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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문장력으로 가꾼 마음 밭-김덕임 ≪운 좋은 방아깨비≫(정원의 서, 2019)
方 旻
1. 작가를 만나다
김덕임 작가를 처음 본 것은 에세이문학 사무실에서 발송 작업하면서다. 여럿이 어울려 작업하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발송할 때면 그녀가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꼭 동반하는 물건이 있다. 여러 종류 과일주를 번갈아 페트병에 담아와 식사자리에 내민다. 수원에서 오는 것도 힘들 텐데, 가양주까지 챙겨오는 그 마음씨가 고와 보였다. 수필에 대한 열정과 잡지사에 대한 후원은 이 선량한 마음 바탕을 돋보이게 했고, 잔잔한 여인은 삶의 속내를 이미 ≪심껏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겨≫에 담아놓은 바 있다. 두 번째 수필집을 들고 우리 앞에 잘 빚은 술 한 잔 권하듯이 펼쳐 보인다. 이제는 용인 봉무리 마을에 아담한 전원주택을 지어 삶터를 옮겨 가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그간 마신 술빚을 두 번째 수필집 ≪운 좋은 방아깨비≫에 대한 소소한 감상으로 갚고자 한다.
2. 문장이 웃는다
모든 글은 문장력이 좌우한다. 수필 역시 마찬가지다. 《운 좋은 방아깨비》에서 제일 두드러지는 건 빛나는 문장이다. 마치 모든 한국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장맛이듯, 그녀 글에서는 노련한 요리사처럼 장맛으로 간을 한 문장이 자리 잡는다. 문장력에서 으뜸으로 치는 맛은 간결성이다. 길이가 짧거나 사용한 단어 수가 적거나 문장 구조가 간단한 문장이 간결하다. 이 문장의 첫째 명제를 그녀는 철저하게 지켜낸다. 간결함의 절정은 단어 하나나 서술어 하나로 만들어내는 문장이다. 이것을 그녀 글에서는 쉽게 마주친다. 이 책의 첫 작품인 <호미병원에서>의 첫 문단 첫 문장은 “온몸이 벌겋다.”이고, 끝 작품인 <텃밭에서>의 첫 문단 첫 문장은 “동이 튼다.”이다. 주어와 서술어, 단 두 단어로 한 문장을 만들고, 작품 한 편을 시작한다. 둘 째 문단에선 “강자끼리 겨루는 힘의 꼭짓점. 아니다.”로 명사형 종결과 부정 서술어 단어만으로 한 문장을 완성한다. <텃밭에서>에선 “생명의 소리다.”는 주어도 없이 관형사와 명사 서술형뿐이다. 보통의 경우엔 이 앞에 ‘그것은’의 지시 대명사로 주어를 쓴다. 앞 문장의 “빗소리는 그냥 어떤 소리가 아니다.”에 이어지니 주어를 공유하면서 서술어만 써 연결 문장을 만든다. 이것은 간결한 문장을 쓰고자 하여 그리 한 터일 것. 그녀가 얼마나 문장의 간결성을 의식하는지를 알맞추 입증한다. 이 간결성은 그녀 문장력의 기본 베이스로 작용한다. 이처럼 간결하게 쓰는 것이 문장력의 제1장 제1과이지만 아무나 이렇게 쓰지 못한다. 문장은 많은 단어를 사용해서 길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이란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마추어나 풋내기 작가만이 아니라 기성 유명 작가들도 좋은 문장에 대한 오인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요리를 못하는 사람일수록 양념을 많이 치는 경우와 닮았다. 깔끔한 맛을 내려면 양념 종류도 양도 적을수록 좋아야 하듯 문장 역시 그렇다. 이점을 김 작가의 글에서 만나는 것은 아주 반갑다.
