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준령이 나지막하게 자진하는 햇살 바른 자락에 실개천이 흐르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촌락이 소설 속 배경처럼 정스럽다. 정갈한 밥상 같은 진부면 소도시 풍경은 캔버스에 정물 같은 수채화로 그려진다.
어딜 가나 여행객을 자극하는 것은 맛집 기행을 빼놓을 수 없듯이 산골 마을답게 산나물 비빔밥 거리가 아침을 거른 뱃속에서 침샘을 자극한다. 때 이른 시간이라 마른침을 삼키고 오대산 공영 주차장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트래킹에 앞서 버스 안에서 굳어진 몸을 가볍게 풀고 걷기를 시작한다.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길은 일주문에서 금강교까지 1km가량 환상의 꿈길이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이다. 그 위로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8.9km 울창한 숲은 선계로 향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선재 길이 이어진다.
피톤치드 에너지 가득한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3백 년 수령으로 이 땅의 역사를 기억하는 빼곡한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가 품고 있는 도량의 정갈함이 마음으로 먼저 전해와 아늑하고 고즈넉하다.
눈 덮인 설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와이 슌지 소설을 영화로 만든 애절한 첫사랑 러브레터에 나오는 주인공 히로코가 설원을 향해 그리움에 목말라 외치던 명대사가 귓전에 맴돈다.
"오겡끼데스까~~ 와다시와 겡끼 데쓰"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설원이 소설같이 아름다운 풍경과 느릿한 영상처럼 흘러간다.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로 이르는 길에 기대했던 눈 대신 안개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시간이 지나자 점차 눈꽃을 피우며 하늘은 춤사위를 자랑하는 나비의 무대가 된다.
오대산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길은 두꺼운 얼음이 풀어지며 청정수가 흐르고 계곡에는 이미 봄을 예고하는 물소리가 음악을 연주하듯이 들려온다.
바람이 월정사 처마 밑 풍경을 흔들어 낭랑한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고 구도를 위한 노승의 염원과 고뇌의 독경소리, 산사에 풍경을 흔들고 경내를 맴돌아 조용히 고개 숙여 합장한다.
경내에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느낌으로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본다.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정말 좋은 풍경이지요." 누군가 감탄에 절로 고개를 끄떡여 눈길을 마주한다.
고요한 사찰과 아름드리 전나무 숲이 어우러진 계곡을 무대로 흩날리는 흰나비의 군무를 바라보는 일은 자연이 빚어내는 황홀한 경험이다..
오늘은 어제의 하루와 겹치고 또 하루는 내일이 된다. "그저 걸어라! 걸음이 가벼이 느껴지는 순간 숲과 동화되는 것이고 숲이 내면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은 이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오늘 걸음이 끝나는 날까지 걷고 또 걷자! 하루의 시간이 3백 년 전나무 숲길에서 감사와 보람으로 노을빛 충만한 시간을 뒤로하고 행복하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