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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 경상도(慶尙道) 하양현(河陽縣)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 경상도(慶尙道) 하양현(河陽縣)
동쪽으로는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6리, 남쪽으로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18리, 서쪽으로 같은 현(縣) 경계까지 30리, 북쪽으로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12리,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2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려의 하주(河州)였는데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더니. 현종(顯宗)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縣)을 만들어 경주부(慶州府)에 붙이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하주(河州)ㆍ화성(花城).
【성씨】 본현 허(許)ㆍ현(玄)ㆍ제(諸)ㆍ유(兪), 김(金) 속성(續姓)이다. 안심(安心) 전(全)ㆍ박(朴)ㆍ이(李)ㆍ최(崔)ㆍ신(申)ㆍ김(金)ㆍ허(許)ㆍ노(魯)ㆍ형(荊). 이지(梨旨) 이(李)ㆍ윤(尹)ㆍ안(安).
【산천】 무락산(無落山) 현에서 12리에 있는 진산(鎭山). 초례산(醮禮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고려 태조가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공산(公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병풍암(屛風巖) 현의 서쪽 14리에 있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 5리에 있으며, 영천군(永川君) 동경도(東京渡) 하류(下流)이다. 대지(大池) 현의 동쪽에 있다. 동자지(童子池) 현의 남쪽에 있다.
【토산】 대추[棗]ㆍ입초(笠草)ㆍ붕어[鯽魚]ㆍ은어[銀口魚].
【봉수】 시산봉수(匙山烽燧)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동쪽으로 영천군(永川郡)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경산현(慶山縣) 성산(城山)에 응한다.
【누정】 용벽루(聳碧樓) 동헌(東軒) 동쪽에 있다. 영락(永樂) 병신(丙申)년에 현감(縣監) 송을개(宋乙開)가 세웠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가 있다. “시야 속에서 날던 새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텅 빈 누각은 반공중에 서 있네. 굵은 마디 긴 대나무는 천 개의 옥삭(玉槊 대의 별명)이요, 가는 허리 연약한 버들은 만 가닥 금실일세. 청천(晴川)의 좋은 글귀 지금은 어디 있는가. 고목(孤鶩)의 높은 재주 교만할 것 없네. 누각에 오르니 생각도 많은데, 이른 아침 산 허리엔 비를 뿌리네.” 관서정(觀逝亭) 현의 남쪽 4리 지점에 있다. 앞에는 큰 냇물이 평평한 넓은 들을 감돌아 흐른다. 영락(永樂) 갑진(甲辰)에 현감(縣監) 채륜(蔡倫)이 세웠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3리 거리에 있다.
【역원】 화양역(華陽驛) 현의 서쪽 7리 거리에 있다. 폭괘원(幅掛院) 현의 서남쪽 18리 거리에 있다. 시천원(匙川院) 현의 동쪽 5리 거리에 있다.
