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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예감은 왜 늘 이 추운 겨울에 간절할까요?
이창훈 (시인)
너무 쓴 사랑 너무 아픈 상처 너무 빨간 사과
너무 즐거운 너무 쓸쓸한 너무 시린 너무 날선 너무 너무한
즐거워 쓸쓸해 사랑해, 사과 한입 베어 물고 숨넘어가다
미안해 아파 시려, 그러다가 날선 너무가 범람하면 마음은 어디로 갈까
수식하지 않아도 숨 몰아쉬지 않아도 강조하지 않아도
봄이 오고 가을이 가고
너무가 너무너무 쉽게 너무할 때
매우 정말 영원히 여전히 훨씬 진짜 아주, 쫀득한 또 다른 이름이 되어
어느새 간절해져서
다시 그윽해져서 그야말로 정말 진짜가 되면 안 될까?
눈물겹게 눈물겨워질 때까지
-<권정일, 「너무」 시인정신 2015년 가을호>
‘너무’라는 부사어를 제목으로 쓴 시가 두 눈이 아니라 마음의 한 구석을 콕콕 바늘처럼 찔렀습니다. 너무 많은 물건들과 사람들 사이에 치여 너무 꽉 짜인 일정에 치이며 너무 많은 길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걸어왔다고 늘 푸념하고 힘겨워 해왔지만, 정작 이 ‘너무’라는 꾸밈말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는 자각이 불현듯 어떤 통증을 유발했다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이 ‘너무’라는 말은 직접 동사나 형용사 같은 움직임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말들을 꾸며주기도 하지만, 그 동사나 형용사를 꾸며주는 또 다른 꾸밈말을 꾸며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그 꾸밈이 분명 어떤 강조의 의미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아무 의심 없이 ‘너무’를 ‘너무하’게 써 왔다는 생각이 그 통증의 한 원인이었습니다. ‘아픈 상처’, ‘빨간 사과’, ‘즐거워 쓸쓸해 사랑해’라고 말하고 쓰면 될 것을… 왜 우리는 ‘날선 너무’를 그리도 그 앞에 ‘범람하게’ 써 왔을까요?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서정이라든가 시라는 것의 근본에 아직도 은유와 이미지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면, 사실 이 ‘너무’라는 부사어의 남용은 그 은유와 이미지가 아름답게 구축하고 신선하게 들어서야 할 영토를 ‘너무나’ 쉽게 감정의 과잉의 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상상력의 월경을 통해 어떤 진부한 이미지나 의미를 다른 세계의 낯선 의미로 옮겨 놓을 수 있는 은유와 상징이 지나친 꾸밈말의 수식에 갇혀 숨을 허덕이며 질식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굳이 시가 아닌 그것이 삶이어도, 역동적인 움직임과 진솔하고 진정성 있는 감정의 드러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꾸밈말을 그 움직임과 감정 앞에 배치하고 살아왔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너무’ 많은 꾸밈말의 과잉은 결국 외면은 굉장히 화려해 보이지만 알맹이는 그닥 없는 지금 여기의 삶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삶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하기보다는 더욱 깊이 없이 천박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수식하지 않아도 숨 몰아쉬지 않아도 강조하지 않아도’ 가을이 가고 있으며 겨울은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봄은 오겠지요. ‘너무가 너무너무 쉽게’ 무언가를, 누군가를 꾸미고 우리네 생을 아무런 감흥 없이 ‘너무’ 강조하고 있기에 어쩌면 지금 이곳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간절해져서 / 다시 그윽해져서 그야말로 정말 진짜가 되’는 순간을 우리가 얻기 위해서는 모든 꾸밈말의 과잉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다른 누구를 쳐다볼 것도 없이 저는 괴롭습니다. 지금껏 너무 써온 사랑에 대해… 그게 이제 ‘너무 쓴 사랑’으로 되돌아 오기에…
수업 시간 갑자기 화장실 가겠단다.
처음에는 한두 번 그냥 보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삼행시를 짓기로 했다.
기본 운자는 화장실, 가끔은 실장화로 뒤집는다.
급하다고 딴은 후두두 달려 나오는 녀석 봐라,
오늘 운자는 너의 이름 석 자를 거는 거다.
조건은 단 하나, 주변에 작은 울림을 주는 것!
급하냐, 그렇다면 이번엔 김소월이다.
다음은 김수영, 그 다음은 김춘수, 신경림,
앞 시간 다른 아이 감성과 다를 바 없는데?
오 그렇다면, 학교종 라일락 그리움 첫맘때!
느닷없는 운자의 변화에 망설일 때
그렇지, 간절함이 부족하다면 할 수 없지.
제 자리로 돌아가 승화시키는 거다.