두 번째로 그녀 문장이 갖는 강점은 참신한 표현에서 찾게 한다. 생생한 비유는 그녀 문장을 색다르게 한다. 호미를 “말기 암 환자”나 “매품 팔던 흥부처럼 널브러진”사람으로 의인화한다. 이 의인화는 그녀가 즐겨 쓰는 비유법 중의 하나다. 생생한 비유 중에는 농촌에서 자라며 배양된 감수성에서 자연스럽게 빚어지는 토속성이 참신성을 더한다. 종교적 비유, 독서 체험적 비유, 주부 가정 생활적 비유, 손주, 세태 비판 등을 자주 쓴다. 보기를 들어보자.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마음”(<삼익피아노>에서) “흙의 마술사”, “이외수 작가는 그의 글에서”(<소신공양>에서), “고등학교 교사인데 서른 살 청년”, “소신공양”, “해거름에 딸의 손에 붙잡혀 온 손녀”, “국민이 ‘죄 있다’고 아우성쳐도”,“새벽 기도실에 경건하게 엎드린 성도들”, “빨래 치대는 박자에 맞춰”, “국수 공장 뒷마당”(<러닝셔츠>에서), “솔가지 끝에 피던 송홧가루가 송판에 버무러진 듯”, “능선에 걸린 햇덩이가 왈칵 쏟아낸 노을빛”, “솔잎 끝에 맺힌 이슬만큼도”(<도마>에서). 다음 그녀 문장에선 다채로운 어휘 경연장을 보는 듯이 낯선 단어가 꽤 자주 등장한다. 필자가 모르는 낱말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녀의 어휘 창고는 만석꾼의 뒤주에 담긴 쌀 마냥 넘치고 넘친다. 어떻게 그 풍부한 단어를 쌓아두고 적재적소에 가져다 쓰는지 못내 궁금하고 신기하다. 다채로운 도구를 사용한 요리이니 그녀가 쓴 문장을 읽는 재미는 맛난 음식으로 배가 터지도록 불러도 당기는 입맛을 제어할 수 없는 듯 풍요롭기만 하다. 그만큼 그녀 문장은 수필집 전반에서 빛난다.
3. 삶이 빛난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그녀 삶은 40년 차 주부로서 살아가는 일상과 남편과 네 딸, 외손주들, 시댁과 관련한 가족생활이 주요 제재다. 여기에 근년에 주거지를 전원으로 옮겨 간 전후 생활 이야기, 일반 주부로서는 흔치 않은 세태에 대한 관심이 그 다음 관심 대상이다. 거기에 한 인간 생명체로서 사소한 존재에 관한 인간적 관심과 그 사유와 감정을 펼친 글이 이 책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류 수필가의 대종을 이루는 가족생활과 주부로서 자잘한 일상사 이야기는 수필집마다 대동소이하다. 작가가 자리한 삶과 가족 구성원 차이에서 벌어지는 스펙트럼이 제 각각인 이야기는 다른 수필가 글에서도 흔하게 마주친다. 제재면 개성은 여류 주부 수필가에게 흔치 않는 세태에 대한 관심사다. 아파트 생활이 한국인 대다수가 영위하는 주거 생활인 점에서 보면 이와 다른 전원생활에서 마주치는 이러저러한 삶의 풍경이다. 그럼 이중에서 주목할 바의 소위 세태를 관찰하고 사유한 면면을 먼저 돌아보기로 한다.
그녀는 <보따리>에서, 벌인 사업이 앵돌아져 개업 한 달 만에 보따리 싸는 부부에 대한 안쓰러움을 담는다. 세상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을 읽는다. <저승 가는 길>에서는 교통사고를 염려하는 보편적 인간애를 보인다. <쪼개진 두 마음>에선 사회와 국가 간의 갈등 문제를 다룬다. 독일인의 진정한 참회와 일본의 파렴치한 왜곡을 비교하면서 자성하기도 한다. <마루타>는 일본인의 전쟁 범죄를 간접 고발하면서도 국가 안보에 대한 의식을 곧추 세워보기도 한다. <절규>는 ‘세월호’ 비극 사건에 대한 포괄적 죄의식을 표명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졸혼>은 노년 부부의 한 변화하는 세태에 대한 작가 의식을 보이며 세상사에 대한 관심 촉수를 각성시키고 있다. <절령지연>에선 미국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흠모의 일단을 피력하고 있다. 지도자의 참다운 도량에 관한 기대감을 다른 나라의 예로써 귀감을 제시한다. <빨대 없는 사회>는 청년 실업에 관한 오늘 날 화두를 다루며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는 모성의 진정성을 보인다. <몽골 청년>에서 작가는 한국에 온 이국 노동자를 보고 그의 미래를 축원하는 따스한 희망가를 부르고 있다. 이러한 글의 공통점은 여성다운 온화하고 다스한 모정을 가진 눈으로 보는 것이다. 결코 비관적이거나 분노하지 않고 어려움을 견디고 넘어서길, 풍요롭고 따스한 미래가 펼쳐지길 기원하고 희망을 품는 휴머니즘 말이다.