【불우】 신림사(新林寺) 무락산(無落山)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갈대 태워 6월 더위 돋우니, 금기(金氣 가을 기운)는 움츠리고 화기(火氣 여름 기운)는 가슴을 떠네 붉은 기운 우주에 뻗치니, 이글이글 새 가마 연 듯 어찌 풀과 나무만 타겠는가? 모래도 돌도 다 탄다네. 내 이슬 먹는 신선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이 번거로움 피할 수 있으리. 마음속이 타고 있으니 이 답답함 언제나 가시려나. 근심스레 앉았으니 스스로 편치 않네. 조용히 더위 씻을 곳 생각한다면 돌아가는 길 멀다고 어찌 사양하리. 나귀 타고 다른 고을로 향하니, 내와 육지가 이렇게도 먼가. 모인 강물은 흰 비단이 비치듯, 겹친 산봉우리에는 푸른 옥을 묶은 듯. 서남쪽으로 통한 한 줄기 길, 꾸불꾸불 산허리를 감았네. 이끼를 밟고 고찰을 찾으니, 아름다운 경계라 속세를 떠나 있네. 연기와 안개 는 골짜기에 자욱하고, 측백나무 잣나무 공중에 솟았다. 뜰 앞에 냇물은 콸콸 흐르고, 난간 밖에 바람은 으스스하다. 초가집 암자엔 노승이 하나 방장(方丈 승의 거처하는 방)에서 우뚝하게 앉아 있다. 눈속의 원숭이가 저렇게 싸느랄까 서리맞은 갈매기가 저렇듯 고고할까. 향 연기는 가늘게 피어오르고, 꽃잎은 가볍게 흩날린다. 선(禪)을 닦은 마음 물욕은 버렸지만 옛 친구는 아직 차마 못 잊네. 조용히 마주보고 앉아서, 담소하며 맑은 바람(淸風 고상한 인격) 일으킨다. 서늘한 자리에 놀란 물결 일어나 찌는 더위 식혀주네. 갈건(葛巾)을 쓰니 머리 손질 귀찮고, 부채[葵扇]를 잡아 이따끔 흔드네. 조용한 분위기 내 맘에 맞아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 내키지 않네. 요란한 매미 소리에 저녁 노을 붉어 오고, 잔잔한 종소리에 아침 구름 훤해진다. 아침에 시를 읊으면 낮이 후딱 가고, 저녁에 취하면 밤새우기 일쑤지. 한 번도 지적 없는 소 학사(蘇學士 소동파), 삽수(霅水 땅 이름)에서 삼료(參廖)와 마주했다.” 하였다.
남태사(南泰寺) 시산(匙山)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말 위에서 시내와 산 백 겹이나 지나서, 황혼에야 비로소 범왕궁(梵王宮 절)에 도착했네. 눈 덮인 일천 봉우리는 반공중의 물결이요. 온갖 구멍에서 나는 바람 소리는 평지의 천둥일세. 시든 부들에 시름겹게 앉으니 몸이 떨려오고, 마른 삭정이를 쾌하게 태우니 다리가 활같이 굽네. 그대를 시켜 술을 청해 함께 마시니, 얼었던 뺨이 금시에 난만하게 붉어지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 현의 서쪽 12리에 있다. 이지부곡(貍只部曲) 현의 서쪽 8리에 있다. 안심소(安心所) 명산(明山)이라고도 한다. 공산(公山) 밑에 있다. 양량원(陽良院) 옛날 양량부곡(陽良部曲)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지폐현(梨旨廢縣) 신영현(新寧縣) 서쪽 20리에 있다. 본래 영주(永州) 이지은소(梨旨銀所)였다. 고려 말년에 현으로 승격되어 영주에 소속되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이곳[하양]에 속했다. ○ 최해(崔瀣)의 비석에 쓰기를, “지원(至元) 후원년(後元年)에 상호군(上護軍) 안자유(安子由) 등이 중국 서울에 갔다가 돌아올 제, 천후(天后)의 명령으로 부마이신 선왕에게 복명하여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이지은소는 옛날에는 현을 삼았었는데 중년에 이 고을 사람들이 국가의 명령을 어겼다고 폐지하였고,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백금(白金 은이다)을 세금으로 받아 은소(銀所)라고 일컬은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그곳 토인(土人)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부터 중국 궁중에 내시로 있어 수고로운 일을 많이 했다. 그 공으로 그의 고향을 다시 현(縣)으로 승격시켜라.’ 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유사(有司)를 시켜 중국의 뜻대로 시행하였다. 이듬해에 나수가 사신이 되어 귀국, 고향을 영화롭게 했다. 본래의 터가 비좁다고 자리를 고을 서쪽으로 옮겼다. 본래의 터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고 현사(縣司)와 장리(長吏)를 다시 두어 처음과 같이 했다. 5년 뒤에 야선불화의 향함(香函)을 갖고 잇달아 와서 ‘이 고장이 회복되게 된 전말 사실 기록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사왕(嗣王)에게 비문을 청했으므로 내가 늙었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서 명(銘)을 지어 이 비를 보는 자들을 깨우쳐 준다. 