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42)
*色酒家 주모와 내기<상>
문천에서 달포를 보낸 김삿갓, 어느덧 봄날은 다 가고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김삿갓은 오늘도 북상하는 계절을 등에 두고 자꾸만 북쪽을 향하여 걸어갔다.
얼마를 가다 보니, "色酒家" 라는
稀罕한 간판을 내 건 주막이 있었다.
(색주가? ..美人計를 써서 술꾼들을 많이 불러 모으려고 이러한 간판을 내걸었나? )
김삿갓은 술 생각도 간절했지만 괴상 망측한 술집 이름이 궁금하여, 수중에 돈 한푼 없는 처지이나, 주막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김삿갓이 술청에 들어서자 저쪽에서 손님들과 히히덕거리고 있던 주모가 반갑게 달려온다.
"어서오세요. 손님도 소문을 듣고 우리 집에 '내기'를 하려고 오신 모양이죠? "
마흔을 넘어 보이는 주모는 젊은 계집처럼 얼굴에 분칠을 하고 어린아이들이 입는 綠衣紅裳 차림을 하고 있었다.
주모의 차림은 어느 모로 보나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는데,
김삿갓을 맞으면서 조차, 두렁두렁한 왕방울같은 눈을 가늘게 떠보이며 배시시 웃는 통에 김삿갓은 '움찔' 하며, 여자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삿갓은 미욱한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대꾸했다.
"나 술 한잔 주시오... 나는 아무 소문도 못듣고 지나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이 집에 대해 무슨 특별한 소문이라도 있소? "
주모는 눈을 호들갑스럽게 뜨며,
"우리집 소문이 얼마나 요란스러운데, 손님은 그런 소문도 못듣고 왔다는 말인가요? "
"그러게 말이오. 나는 색주가라는 간판이 稀罕하여 발걸음했지."
그러자 주모는 또다시 호들갑을 떨며 비웃는 듯이 말했다.
"색주가란 '계집과 술이 있는 집'이란 뜻인데, 손님은 그런 뜻도 모르셨나요? 유식한 양반인줄 알았더니 .." 하며 살짝 비꼰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술을 파는 집 치고, 계집이 없는 집이 세상천지에 어디있소? 내가 세상을 두루 遍踏을 하며 수 많은 주막을 전전했지만, 소도둑놈 같은 사내놈이 술을 파는 주막은 본 바가 없소이다."
"그리고 보면 세상의 주막은 모두, 색주가라 할 수가 있을 터가 아니오? 그런데, 이 주막은 술은 있어 보이는데, 계집은 안보이니 어찌된 일이오?" 김삿갓은 짐짓, 주모의 꼴과 하는 말이 괘씸하여 속마음을 '툭' 던져보았다.
그러자 주모 하는 말,
"이보시오 손님! 손님 눈은 눈이 아니고 응가 구멍이오? 나같은 미인을 앞에 두고 계집이 없다 하는 것은 무슨 몰상식한 말씀이오! "
하며 시비조로 나왔다.
"엇! 하하하하... 나는 그대가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인줄 알았지, 설마하니 주모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오, 그대가 이 집 주모였던가? .. 그렇다면 어서 술이나 가져 오라구! "
김삿갓이 너스레를 떨며 이같이 대꾸하자 주모도 조금은 마음이 풀어졌는지 말씨가 상냥하게 변하기는 하였으되, 고개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한다.
"그건 안 돼요. 사전에 약속이 있기 전에는 술을 함부로 내놓을 수 없어요."
"것참, 우습구려. 사전에 약속이 있기 전에는 술을 내올 수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우리 집에서는 술값을 먼저 받고 술을 내오는 첫 번째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먼저 술을 한잔 따라 놓고, 손님과 내가 내기를 해서 손님이 이기면 술을 공짜로 드리지만, 손님이 지게되면, 술 석잔 값을 내놓아야 하는 방법이에요. 손님은 두가지 방법중에 어떤 방법을 택하시겠어요? "
김삿갓은 하찮은 계집과 내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가진 돈이 없으니 공짜 술을 얻어 먹으려면 싫든 좋든 내기에 응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마침 잘 되었다. 내기를 해가지고 공짜 술을 얻어 먹기로 하자. 어떤 내기를 걸어 올지는 모르지만 설마하니 술이나 팔고 있는 돌대가리 같은 계집에게 지기야 하겠는가?)
"별로 까다롭지 않은 내기로군. 아무튼 내기를 할테니까 우선 술이나 한잔 가져 오라구! "
김삿갓이 이렇게 대꾸하자 먼 빛으로 구경을 하던 손님 하나가 김삿갓을 향하여 손을 휘저어 보이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여보시오, 노형! 행여 주모하고 내기하지 마시오. 우리는 멋 모르고 조금전에 내기를 했다가 술은 한잔씩 밖에 못 마시고 여섯 잔 값을 뺏겼다오." 그러는 옆에 앉은 일행인 듯한 다른 사내는 계면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주모는 그 말을 한 손님쪽으로 분노에 찬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을 한다.