다음은 전원생활의 색다른 생활 수필을 보자. 도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직접 짓고 옮겨간 용인 봉무리에서 달라진 삶의 소품들을 펼쳐 보인다. 전원생활은 남성 은퇴자의 버켓리스트 중 하나인데, 실제 현실로 옮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실행하기 어려운 것은 대체로 부인의 동의를 얻어내기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도 그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일부 남성이 이른바 ‘자연인’으로 불리는 독거 생활에 나선다. 이런 시류를 감안하면 김덕임 작가 부부는 다소 특별하다. 이 전원생활을 남편보다 작가가 더 원하고 실제로 즐기며 살고 있는 것처럼 글에서 드러나니 말이다. 특히 이것은 <장독대>나 <모로 가도 서울로 간, 굴뚝>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왜 그녀가 전원에서 생활하기를 남편보다 더 소망했는지를 이 장독대 사랑에서 확인한다. 튼실한 주부에겐 항아리에 대한 애착은 주방 관리의 기본 마음이다. 한국 요리의 핵심 양념인 장을 담아두는 용기로 우리 오지 항아리만한 게 사실 없다. 때문에 항아리 사랑과 관심 정도만 보아도 그녀 음식 솜씨는 알 만하다. 그런 이에겐 아파트의 감질 나는 베란다 장독대는 늘 불만덩어리였을 것이다. 낚시꾼에게 낚싯대처럼 소중하고 야구 선수에겐 배트만큼 자신과 일체로 느끼는 게 바로 항아리요, 그것을 잘 건사할 수 있는 장독대를 갖추는 것은 무엇보다 소원하는 일이다. 어쩌면 그 소망 때문에라도 전원주택을 원했을 터. 그 열정에서 비롯한 야외 화덕에 가마솥을 걸기 위한 그녀의 고군분투를 보자면 전원생활 욕구는 남편보다 당연히 윗길로 보인다.
이와 함께 텃밭에서 움트는 채소를 기르는 기쁨과 놀라움을 자랑한 <상추밭에서>, <쪽파밭>, <텃밭에서>는 단순히 식물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어울리는 공생하는 미물에 대한 따스한 시선까지도 담아낸다(<방아깨비>). 물론 인간 생존을 위한 그 먹거리 마련을 위해서 불가피한 살생과 배반 행위는 먹이 피라미드 원리라서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재미로나 장난으로는 결코 그리하지 않고, 그러한 피치 못한 행위에도 일말의 미안한 마음과 죄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이 모든 것을 온 가슴 가득 받아들이며 사는 그녀는 행복하다. 더욱이 그런 생활을 외손주와 딸과 함께 나눌 수 있어 행복감은 배가된다. 그러므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생활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이 창호지에 은근하게 비쳐드는 그믐달빛 비치듯 우련하게 드러난다(<봉무리 망고>). 숨기고 싶지도 않지만 숨길 수 없는 만족한 삶의 모습이라서 그녀도 어찌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에 둘러싸여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자연스러움이기에 어찌 달리 해볼 도리는 없다.
