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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대학의 정문에서 다소 거리를 두고 흐르던 제기천을 사람들은 세느강으로, 그리고 그것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를 미라보다리라고 불렀다. 그러한 명칭의 연원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의 시에서 그 이름을 빌어온 것이라 여겨진다. 제기천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막걸리 가게들이 당시 우리들의 주요 아지트였다. 누군가의 생일이면, 그것을 빌미로 주인공에게 선물로 줄 시집이나 소설책 한 권씩 들고 그곳을 찾아 막걸리를 마셔대곤 했다. 지금은 까마득한 추억이 되었지만, 문득 이 책에 소개된 ‘미라보다리’를 읽다 보니 과거의 추억이 소환되었던 것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다리’ 중 1~2연)
생각해 보니, 국문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이 시를 비롯해서 외국 시인들의 시를 읽어본 것이 정말 오랜만이다. 간혹 누군가의 책이나 검색을 통해서 찾아보기는 했지만,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많은 시인들의 시와 그들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 것이다. 시인인 저자 본인의 시를 비롯하여 일부 국내 문인들의 작품도 수록되어 있지만, 대다수가 외국 시인들의 작품이었다. 아마도 이 시들은 저자가 애창하는 작품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책에서는 시를 소개하고, 그 시를 쓴 시인과 창작 배경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해설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폴리네르의 ‘미라보다리’가 시인의 연인이었던 마리 로랑생과의 가슴 아픈 이별의 회한을 담아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 시절 종종 외우곤 했던 이 시가 당시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분명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문학도로서 시와 문학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주류(酒類)의 세계에 탐닉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소개한 시들에 대해 창작 배경을 비롯한 다양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책 제목의 일부인 ‘사랑을 놓고 살았다’라는 문구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주로 ‘사랑’과 관련된 사연과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친절한 설명으로 인해 작품에 대해서 보다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시를 읽을 때, 시인의 창작 의도와는 다르게 읽어내기도 한다. 예컨대 앞에서 소개한 ‘미라보다리’는 시인과 연인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작품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대학 시절 치기어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또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시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딱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시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동안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저자가 이끌어가는 대로 시의 세계에 젖어들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모두 4부로 나누어 모두 48편의 다양한 시인의 작품을 제시하고, 각각의 시와 시인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작품의 창작 배경을 포함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1부 ‘유일한 사랑 &영원한 사랑’에서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비롯해 12편의 시를 각각 ‘사랑’, ‘인생’, ‘여백’이라는 소주제로 묶어 논하고 있다. ‘사랑’과 ‘인생’과 ‘여백’이라는 소주제는 이 책에서 일관된 분류로 사용되고 있다. 소개된 작품들은 모두 시인의 '유일한' 또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다양한 사연들을 품고 있었다. 1부에서는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떠올리게 되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작품도 ‘다음 날을 위해서 남겨 두었던 한 갈래 길’이라는 항목으로 소개하였다. 이처럼 각각의 작품들은 다시 그 성격에 걸맞은 내용의 소제목을 통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2부는 ‘격정적 사랑 & 비운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12편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독일 시인 릴케의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라는 작품이 루 살로메와의 격정적인 사랑을 담고 있으며, 그가 백혈병으로 죽었고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마도 누구든지 살면서 한번쯤은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음직 하다. 때로는 자신이 겪었던 사랑이 '비운의 사랑'이었다고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소개된 작품들을 통해 시인이 겪었던 사연들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면서, 그것을 작품 해석에 곁들여 풀어내고 있다. 이 항목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의 시 ‘발왕산에 가보셨나요’의 창작 동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산 정상의 전망대 식당에서 마주친 앙증맞은 초등학생의 글 하나를 통해, 우리네 인생에서 ‘겸손’의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그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제목에는 ‘높은 곳에서는 누구나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저자의 희망을 담고 있었다.
다음으로 3부에서는 ‘금지된 사랑 & 위험한 사랑’, 그리고 마지막 4부에서는 ‘첫사랑 & 마지막 사랑’이라는 항목으로 각각 12편의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미 소설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우리는 '금지되' 혹은 '위험한' 사랑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 상대가 본인이라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면 항상 애틋한 마음일 터이고,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기를 바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사랑의 의미에 곁들여 작품에 담긴 사연을 읽으면서, 뛰어난 작품을 일컬어 절창(絶唱)이라고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책의 후반부인 이 항목들에서는 한국 시인들의 작품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나에게는 보다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3행의 형식에 각각 ‘5/7/5’음절로 구성된 일본의 정형시인 하이쿠(俳句)를 소개하면서 그 장르적 특징을 설명한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시를 좋아하지만 한동안 ‘시를 놓고 살았’던 나에게, 이 책은 시를 통해 다시금 ‘사랑’의 의미를 떠올리게 했다. 하여 적어도 나에게는 저자가 의도한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했던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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