나수(那壽)는 벼슬이 봉의대부 견용태감(奉議大夫甄用太監)에 이르렀고, 야선불화(也先不花)는 중의대부 중서사승(中議大夫中瑞司丞)에 올랐으니, 성은 모두 이씨(李氏)다. 본국에서도 나수에게는 신안군(信安君)을 봉하고, 야선불화는 영리군(永利君)이라고 이름해서 삼대(三代)에 걸쳐 모두 추봉(追封)했다. 그 아들이 귀하게 되어 장차 중국 조정으로부터 추봉, 증직(贈職)될 것은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너의 나라 선군(先君)이 동쪽 나라를 정할 때에 그 산천(山川) 형세로 따르고, 크고 작은 터를 보아서 현(縣)을 세우고 주(州)를 두었다. 밝게 훈계하여 이르시기를, ‘조금도 더하고 덜함이 없게 하라.’ 하였으나, 때로는 운명이 스스로를 깎아냈다. 오직 이 이지현(梨旨縣)은 영주(永州)에 소속되었는데 전하는 말에 옛날에 고을 유생[邑子]들이 스스로 중흥[修擧 회복함]하지 못하여서 온 고을이 엎어졌다. 죄를 간직하고 수치심을 당하고 폐지되어 은호(銀戶)로 삼았었다. 세월이 길고 길지만 특출한 자가 이 수치심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고향을 생각[狐正首岳 여우가 죽을 때 살던 굴쪽으로 머리를 둔다]하랴! 그 의리가 참으로 돈독함에 천후의 은혜가 넓고 두터우며[后命旣優] 국가의 은혜 또한 두터웠다. 아, 나는 알았노라. 이치란 진실로 확장되고 단축된다는 것을 한 사람이 똑똑지 못하여 몇 사람이 굴욕을 받았다든가! 오랜만에 회복되는 데는 이 두 사람의 힘이 컸으니 그 사람의 옳고 그른 것이 혁파되기도 하고 그대로 있기도 한다. 변화를 관찰하려거든 여기에 새긴 글을 보라.” 하였다.
【명환】 본조 채륜(蔡倫).
【인물】 본조 허주(許周) 벼슬이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허조(許稠) 주(周)의 아우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훌륭한 치적을 나타냈다.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는데 , 볍령에 한결 같았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세상에서 어진 정승[賢相]을 일컬을 제는 조(稠)와 황희(黃喜)를 우두머리로 친다. 세종(世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허주(許倜) 조(稠)의 아우. 벼슬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허성(許城) 주(周)의 아들.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공간(恭簡)이다. 허계(許誡) 주(倜)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이르렀다.
본조 윤인후(尹仁厚) 나이 9세에 아버지 상을 당해서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태종조(太宗朝) 때에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허중견(許仲堅) 고을 아전이다. 아버지를 위하여 여막을 짓고 살았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신증』 신휴(申休) 아버지가 병이 나자 항상 똥 맛을 보아 병 증세를 대중했고, 소변을 보지 못하자 빨아서 낫게 했다. 아버지가 죽자 상제 노릇을 극진히 하였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34년에 □□□에 합쳤다 □□□이 쇠잔한 때문이다. 40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숙종(肅宗) 41년에 옛터의 남쪽 5리 되는 천천면(泉天面)으로 읍내를 옮겼다.
【방면】 읍내(邑內) 끝은 5리이다. 북면(北面) 끝은 10리이다. 마양(磨陽) 서쪽 끝은 10리이다. 와촌(瓦村) 동쪽 끝은 10리이다. 중림(中林) 남쪽 끝은 13리이다. 낙산(樂山)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18리이다. 안심(安心) 서쪽으로 처음은 23리이고, 끝은 30리이다. ○ 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은 서쪽으로 12리다. 이지부곡(貍只部曲)은 서쪽으로 8리다. 안심소(安心所)는 일명 명산(明山)이며 팔공산(八公山) 밑에 있다. 즉 안심면이다.