4. 생각이 곱다
주부로 한 가족 살림 전반을 책임져 왔다. 육남매 막내로 성장하여 팔남매 맏며느리가 되어 40여년을 대가족 주부로서 감당한 막중한 일은 <심껏 살다 보면 좋은 끝이 올겨>의 시모님의 말씀처럼 그녀에게 현실이 되었다. 맏며느리로서 힘껏 살아왔고, 그런 과정에 글도 써 두 번째 수필집을 내기에 이른 것이니 진정 ‘좋은 끝’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가장 많은 편수의 글은 당연히 맏며느리로서 일상과 네 딸을 낳고 키운 어머니로서의 삶이 주요한 이야깃거리다. 자잘한 내용 편 편을 소개하거나 들여다보기보다는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는 김 작가의 개성적 특성을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그녀가 이룬 수필 문학 성취를 바르게 매기는 일이 될 것이다. 이에 몇 가지를 찾아보기로 한다.
첫째는 맑은 품성의 인정미 넘치는 진실한 캐릭터를 만난다. 작가 곧 화자 심성은 맑다. 시어머니가 쓰던 호미에서도 “깨진 자루를 손에 쥐면 어머니의 온기가 배어나는 듯”함을 느낄 만큼 마음이 맑다. 호미를 통해서 어머니의 삶을 추정하고 그 온기를 느끼는 인정미를 보여준다. 농기구일 뿐인 “날이 방석니처럼 무뎌지고 자루까지 금이 간” 호미에서 어머니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본 대장간과 친정아버지를 떠올린다. 호미는 그녀에게 단순한 쇠붙이가 아닌 과거 인물과 삶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요, 분신이다. 글의 제목이 대장간이 아닌 “호미 병원”인 이유다.
둘째는 생활의 작은 단편에서 따스한 삶의 가치를 길어 올린다. 피아노를 화자로 내세워 집안의 음악 생활을 돌아본 <삼익 피아노>는 “종착역이 가까워진 듯, 몸 여기저기서 신호가 오”는 “31년” 된 피아노는 그 눈에 할머니로 보이는 작가를 두고도 “긴 세월 직장 생활하느라, 대가족 수발을 드느라 얼마나 혹사당해 왔는가?”라고 피아노 객체 시각으로 작가 심정을 드러낸다. 남의 입을 빌어서 자신의 속내를 말하는 이런 방식은 수필가들이 즐겨 쓰는 방식의 하나로 알레고리, 또는 우화이다. 의인화와 일인칭 화자 시각을 교합하여 남 이야기하듯 자신의 속마음을 에둘러 드러낸다. 거울 보면서 자기 실상을 파악하고 돌아보며 자성하는 방식의 변형이다. 이런 다소 낯익은 방식으로 피아노와 함께 한 가족사를 드러내면서 작가의 희망 하나를 슬쩍 내민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손주들의 시냇물 같은 동요가 어우러져 흐를 날을 기대”하는 심정을 표현한다. 주 사용자가 떠난 피아노에서 미래의 쓸모와 가족애의 실현재로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버려진 피아노에서 재활용의 가치를 찾아내는 그녀의 눈매는 그 바탕에 가족애의 따스한 마음을 읽게 한다.
셋째는 생명을 존중하고 각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려 노력한다. 쇠붙이인 호미에서도 온기를 찾아내는 눈은 ‘박하지게’의 간장게장 재료를 색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박하지게의 독백으로 그 입장을 대변하는 작가의 시각엔 모든 생명체의 존엄성을 담는다. 생명 존엄에 대한 그의 시각은 먹이 피라미드의 엄혹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피해자 입장에서 생사 의미를 찾으려 한다. 결국 작가 생사관이 자연스럽게 결말로 등장한다. “삶과 죽음이란 손 맞잡고 돌아가는 하나”라거나, 아침에 죽은 하루살이와 저녁에 먹힌 하루살이 사이의 생의 차이는 무얼까, 의문을 품는다. 결국 죽음 앞엔 그 생의 길이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사관 일단을 드러낸다. 죽음이란 엄정한 철리 앞에 일찍 가고 좀 더 늦게 가는 것의 참다운 차이는 없다고 본다. 서로 먹이가 되는 순환 섭리 앞에서 살려고 아등바등 대는 박하지게를 통해서 삶의 궁극적 의미를 묻고 있다.