그러면 한쪽은 환호성, 급한 쪽은 몸을 비튼다.
그러나 그 순간 정말로 이마에 송긍송글
간절함이 맺힌 녀석에겐 연습장을 쥐어준다.
너는 곧장 세상 밖 화장실로 달려 나가
지금 이 순간을 한 편의 짧은 시로 옮겨와!
복도로 조르르 미끄러져가는 녀석들아
삶은 무엇이든 간절함이 있어야 통과하는 게임
오늘은 침묵이 동이다, 쏟아 내라
그러면 오늘 하루, 엉겅퀴꽃들이
엉킨 너희들 둥근 밑을 탐할지 몰라.
-<한상권, 「엉겅퀴꽃」 시인정신 2015년 가을호>
어린 벗(아이들을 저는 이렇게 부릅니다)들에게 시와 문학의 아름다움에 대해 대화하고 아이들도 나도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애써보자고 시작한 일터에서의 시간이 어느새 12년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수업시간의 첫 시작을 늘 시에 관한 퀴즈로 열곤 했습니다. 김수영, 백석, 안도현, 정현종 등의 시들을 들려주고 일부 시 구절이나 시어에 괄호를 치고 거기에 들어갈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아이들의 생각을 발표하게 하고 서로 그 말들에 담긴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왔습니다. 봄날 시작할 때의 어린 벗들의 진지함과 놀라운 역동성은, 시험 진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바삐 나갈 수밖에 없는 때 묻은 수업의 일상성 속에서 점점 빛이 바래고 점점 대입 수험생으로서의 시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고학년 어린 벗들의 현실적인 고충 속으로 박물관의 유품처럼 먼지를 폴폴 날리기 일쑤입니다. 가끔 수업 시간에 수험 문제집을 몰래 풀고 있는 모습, 무거워지는 고개를 그냥 폭 책상 위에 처박는 모습, (정말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지만) 그거 시험 문제와 연관성이 있냐는 아픈 질문의 장면… 그 속에서 정말 나란 사람은 시를, 문학을 어린 벗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하는 쓰라린 발문이 대침처럼 꼭꼭 가슴을 찌르곤 합니다. 위의 한상권 시인의 시를 읽으며 저는 올 2학기의 수업 풍경들이 떠올라 살포시 미소 지었습니다. 2학기 1차 지필고사를 앞두고서인데… 유독 그 반에서 공부를 못 한다는 녀석들이 ‘수업 시간에 갑자기 화장실에 가겠다’고, 정말 얼굴의 모든 근육을 일그러뜨리며 급하다는 제스처와 함께 말하곤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번 그냥 보내다가’ 몇 번씩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자, ‘어느 순간부터는’ 화장실 가기 전에 좋아하는(좋아하게 된, 그것도 아니라면 교과서 배우다 좋아하게 된) 시인 이름을 크게 외치고, 그 시인이 쓴 시의 구절을 우아하게 읊고 가도록 했습니다. ‘급하다고 후두두 달려 나오는’ 녀석은 처음엔 너무나 당황해 하더니… “백석~! 음… 시는… 그 뭐더라… 샘이 학기 초에 들려줬던 시인데… 제목은 모르겠고” 한 손으론 배를 움켜잡고 불콰하게 신경이 곤두선 얼굴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내린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요. 우선 화장실에 다녀오도록 보낸 후에, 차분한 표정과 자세로 돌아온 녀석에게 왜 그 시가 좋았는지 얘기하라고 말했습니다. 녀석은 “음… 그냥요. 샘이 학기 초에 모두 눈감고 들으라고 하면서 그 시를 읽어 주셨는데… 그냥 누군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사실 너무 급한데 그 시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ㅎㅎ” 시인처럼 ‘기본 운자’를 주며 시를 창조하라고 하진 못했지만, 저는 그저 녀석의 대답이 너무나 기특하고 기뻐 한참을 속으로 미소 지었습니다. 그리고, 재미가 들렸는지 다른 반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똑같은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정현종의 ‘섬’과 ‘비’, 안도현의 ‘연탄 한 장’,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등… 교과서와는 별개로 제가 들려주고 왜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지를 나름 진지하게 얘기했던 시들을 그 공부 못한다는 문제아(?)들은 멋지게 기억해 내고 멋들어지게 대답했습니다. 한상권 시인처럼 ‘운자의 변화’를 주며 ‘간절함이 부족하다면 할 수 없지’라는 멋진 멘트를 날리며 ‘제 자리로 돌아가’도록 한 적은 없었지만, 제가 만나는 어린 벗들은 ‘한쪽은 환호성, 급한 쪽은 몸을 비트’는 그 급박한 장면에서 모두 간절함을 보여주고 읽어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어린 벗들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굳이 ‘동심’이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두 어린 시인들이었다고… 자연과 동물 등의 사물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내면을 아무런 편견이나 안경을 끼지 않은 채 그 자체로 들여다보고 오염되지 않은 언어로 말하고 쓸 줄 알았던 그런 순수한 사람들이었다고… 교과서에 가두고 교과서로 상징되는 주입된 지식과 윤리 등의 앎들이 그런 순진무구한 마음들을… 그런 간절함의 동심을 오염시키고 파괴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리고 교과서라든가 그 어떤 틀에 가둬진 언어는 결국 그 취지가 아무리 좋다고 하다라도 고정관념이라는 무서운 올가미를 어린 벗들의 상상력에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습니다. 또한, 온갖 전자매체에 오염되고 책을 읽지 않는 우려스러운 아이들이라는 내 머리 속에 탕탕 못 박힌 그 편견의 실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쓰겠다고 끙끙거리면서 다른 타인과 사물들에 대해 간절함도 없이 언어를 만지작 만지작거리려고만 했던 무서운 내 안의 나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아직은 기성의 물화된 가치관에 물들지 않은 어린 벗들 곁에서 ‘삶은 무엇이든 간절함이 있어야 통과하는’ 게임이자 버릴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을 함께 고민하고 대화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울어진 땅에서 경기를 치르는가?
