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속담이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온 일이 허사가 되는 경우를 말한다. 흔히 ‘도로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이때의 ‘도로’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뜻 인줄 알고 있었는데 ‘도로(徒勞)’ 즉 아무런 결과 없이 애만 쓰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자로 ‘十年工夫徒勞阿彌陀佛(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 이라고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외국어에 참 소질이 없다. 중학교삼년 고등학교삼년 대학교사년 이렇게 꼬박 십년을 영어에 매달렸어도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만 것만 봐도 소질 없음이 명백하게 증명이 된다.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커피가‘나오시고’ 피자는 ‘만이천원 되시고’ 짜장면은 ‘오천 원이신’ 세상이다. 첫돌이 지나면서부터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서른 안팎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존칭어를 개념 없이 쓰는걸 보면 ‘평생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라는 자괴감(自愧感)이 들기도 한다.
본명(潛잠)보다 자(淵明연명)가 더 잘 알려진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이 사시(四時)에서 겨울을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이라고 노래하였다. 외국어 실력이 도로 아미타불이 된 나에게 한문(漢文)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다.
‘겨울고개에 빼어난 소나무가 외롭다’고 해야 하는지 ‘겨울고개에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다’고해야 하는지 처음 사시(四時)를 접했을 때부터 난감했었는데 지금도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처럼 여름 구름이 많은 건지(夏雲多) 기이한 봉우리가 많은 건지(多奇峰) 그저 두루뭉수리로 넘어가고 있다.
11월 하순이다. 내가 정해놓은 계절은 아직까지 가을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을을 9월부터 11월까지로, 겨울은 12월에서 2월까지로 정해놓고 있다. 따라서 9월 더위가 더 짜증스럽고 3월 추위가 더 모질게 느껴지고 억울한 생각까지 든다.
중부지방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덩달아 남부지방도 올가을 들어 가장추울 거라고 한다. 11월도 아직 한 자락 남았는데 가을은 야반도주를 하고 겨울은 지름길로 들이닥치고 있다.
스승의 의미와 함께 정신적인 지주나 닮고 싶은 사람을 요즘말로‘멘토’ 라고 한다. 초등학교 3,4학년 때 나의 멘토는 화랑관창(花郞官昌)이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결사대와 대적할 때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세 번이나 사로잡히고 마침내 말안장에 목만 매달려 돌아온 관창은 어린 시절 나의영웅이었던 것이다. 6학년 때부터 멘토는 읍내에서 왕자미륵이란 영화를 본 이후 ‘미륵왕자(弓裔궁예)’ 로 바뀌었고 그 뒤로도 장래희망처럼 어떤 계기가 있을 때 마다 바뀌던 멘토는 철이 들어가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사선생님은 담임도 한번하지 않으셨고 우리학교에 오래계신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국,영,수(國語,英語,數學)처럼 대입필수과목도 아닌 국사선생님이 가끔씩 생각나는 건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자랑하셨던 ‘박정희 대통령각하’와 대구사범 동기동창 이었던 탓도 있고 우리학교를 떠나신 뒤 동창생(대통령)의 덕을 좀 보셨는지 그 후일담이 궁금한 탓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담임선생님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나게 해주는 것은 사육신 성삼문(死六臣 成三問)의 절명 시(絶命詩) 때문이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북소리는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고개를 돌이키니 해가 저문 다)
黃泉無客店황천무객점(저승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오늘밤은 누구 집에서 묵을고?)’
세종 조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공을 세운 당대의 재사(才士)성삼문이 후일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동료 김질(金礩)의 배신으로 역모로 몰려 처형장인 한강 백사장으로 끌려가면서 남겼다는 절명시를 선생님께서 비장한 어조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권력과 부귀영화를 헌 짚신짝처럼 내 던져버리고 삼대멸족의화(禍)를 의연히 감수 하였던 곧은 선비의 절개는 선생님의 목소리보다 더 비장하게 나의 마음을 울렸고 오래 잊고 있었던 화랑관창과 미륵왕자를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성삼문의 절명 시와 도연명의 사시는 그 무렵 내가 아는 한시(漢詩)의 전부였었다. 여름날 부채(扇)의 빈 공간에다 한 구절씩 써놓고 기개 높은 선비를 흉내내기도하였고 겨울 산고개의 빼어난 소나무와 짝을 이루는 풍류남아가 되기도 하였다. 성삼문은 도연명과 함께 짧은 기간 동안 나의 멘토가 되었던 것이다.
난세(亂世)인가 말세(末世)인가.