넷째는 언제라도 자성의 끈을 놓지 않고 인간 성숙을 지향한다. 수필의 한 특성인 작가의 자기 성찰은 이 작가에게서도 풍성하다. “나도 천국의 문 앞에서 심판대에 설 때가 있을까?”라는 죽음에 대한 것과 함께 “이승에서 육신이 다 닳도록 검불 같은 업(業)을 쌓았지만, 죄인 쪽에 던져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는 참회를 보이기도 한다(<러닝셔츠>). <도마>에선 “주부라는 권력으로 거침없이 살생을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반성도 하고, “삶이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임을 깨닫기도 한다(<스물두 살 화장대>).
5. 솜씨 자랑이 넘친다
누구라도 솜씨가 좋으면 자랑하고 싶은 법. 그녀의 자랑 품목을 보면, 첫째 어휘력이 풍부한 것과 연결된 단어를 자랑하는 비유법 문장이다. 그녀 글에서 보는 비유는 참신한 것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 능력이 보약이 되는 정도를 넘어서 간혹 독으로 작용한다. 일단의 비유 과잉 문장을 만나는 경우다. 참신한 비유법을 사용하면서도 수식이 과다한 문장은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인 셈이다. 아무리 좋고 맛나는 조미료라도 적당량을 사용해야 원 음식 재료의 맛을 살린 먹기 좋은 음식이 된다. 글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많은 문장 전문가는 수식어를 적게 쓰기를 권한다. 고쳐 말해 조미료를 적게 또는 안 쓰고서 맛을 내는 것이 진정한 요리 고수이듯, 문장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적은 수식어 즉 비유한 문장의 적절한 사용이 중요하다.
“여고 동창생의 딸 결혼식에 갔다. 싸리 울타리에 열린 애호박 같던 친구들의 얼굴엔 세월의 그림자가 실개천처럼 주름져 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걸어온 천차만별의 세월을 얼굴에 그려내는 것 같다.”(<홀로 밥상>에서, 밑줄 필자, 이하 동일)
“밤새 서성이던 십만억토(十萬億土:마음이 돌아다니는 거리)를 접고, 눈시울에 달라붙는 달치근한 새벽잠도 털어내며 일터로 뛰었을 것이다. 낙타 같은 청년,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품고 온 큰 꿈을 이루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드넓은 초원에 목화꽃 같은 게르(몽골족의 집)도 짓고, 별들이 콩자갈처럼 깔려있는 바다 같은 몽골의 밤하늘, 거기에 밤이 멎도록 끝이 없는 낚싯대를 드리워도 좋으리라.”(<몽골 청년>에서)
“틀어 올린 머릿결은 먹물에 담갔다 꺼낸 듯하고, 얼굴은 뭉친 청국장 덩어리처럼 동글납작했다. 자녀들을 포대기로 키웠음직한 시장통 아낙네들이 신기한 듯이 모두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포대기>에서)
물론 음식 맛에서도 사람 따라 미각이 다르듯 이러한 수식어를 사용한 비유 표현도 각자 문장 감각 기준에 따라 선호가 다를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필자의 문장 감각 기준으로 지적하는 것이고, 그것은 얼마든지 다른 기준과 평가도 있을 수 있다. 혹시 이런 지적에 대한 작가의 다른 견해 역시 타당하다는 점도 아울러 덧붙인다. 어느 글이거나 이런 기준에서 보면 해당하는 것이 적잖다. 관점에 따라 이것은 이 작가의 개성적 장점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는 이의 과도한 사용에 대해 적정한 정도를 지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약도 과용하면 탈이 나고, 좋은 말도 많이 들으면 식상한다는 점, 물론 50편을 각각 따로 읽을 때와 다르게, 한 책으로 모아 읽으니 이런 것을 찾게 되는 면도 없잖아 있다. 이것 또한 작가가 이런 필자의 지적을 수용하기 어려운 타당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둘째는 독서 체험 지식 자랑이다. “장자는 인간은 다른 자연 대상과 동등한 존재라고 했는지”(<텃밭에서>에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동생 야곱에게 넘겨준 성경에서처럼”(<동서의 향기>에서), “김주영 작가의 「객주」에 나오는 보부상 생각이 난다”(<단감>에서), “조선시대 선비 송순의 시조가 떠오른다.”(<정년퇴임>에서), “중국의 고승 일여(一如)는 인간이 물리쳐야 할 오욕”(<은혜를 갚는 중>에서). 