똑바로 살고 싶은데 백전백패 넘어지고
폭언도, 폭력도 없이
우아하게 열외된 나
뒤룩뒤룩 감시하는 cctv 눈알들을 피해
허겁지겁 밥알 하나 입에 넣을 짬도 없이
불행이 전편, 속편으로
비루하게 이어지고
밥을 파는 식당에서 종일 굶는 낯선 일터
아침마다 가래침을 카아악 뱉으면서
이빨들 긴 지퍼처럼
적의에 차 열린다
-선안영, 「묵음黙音 1 –최저임금 알바」 시인정신 2015년 가을호>
겨울에 태어나서 내내 겨울만을 사는
추운 겨울 그 밖의 계절은 알 수 없는
누군가 따스한 입김으로 이생을 꺼주세요
빵부스러기 시급을 가까스로 받은 날
시비나 걸고 싶어 하늘을 바라보면
싱겁게 바람 다 빠져 쪼글쪼글 홀쭉한 달
아 흐으! 심장이 쫄아 붙듯 울어 봐도
무음으로 삭제되어 아무도 아프지 않아
영혼은 오랜 허기 속에 성스럽게 탄생한다지요
-선안영, 「묵음黙音 2 –최저임금 알바」 시인정신 2015년 가을호>
삶터인 집에서 일터인 학교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개인 자동차로 60분 거리) 저는 어쩔 수 없이 차가 덜 밀리는 이른 새벽에 출근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침을 먹지 않고 일찍 나와 일터 근처의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을거리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24시간 도무지 잠을 잘 줄 모르고 환한 등을 켜놓고 생활에 필요한 거의 웬만한 것들을 전시해 놓은 곳. 그러나 졸리면 눈이 감기는 자연스런 인간들이 피곤한 눈을 간신히 뜨고 있는 곳. 일터인 학교 근처라 그런지 학교를 졸업한 어린 벗들이 그곳에서 규격화된 에이프런을 입고 명찰을 단 채 일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저번 주 금요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자주 신세를 지는 편의점. 늘 점장인 나이든 아주머니가 저를 맞이하던 곳.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2년 전에 졸업했던… 제가 담임을 맡았던 어린 소녀였던 벗이 졸음과 피곤에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어서 오십시오. 0025시입니다.”라고 파리한 목소리로 반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서로 약간은 계면쩍고 당황한 눈빛과 인사를 하고, 저는 제가 먹을거리와 어린 벗이 만류하다가 선택한 음료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섰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그간의 근황에 대해 그리 길지 않게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유독 책읽기를 좋아했던 소녀, 제 시집을 들고 와 사인 좀 해 주세요, 라고 말했었던… 백일장에서 내밀한 자기 가계에 얽힌 아픔을 숨김없이 표현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어린 벗.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알바노동의 현실과 그 ‘빵부스러기 시급’이라도 모아 가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는 마음씀이 고스란히 전해 오더군요. 어쩌면 그녀는 ‘겨울에 태어나서 내내 겨울만을 사는’ ‘추운 겨울’ 그 밖의 계절의 상황은 알 수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급을 가까스로 받은 날’에 어마하게 드높은 하늘의 푸르름은 과연 그녀가 ‘시비’나 걸고 싶다는 마음조차 들게 했을까요?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새로운 신조어들이… 하이데거가 얘기했듯이 그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결코 선택할 수 없는 태어남 자체가 계급과 계층의 분명한 경계와 구획을 지어버리고 있는 이 시대에 판치는 상황 속에서 그 어린 벗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리게 했습니다. 부모의 자본이 자식의 교육과 자본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오는 사회의 모습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미 기득권을 가진 권력과 자본이 눈물 흘리는 자들의 노동과 힘든 삶에 피도 눈물도 없이 대하는 작금의 상황들이 아픕니다. ‘심장이 쫄아 붙듯’ 아무리 울어 봐도 ‘무음으로 삭제되어’ 버리는 난장이들의 삶과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겉으론 멀쩡히 돌아가는 세상의 한 모습이 무정했습니다. 마치 이성복이 오래 전에 일갈했던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시 구절이 가슴 한 구석에 다시 돋을새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은 함부로 건넬 수 없었습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쌓았다는 이 세대의 청춘들. 그러나 도무지 그 소양과 능력을 사용하여 한 생의 삶의 비용조차 벌 수 없는 사회 구조적 현실 속에 놓인 청춘들. 