으로 들어와 “며느리 남편까지 관리”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이야기다.
이들 작품에서, 감정적으로는 혈연을 중시하는 전통적 가족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하지만, 이성적으로는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제도적 가족인 며느리와의 인간관계에서 작가는 감성적 자아를 발견함과 동시에 이성적 자아를 생성해 낸다. 감정 길들이기를 실천하고 있는 자아의 지혜로운 초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자아는 <손빨래>에서 며느리의 블라우스 빨래하기에 비유되어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며느리의 연하늘색 블라우스에 비누칠을 조심스럽게 하고는 조물조물 주무른다. 될 수 있으면 본질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쓴다. 까닥 잘못해 보푸라기가 인다든지 박음질이 미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손빨래>에서
4. 서사적 수필을 읽는 재미
최근에 와서 수필의 흥미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서사적 수필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서사성을 가미하여 자신의 경험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글쓰기 방식이 그것이다. 《화투 한판 치고 싶다》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서사적 수필이다. 스토리를 지니고 있고, 대화체를 활용하는 표현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서사적 형식으로 전달함으로써 흥미로운 독서를 담보한다.
작가 이태선이 서사를 결합시켜 한 편의 수필을 완성시키는 방법은 주로 교술 담론 안에 서사를 삽입시키는 방식이다. 삽입한 서사적 담론과 기초가 된 교술 담론은 상호간섭적이되, 동일한 위상을 갖지 아니하며 주종의 관계를 이룬다. 두 담론이 기능상으로는 설명과 유사 관계 등으로 나타난다. 기초 담론의 화자와 삽입 담론의 주체는 다른 경우도 있고 동일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창작방법을 구현한 작품들로는 <찌찌마개>, <수탉과 개구리>, <조각보> 등이 있다. 대표적으로 <찌찌마개>를 살펴보면, 이 작품은 교술 담론을 외곽에 배치하고 있다. 딸이 생일선물로 브래지어를 사 왔는데, 찌찌마개를 사달라고 조르던 딸이 이렇게 성장했으며 작가 자신은 초로의 여인이 되어 있다고 하면서, 이다음에 손녀는 어떤 모습으로 찌찌마개를 만나게 될까 하는 의문으로 맺었다. 이러한 교술 담론 가운데에, 어린 시절의 작가가 고모의 찌찌마개를 걸치고 뾰족구두도 신고 점심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 앞에 나왔다가 혼쭐났던 이야기를 서사의 형식으로 길게 펼쳤다. 세월의 속도를 전달하려고 하였는데, 서사적 담론의 흥미로움이 교술 담론에서 의도한 메시지를 망각시킨다.
단일한 서사적 담론으로 이루어진 작품들도 있다. <C,8>은 친정 쪽의 친척 동생 이야기를, <내 허기의 진원지>는 ‘동시랑 놀자’라는 주제로 진행된 도서관 봉사활동에서의 경험을, <마산 땅콩 캐러멜>은 폐암으로 아내를 잃은 남동생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펼쳐낸 수필이다. <어떤 배반>, <나는 분홍색이 무섭다>, <꿈의 주파수> 등도 단일한 서사적 담론으로 이루어진 수필이다.
이태선은 ‘시작-중간-결말’을 지닌 사건은 물론이고 단순한 상황을 서술하는 경우에도 대화체 표현을 매우 선호하고 있다. 그만큼 작가가 서사적 형식을 지닌 수필 쓰기에 몰두한 것이다. 따라서 서사적 수필 쓰기는 그의 작품세계가 지닌 형식적 특징이다. 그의 수필이 쉽게 읽혀지고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이와 같은 서사성의 지향에 근거하고 있는 셈이다.
5. 재주를 썩히지 않는 길
수필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자아의 초상을 찾아나서는, 힘겹고 즐거운 여행이다. 이태선은 수필의 그러한 본질을 잘 터득하고 실제로 작품에 구현하고 있다.
이태선의 수필을 읽고 있노라면, 삶의 이치를 통찰하는 지혜가 번득이고 삶을 표현해 내는 언어의 조직은 섬세하고도 유연하다. 실개울이 영롱한 물방울을 튕기며 쪼르륵 쪼르륵 흥겹게 흘러가는 듯하다. 그는 수필가로서 문학적 통찰력과 표현력을 두루 갖추었다는 말이다.
수필집 머리말에 따르면 이태선의 학력은 볼품없다. 그러나 각종 문학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이 화려하다. 그러한 성과가 허명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의 작품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제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 문학적 소질을 타고난 작가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주도 방치하면 쓸모가 없고 제대로 다듬지 않으면 제 빛깔을 발휘하지 못한다. 작가의 목소리를 높여 수필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기치를 치켜들고, 관심의 공간을 넓혀서 사회적 자아의 초상을 그려내는 글쓰기를 이어가는 것도 재주를 썩히지 않는 길이리라.
( 《수필미학》 2015년 가을호)
여세주
문학평론가, (전)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심각하지 않은 심각성의 미학, 「논리적 글쓰기 이렇게 하면 쉽다 등. 현 《수필미학》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