이런 넘치는 지식을 바탕 삼아 쓴 글로는 <치앙마이 안마>와 <쪼개진 두 마음>인데, 모두 그녀의 지적 탐구에서 나온 작품이고, <마루타>, <절령지연>, <졸혼> 등 역시 그렇다. 김덕임 그녀는 “오랜 세월 한학을 공부했고, 서당 훈장님”(<가보>에서)인 분을 아버지로 두었다. 이런 지적 탐구심은 바로 유전으로 내림한 것이 그 연원이라 짐작한다. 그런데 지나쳐 단점으로도 보이지만 어떤 면은 그녀 수필을 보다 지성적이게 만드는 자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결국엔 세태를 비판하고 관찰하는 근원 지력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아가 작가 체험에 바탕을 둔 수필은 각자 솜씨로 차리는 집밥이다. 집밥에는 상점에서 사온 가공식품을 많이 쓰는 것은 좋지 않다. 수필에서 타인 책의 지식을 자주 인용하는 것은 집밥 식탁에 가공식품을 올려 꾸미는 것과 같다. 어쩔 수없이 올려야 한다면 최소화 할 일이다.
셋째는 많은 음식을 차려 내고 싶은 주부다운 요리 품목 자랑이다. 하면 이것이 작품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지도 함께 돌아보자. 문제는 글의 연결을 해치거나 맥락이 부족한 이야기를 한 편 글에 담게 되는 결과를 낳아 결국 글의 주제 통합성과 응집성을 저해한다. 김 작가는 생활 체험의 양만으로 헤아리면 맏며느리 주부 생활이 40년이고, 글에 언급하는 것으로 보면 그간 나름 많은 독서량이 들여다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글에서 할 얘기가 많은 편이다. 일부 작가와 달리 쓸 게 없어서 못 쓰는 일은 드물다. 또한 전원생활을 하면서 “밤새 키보드를 두들”기는 열정을 보인다. “살아온 내력”과 “독백적 성찰”과 “소유요의 등산로” 같은 글을 쓴다. “숨구멍이 뚫어지는 희열”과 “응어리가 풀어지고 남다른 카타르시스의 맛도 느끼”(<책머리에>에서)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과다한 분량을 한 편에 담는 결과로 이어진다. 비유컨대, 요리 솜씨가 좋다보니 무슨 음식이든 잘 하고 다할 수 있어 기회가 닿아 친지에게 대접할 일이 있으면 상다리가 넘치도록 요리를 뽐내고 싶어 한다.
이런 상차림 앞에 손이 앉으면 반응은 대개 다음 몇 가지 정도일 것이다. 첫째 언제 이렇게 많은 음식을 했는지 그 능력과 열정에 우선 놀랄 것이다. 다음엔 나를 위해서 정성을 다했으니 고맙고 반갑다. 너의 마음에 내가 무엇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음엔 이렇게 정성들여 많은 것을 차린 것을 생각하면 모두 맛보고 배가 터질지언정 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걸 언제 어떻게 다 먹지 하는 걱정이 들 것이다. 그밖에는 사람에 따라 이와 다른 반응도 얼마든지 있을 테지만 글과 관련하여 이 정도로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반응은 한 편 글에 어떻게 이 많은 얘기를 담아 글로 썼을지 놀라운 필력을 부러워하거나 시샘할 것이다. 다음엔 그 정성에 대해선 한 작품에서 많은 것을 원하는 독자는 충분히 이것저것 얻을 수 있으니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작가의 글에 대한 열정을 존중할 게다. 끝의 근심은 독자의 수용 한계를 초과하여 부담을 느끼거나 거북해할 것이다. 필자는 이 중 마지막 문제를 말하고자 한다. 수많은 독자가 있고 여러 방식의 글이 있으니 이처럼 제시한 반응과 이에 덧붙일 말 또한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상의 크기와 사람의 식사량에 맞게 음식 종류와 양을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수필은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혼밥’이고 집밥 상차림이다. 식사량이 사람마다 차이가 많아 정확한 기준을 정할 수는 없지만, 편의점에서 파는 가공 음식은 대개 일인 분량 기준을 정한다. 꼭 이와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수는 있다. 즉 수필 한 편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 양은 일인분을 요구한다. 이는 글자 수 몇 자라는 물리적 산술량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주제로만 묶일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김 작가의 글은 이 글 주제가 무엇인지 막연한 경우가 더러 있고, 이런 내용은 작품 주제 맥락과 거리가 먼데 하는 작품도 종종 만난다. 그럼 몇 실례를 보며 확인해 보기로 하자.