【사원】 금호서원(琴湖書院) 숙종 갑자년에 건립되고, 정종 경술년에 사액되었다. 허조(許稠) 태묘(太廟)에 보라.
[주-D001] 청천(晴川)의 좋은 글귀 : “갠 냇가에 역력하게 보이는 것 한양의 나무요.[晴川歷歷漢陽樹]”라는 것은 당 나라 최호(崔顥)라는 사람의 황학루(黃鶴樓) 시의 구절이요, “떨어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같이 날고.[落霞與孤鶩齊飛]”라는 것은 역시 당 나라 사람 왕발(王勃)의 등왕각(滕王閣) 서의 문구이니, 모두 걸작이라는 명성이 높은 구절이다.
[주-D002] 금기(金氣)는……떠네 : 봄은 나무[木], 여름은 불[火], 가을은 금[金], 겨울은 물[水]이라 하고, 금은 불에 녹으므로 불을 겁낸다. 여름 더위가 한창이면 불의 기운이 왕성한 때이므로 가을인 금이 나올 차례라 하여 머리를 들다가 아직도 불기운이 맹렬하므로 세 번 엎드린다고 한다
.[주-D003] 삼료(參廖) : 송 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선학(禪學)에도 고명하여 여러 선사(禪師)들과 선문답(禪問答)을 하였으나 항상 이겼다. 그러다가 항주의 태수로 가서 그곳 삽수의 지과사(智果寺)에 있는 승(僧) 삼료(參廖)와의 선문답에서 비로소 졌다고 한다.
[주-D004] 다리가……굽네 : 더운 기운에 몸이 녹아서 모두가 노곤해진다는 말이다.
河陽縣
東至永川郡界六里,南至慶山縣界十八里,西至同縣界三十里,北至永川郡界十二里。距京都六百四十二里。
建置沿革
本高麗河州。成宗十四年置刺史。顯宗改今名爲縣,屬慶州府,置監務。本朝例改縣監。
官員 縣監,訓導。各一人。
郡名
河州,花城。
姓氏
本縣 許,玄,諸,兪。金。續。
安心 全,朴,李,崔,申,金,許,魯,荊。
梨旨 李,尹,安。
山川
無落山。在縣西十二里。鎭山。
醮禮山。在縣西二十里。高麗太祖征甄萱于桐藪,登此山祭天,故仍名焉。
公山。在縣西二十里。
屛風巖。在縣西十四里。
南川。在縣南五里。永川郡東京渡下流。
大池。在縣東。
童子池。在縣南。
土産
棗,笠草,鯽魚,銀口魚。
烽燧
匙山烽燧。在縣南七里。東應永川郡城隍堂,南應慶山縣城山。
樓亭
聳碧樓。在東軒東。永樂丙申,縣監宋乙開建。○徐居正詩:“望中飛鳥入雲遙,樓在虛無揷半霄。壯節脩篁千玉槊,纖腰弱柳萬金條。晴川句好今安在?孤鶩才高不用驕。俯仰登臨多少思,半山飛雨又崇朝。”
觀逝亭。在縣南四里。前帶大川,平呑曠野。永樂甲辰,縣監蔡倫建。
學校
鄕校。在縣西三里。
驛院
華陽驛。在縣西七里。
幅掛院。在縣西南十八里。
匙川院。在縣東五里。
佛宇
新林寺。在無落山。○金克己詩:“葦灰吹徂暑,金伏火氣驕。朱氛亘六合,赫赫開新窯。豈唯焫草木?沙石皆煎焦。我非飮露子,安可逃煩歊?況被窮餓火,心頭鎭來燒。鬱蒸何時畢?愁坐不自