"이 못난것들아! 내기에 졌으면 곱게 꺼질 일이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남의 장사에 훼방을 놓는거야? 대갈통을 부숴 버리기 전에 썩 꺼지지 못해! "
주모가 진짜로 대갈통을 부숴버릴 도끼를 들고 나올 것같은 서슬퍼런 소리를 내지르자, 손님들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았다.
김삿갓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제 알고 보니 주모는 선녀가 아니라 주막 깡패로군 그래! "
"그나저나 내가 술을 한잔 먼저 따라 놓고 손님한테 말재주를 부릴테니 손님은 즉석에서 그 말에 어울리는 답구를 해 주셔야 해요. 즉석에서 대답하지 못 하고 어물거리면 지는거예요 .알았죠?"
주모는 내기의 방법을 말해 놓고 술을 가지러 술청에 들어 갔다가 금방 나왔다. "쪼르르..." 술 한잔이 따라졌다.
주모가 따른 술을 김삿갓은 냉큼 집어 쭉 들이켜 버렸다.
"어머! 내기도 하기 전에 술부터 마셔 버리면 어떡해요."
"목이 타올라 못 견디겠는걸 어떡하나. 내기를 하고 나서 술을 마시거나, 술을 마시고 내기를 하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
"그건 그렇지만, 내기에 지게 되면 술값은 틀림없이 석 잔 값을 내야 해요. 아셨죠?"
"어따, 걱정도 팔자일쎄... 어차피 공짜 술을 마시게 될터이니 빨리 내기나 시작하자구."
"길고 짧은 것은 대 보아야 할 테니 단단히 각오하세요."
이윽고 내기를 시작 하는데, 주모는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문제를 말 한다.
"오동나무 열매는 桐實 桐實! 댓귀 말을 하나 말해 보세요."
"내기가 고작 그정도인가? .. 보리 뿌리는 麥根 麥根... 어떤가? "
"어머! 손님은 제법 대답을 잘 하시네요. 그렇다면 오리는 십 리를 가도 오리, 백 리를 가도 오리 ... "
김삿갓은 소리를 내어 웃으며 대꾸했다.
"할미새는 어제 낳아도 할미새, 오늘 낳아도 할미새 ..."
주모는 적잖이 놀래며,
"새 장구는 새 것도 새 장구, 낡은 것도 새 장구 ..."
"북은 동쪽에 있어도 북이요, 서쪽에 있어도 북이라! ..."
김삿갓이 거침없이 대꾸를 하니 주모는 몹시 초조한 빛을 띄며 다음 문제를 말한다.
"槍으로 窓을 찌르니, 그 구멍은 창 槍 구멍인가, 窓 구멍인가? "
"그런 얘기는 얼마든 많네 ..눈 (雪)이 눈 (眼)에 들어가 눈물이 나오니, 그 눈물은 눈(雪) 물이라 할 것인가, 눈 (眼) 물이라 할 것인가? 주모의 대답을 듣고 싶네!"
"아이구 엄마야! ... 내가 아직도 한 번도 져 본 일이 없는데 , 손님에겐 못 당하겠네."
김삿갓이 막힘 없이 힘들이지 않고 대답을 해대니 주모가 손을 번쩍 들며 졌다고 고백한다.
"사람이 솔직해서 좋군 그래... 헌데, 나는 아직도 술을 한잔 더 마시고 싶은데, 내기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
"정말이예요? "
"물론이지."
"그럼 이번에는 문제를 바꿔 漢詩 짝 맞추기 내기를 할까요? "
"한시 짝 맞추기를? ...주모가 한시도 알고 있단 말인가? "
"이 양반이..
사람을 뭘로 보고 말하는거예요! 내가 이래 뵈도, 서당에서 삼년 동안 부엌떼기 노릇을 하는 통에 白首文을 통째로 외울 수도 있는걸요."
"재구삼년에 능풍월(齋狗三年 能風月),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더니, 주모가 "딱" 그 격 일쎄, 허나 백수문을 통째로 외운다고 해도, 한시까지 잘 할 수는 없을텐데 ..."
"애고, 내 걱정을 마시고 손님 걱정이나 하시오."
주모는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제법 당당하게 나온다.
김삿갓은 웃으며 말했다.
"좋소! 우선 술이나 한잔 더 따르고 ..."
주모는 술 한잔을 또 따랐다.
김삿갓이 술 잔을 들고 마시는 사이, 주모는 어디선가 종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나타났다.
"한시 짝 맞추기 내기의 문제가 이 두루마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