<보따리>에서 보면, 이 글은 개업한 지 한 달 만에 폐업한 부부의 심정에 공감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펼치는 글이다. 즉 실패한 보따리 이야기가 이 글의 맥락으로 이어져야 한다. 예컨대 국가적인 보따리를 한 때 쌌던 ‘1998년 IMF’는 주제 맥락과 어울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와 다른 “정겹고 아름다운 추억거리의 보따리” 이야기를 두 문단이나 차려낸다. 사업에 망해서 싸는 슬프고 가슴 아픈 보따리와는 전혀 맥락이 통합되지 않는 별 개로 오직 ‘보따리’라는 사물은 같을망정 이 글에서 ‘보따리’가 담는 의미와는 상충된다. 거기에 보따리는 “고를 내서 묶어야 한다”는 “보따리 철학”까지 내미는 것은 글이 도달할 주제 갈피를 헷갈리게 한다. <은혜를 갚는 중>에서도 자녀의 용돈이 주요 제재인데, 네 딸이 용돈을 주면서 ‘은혜 갚는 중’을 언급하며 “자식자랑 팔불출”을 표명하는 글이다. 왜 이런 따스하고 환한 분위기 글에서 “유명인사에서 말단공무원까지” “갖가지 검은 봉투 이야기”를 글에 담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마치 우리 풍속에서 경사를 맞거나 맞을 집에서는 다른 집 상가에 가지 않거나 그런 소식을 듣는 일까지 꺼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글에서 외형상 봉투는 같지만 둘은 서로 의미와 쓰임새가 다르니 함께 어울리게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저승 가는 길>, <1566-7924>, <상추밭에서>도 만난다.
6. 다시 보고 싶다
어느 수필가보다 신선한 비유 문장으로 정감어린 수필을 쓰고 있는 김덕임 작가가 소망하는 대로 전원에서 “끝없이 용서하는 어머니 같은 흙살에 마음껏 스킨십하”면서, “글 고기도 한 마리씩 낚아 올리는” 삶을 지속하길 바란다. 이 바람은 그동안 마셔온 가양주의 한 잔 값에도 못 미치는 기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가족 맏며느리 주부와 직장인으로서 40여년 살아온 지난 삶을 글로 담은 이 《운 좋은 방아깨비》의 방아깨비처럼 ‘운 좋은 나날’을 살고, 그걸 다시 또 수필 상에 차려내 전원생활의 참맛 일부라도 냄새 맡고 곁눈질 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기 기대한다. 앞에서 말했듯 글은 문장력으로 승부하는 세계다. 이미 문장력 요체를 깨닫고 잘 부리고 있는 작가가 그 빛나는 솜씨를 알맞게 써가며 “심껏 살아”, “좋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삶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그러면서 그 끝자락을 아름다운 문장력으로 건져 올려 맛나게 끓여내 수필 독자 식탁에 자주 올려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해서 그다지 머지않은 시기에 김 작가의 세 번째 수필집을 만나보고 싶은 것은 필자만의 기다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