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20)
- 기둥서방 여럿 -
첩만 보는 남편떠나 포목점 연 이월댁 비단도매상 박대인과 거래 텄는데 접대 못해 ‘을’ 설움 톡톡 어느날 이월댁이 잔뜩 치장하고 박대인을 안방으로 모셔…
이월댁은 오늘 밤도 방구들이 깨져라 한숨을 쉰다. 창을 열자 달빛이 하얗게 들어와 금침에 내려앉고 짝을 찾는 풀벌레 소리는 애간장을 녹인다. 서른둘, 농익은 여인은 허벅지를 꼬집어보지만 허사다. 남편이란 게 첩을 둘씩이나 얻어 집엔 아예 발길조차 들여놓지 않는 것이다. 이월댁은 보따리를 쌌다.
사랑방 시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올렸더니 후덕한 시아버지가 꽤나 묵직한 전대를 꺼내 이월댁에게 건넨다. 이월댁은 눈물을 흩뿌리며 시집을 나와 삼십리 밖 친정으로 갔다. 친정살이가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니 올케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월댁은 친정어미의 손을 뿌리치고 집을 나왔다. 그녀는 성큼성큼 한양으로 발길을 옮겼다.
‘남정네만 장사하란 법 있나?’ 시아버지가 준 삼백냥과 친정어미가 준 이백냥, 거기다 시집갈 때 받은 패물을 팔아 이월댁은 종로에 조그만 포목점을 열었다. 상주의 비단 도매상인 박 대인과 거래를 트며 이월댁은 ‘을’의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 이유인즉슨, 종로의 큰 포목점 주인들은 상주에서 박 대인이 올라오면 비단 오백필 육백필을 주문하고는 그날 밤으로 박 대인을 모시고 명월관으로 가 질펀한 주지육림에 퐁당 빠뜨리는 것이다. 이월댁은 기껏해야 오십필 남짓 주문하고 순라길 골목에서 설렁탕 한그릇 대접하는 게 전부였다.
박 대인이 명월관 기생의 머리를 얹어줬다느니 낙원동에 첩 살림을 차렸다느니 하는 잡다한 소문을 듣고 이월댁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다고 박 대인에게 기생을 붙여 잠자리까지 마련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월댁은 가게 뒤에 딸린 살림집 안방을 우아하게 꾸몄다. 자신도 비단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흑단 같은 머리엔 동백기름을 발랐다. 시집살이할 때는 논밭으로 돌아다니느라 새까맣던 손과 얼굴이 이제는 백옥처럼 고와졌다. 그 위에 화려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이월댁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이월댁은 어느 날 박 대인을 자기 살림집 안방으로 모셨다. 그럴듯한 상을 차려놓고 좋은 술을 한잔 올렸다. 비단 거상 박 대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 대인이 물었다. “저기 걸린 족자의 게발 글씨는 누가 쓴 거요?”
“당나라 현종 때 이백과 어깨를 견준 장계의 시를 소첩의 조부께서 초서로 쓰신 겁니다.”
어릴 적 조부로부터 체계적으로 글을 배우고 사군자도 친 그녀가 풍기는 학식은 서당 근처에도 못 가본 박 대인을 움츠러들게 했다. 사십대 중반의 어깨가 떡 벌어진 박 대인은 얼근하게 취해 이월댁 손목을 잡고는 촛불을 끄고 상을 밀었다. 이튿날 박 대인이 금침에서 눈을 뜨자 동창이 밝아오는데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이월댁이 꿀물을 타왔다.
박 대인은 기생 옷을 수없이 벗겨봤지만 이월댁은 달랐다. 이월댁에게 푹 빠졌으나 마음대로 이월댁 안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월댁이 어떤 때는 얼음처럼 냉정해 박 대인의 애를 태웠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박 대인이 말했다. “이월댁, 상주에 있는 내 마누라를 쫓아낼 테니 정실로 들어와줄 수 없겠소?”
이월댁은 박 대인의 어처구니 없는 제의를 받고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됩니다”라고 단칼에 막았다. 갑과 을이 바뀌었다. 이월댁 창고엔 상주 비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다른 포목점이 박 대인에게 비단을 주문하면 이월댁 창고에서 출하된다. 이월댁이 거느린 기둥서방은 박 대인뿐만이 아니다. 안동포 시장을 움켜쥔 권 대인, 한산 세모시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노 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