그들에게 어떻게 ‘영혼은 오랜 허기 속에 성스럽게 탄생한다’고 무슨 영성가처럼 멋지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그 피곤한 얼굴과 눈빛 속에서도 ‘샘~ 여전히 시 쓰세요? 좋은 시 많이 써 주셔요.’라고… ‘나중에 월급 타면 한 번 찾아갈게요.’라고 말하는 어린 벗에게… ‘누군가 따스한 입김으로 이생을 꺼주세요’라는 말은 아무리 독백일지라도 결코 해선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오랜 허기와 비루한 일상 속에서 ‘긴 지퍼처럼 적의에 차 열리’는 이빨들 사이에서 ‘백전백패 넘어지고’ ‘폭언도, 폭력도 없이’ 아프게 변죽으로 열외 되고 열외 되더라도 아득바득 ‘똑바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시인정신 시낭송회 자리가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어줍잖은 사회를 보면서 시가 읽히지 않는, 아니 시집이 팔리지 않는 사회와 시대에 대해 개탄조로 말했습니다. 돌아보면 참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는지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어쩌면 늘 시의 위기였던 사회에서 유독 지금 이 시대에 더 시가 소통되지 않고 있다면 문제는 시를 손수 찾아 읽는 독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우리 시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들은 누구이고 왜 쓰고 있는 것일까요?
행여 매연과 자동차가 가득한 도시에 살며 가끔씩 산책 나가는 탄천길을 걸으며 옛 전통 서정에서 그리고 있는 자연친화적 정서를 새기고 있진 않은가요. 행여 시골에 살며 악의 도시와의 대척점으로서의 낙원 속의 삶을 이상화하며 있진 않은가요. 행여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어도 좋다’라는 김수영의 시 구절을 참조할 틈도 없이, 그저 지난 시들의 시적인 것을 옛 서정이라고 탕 탕 못을 박고는, 골방에 앉아 빠개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새로운 시의 창조에 온 기운을 쏟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행여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의 일환으로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최고라고 말하며 하루에도 몇 편씩 부사어와 형용사 등의 수식어를 남발하며 시를 쓰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굳이 엘리엇이 말한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레토릭에 기댈 것도 없이, 시는, 시적인 것은 굳이 딱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말해져서도 안 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를 쓴다는 것은 지적 유희를 부리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어떤 철학과 지식을 앙상하게 드러내는 것도 아닙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과 감정에 자족하고 심취하여 적어낸 그 무엇은 결코 아닙니다.
어느 한편에서는 너무 쉬운 시들이 양산되고, 어느 한 편에서는 해독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시들이 빼어난 시들도 극찬 받고 있습니다. 그 양쪽 모두 읽는 이들과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통 부재가 지금의 시의 위기의 핵심에 놓여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는 더 이상 쓰는 자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족적인 권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시는 더 이상 쓰는 자들이 스스로 믿는 고귀하고 심오한 예술 형식이라는 무의식의 레토릭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시의 자리가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릴 자신도 용기도 그럴 만한 자격도 제겐 없습니다. 다만, 문학이 늘 중심의 자리에서 월계관을 쓰고 빛나는 1등보다는 맨 뒤에 처져 꼴등으로 달리고 있는 마라토너에게 박수를 보내는 예술이라는 소박한 정의에 기대어 본다면 시의 자리는 바로 이 추운 겨울 지금 이 시대 이 땅의 결핍과 소외와 그늘 속에서 찬 바닥에 누워 있는 자들의 눈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어떤 윤리적 진정성에 있진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의 예감은 왜 늘 이 추운 겨울에 간절한 걸까요?
지금 창 밖에 눈이 오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도 같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ㅡ 「시인정신」2015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