토요일마다 거리에 촛불이 어지러운 걸보면 난세인 것 같기도 하고 국회의원 나부랭이가 대통령을 보고 하야하면 ‘용서’해준다고 까부는 걸보면 말세인 것 같기도 하다. 신문도 방송도 정치한다는 치들도 시민운동 한다는 치들도 삼위일체가 되어 그들이 말한 것처럼‘저주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 거리에 나선 사람들 수가 경찰추산보다 많게는 열배나 되는 시위대 측의 주장을 모든 언론들이 여과 없이 보도를 하고 선무당처럼 칼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이미 날카로운 비판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국민에게 알권리를 충족시켜주는 언론의 본질은 촛불에 타버리고 국민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속곳까지 벗겨내는 흥미위주의 보도경쟁에 몰두하여 삼류주간지로 전락하고 있다.
삼류가 상기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들고 촛불을 배경으로 화면에 클로즈업 되어 성숙한 시위문화의현장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그 성숙된 시민의식이 누군가의 잘 짜여 진 각본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면 소름이 돋는다. 수많은 군중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건 어떤 강력한 힘이 뒤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군대가 그 표본이다. 이건 광우병사태처럼 때리고 부수고 파괴하는 것보다 더 무섭다. 촛불을 든 어린 여학생이 무슨 사리판단 능력이 있다고 마이크를 들이대고 한 말씀을 부탁하는데 사전에 짜여 진 시나리오를 외우고 있는 앵무새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어린 아들을 안고 산교육현장 에라도 온 듯 지극히 교육적인 표정의 중년남자도 싸움닭 같이 깃을 세우고 한 말씀 보탠다. 아무리 못났어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모형을 만들어 오랏줄에 묶어놓고 조롱과 희학(戱謔)질 해대는 퍼포먼스를 보고 그 아이 참 반듯하게 잘 자라겠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하더니 왼 놈의 잠룡(潛龍)이 이렇게도 득시글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애초에 ‘잠룡’이 아니라 ‘잡놈’이었다. 채신머리없이 팔딱대는 모양이 왕소금 쳐놓은 미꾸라지 같다. 나라걱정 하는 채라도 해야 될 텐데 이제는 내 밥상이라고 숟가락 드는 일만 남았다는 듯이 표정관리도 못하고 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데에 흥분이 되어 자신의지지율이 반사이익도 못보고 요지부동인 것이 뭣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니 청맹과니가 따로 없다.
침묵하고 있는 백성들의 희망사항을 모르는지 무시하는지 촛불은 배를 띄우기도하고 뒤집기도하는 물과 같아서(水能載舟수능재주 亦能覆舟역능복주) 자신의 몸을 비추기도 하고 태워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는 부나방 같은 무리들이다. 이런 무리들 에게 난도 질 당하라고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무리들에게 난도 질 당하는 백성이고 나라라면 하늘은 성삼문을 세상에 내 보냈을 때처럼 너무 무책임하고 백성들이 불쌍하고 나라가 불행하다.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세 번 물었다고 해서 삼문(成三問)이다. 그렇게 하늘은 세상에 내어놓을 때는 세 번이나 물어놓고 끝까지 책임을 져주지 않았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면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단종복위(端宗復位)는 성공이 되도록 했어야지 삼족이 멸했는데도 ‘죽었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세 번 묻지 않아도 좋다. 세 번은커녕 한 번도 묻지 않아도 괜찮다. 삼족까지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자기 한 몸이라도 백척간두에선 나라를 위해 바칠 독야청청한 영웅을 이 어지러운 세상에 내려준다면 성삼문에 대한 묵은 감정이 좀 누그러지겠다.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다고 하면 어떻고 빼어난 소나무가 외롭다고 하면 또 어떤가. 선비는 사시(四時)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고 등 따시고 배부른 농부는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그런 시절을 민초들은 기다리고 기다린다.*
2016. 12. 5.
첫댓글 公山無心五千年
琴水有情三百里
팔공산(권력)은 오천년 동안 무심했으나
금호강(백성)은 삼백리를 유정히 흐른다
琴川 선생님
지금 기온이 영하 8도랍니다. 아마도 올 겨울들어 가장 추운날씨 인것 같습니다.
날씨 만큼이나 음울한 현실이네요. 1월이 가기전에 한번 뵙도록 하겠습니다.
한파에 건강 하시기를 빕니다. <然 江 拜上>
해가 바뀌었으니 얼굴 한 번 봐야지요,
김동현 선생과 같이 만납시다.
선생님 다음주에는 제가 일이 좀 있습니다.
1월 25일(수요일) 오후 6시는 어떻겠습니까? 선생님 사정이 괜찮으시면 장소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루전에만 연락주시면 언제, 어디라도 좋습니다.
선생님 25일 6시 청송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김동현 선생님에게는 주말이나 다음주 초에 제가 연락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사 제쳐놓고 참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