聊。靜思滌暑處,歸路寧辭遙?跨驢向異縣,川陸何迢迢!攢江映白練,疊巘森靑瑤。西南一線徑,屈折橫山腰。躡苔訪古寺,嘉境遺塵囂。煙霞滿洞壑,檜柏干雲霄。階前水激激,檻外風蕭蕭。草庵一老褐,方丈依岧嶢。雪猨讓冷格,霜鷺輸淸標。蕙煙細苒苒,花雨輕飄飄。禪心已遺物,未忍忘舊要。從容對榻坐,笑語臨淸飆。氷簟起驚浪,旋敎炎景消。葛巾頭慵整,葵扇手懶搖。幽閑已愜性,未肯迴征鑣。亂蟬紅日夕,殘磬白雲朝。朝吟動竟晝,夕醉恒通宵。全勝蘇學士,霅水對參寥。”
南泰寺。在匙山。○金克己詩:“馬首溪山歷百重,黃昏始到梵王宮。半天怒浪千峯雪,平地驚雷萬竅風。愁坐敗蒲身起,粟快燒枯枿脚彎。弓煩公喚酒同傾,倒凍臉還成爛熳紅。”
祠廟
社稷壇。在縣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縣西三里。
厲壇。在縣北。
古跡
陽良村部曲。在縣西十二里。
貍只部曲。在縣西八里。
安心所。一名明山。在公山下。
陽良院。在古陽良部曲。今廢。
梨旨廢縣。在新寧縣西二十里。本永州梨旨銀所。高麗末陞爲縣,仍屬永州。本朝太祖時來屬。○崔瀣碑:“至元後元年,上護軍安子由等朝京師回,以天后命復駙馬先王,若曰:‘永州梨旨銀所,古爲縣,中以邑子違國命,廢而藉民,稅白金,稱銀所者久。今其土人那壽、也先不花幼宦禁中,積給使勞。以其功,陞鄕貫,復爲縣。’ 於是王敎有司行之如中旨。明年,那壽奉使東歸,爲鄕里榮,以故處庳狹,相地徙居州之西,距故所若干步。置縣司、長吏咸若初。又五年,也先不花函香繼至,謂本縣興復遷徙顚末不可無述,謁嗣王,俾
書之碑。予不得以老辭,則爲之銘,有以警夫觀者焉。那壽官奉議大夫、甄用太監,也先不花官中議大夫、中瑞司丞,姓皆李氏。本國又封那壽信安君,也先不花號永利君,以逮三代,俱得追封。其以子貴,當更受天朝封贈,此在所略。銘曰:若國先君,誕奠東表。隨厥山川,相勢大小。立縣置州,明訓以曉。曰毋減增,命或自剿。維縣梨旨,隸永之州。傳昔邑子,有不自修。擧縣顚覆,帶累承羞。廢爲銀戶,世載悠悠。不有挺然,昭雪者孰?狐正首丘,斯義允篤。后命旣優,國恩孔縟。噫嘻我知!理固盈縮。一夫不慧,受屈幾人?久而能復,賴此二君。惟人善否,惟革惟因。善觀變者,視此刻文。”
名宦
本朝 蔡倫。
人物
本朝 許周。官至判漢城府尹。
許稠。周之弟。登第,所歷有聲績,官至
議政府左議政。法令畫一。諡文敬。世稱賢相,稠與黃喜爲首。配享世宗廟庭。
許倜。稠之弟。官至中樞院副使。
許誠。周之子。官至吏曹判書。諡恭簡。
許誡。倜之子。登第,官至慶州府尹。
孝子
本朝 尹仁厚。年九歲遭父喪,廬於墓側。太宗朝,事聞旌閭。
許仲堅。縣吏也。爲父廬墓。事聞旌閭。
〔新增〕 申休。父得疾,嘗糞以驗生死,小便不通,吮之卽愈。及歿,哀毁盡禮。事聞旌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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