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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수도 : 멕시코시티
종족구성 : 메스티소(60%), 아메리카 원주민(30%), 백인(9%), 기타(1%)
공용어 : 스페인어
종교 : 로마가톨릭교(83%), 개신교(7.9%), 여호와의 증인(1.4%), 몰몬교(0.3%), 무교(4.7%), 기타(2.7%) 등
건국일 : 1810년 9월 16일(선언); 1821년 9월 27일(승인)
국가원수/국무총리 :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대통령 (2012.12.1 취임)
국제전화 : +52
정체 : 연방공화제
통화 : 멕시코 페소(Peso)
기후 : 건조성 기후, 열대성 기후, 온대성 기후
북아메리카 남서단에 있는 나라이다. 마야, 톨테크, 아스텍의 인디오 문명이 발생한 지역으로, 1521년부터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810년 9월 16일 독립 기운이 조성되어 1821년 코르도바 협정에 의해 독립이 성립되었다.
정식명칭은 멕시코 합중국(United Mexican States)이다. 중부아메리카 최대의 연방공화국으로, 국명은 아스텍족의 군신(軍神)인 멕시틀리(Mexictli)에서 유래한다. 북쪽은 미국, 남쪽은 과테말라·벨리즈와 접하고, 서쪽은 태평양, 동쪽은 멕시코만(灣)에 면한다. 북서 태평양 연안에는 본토와 병행해서 1,200km 길이로 돌출한 캘리포니아 반도(半島)가 있고, 남동 대서양 연안에는 북쪽을 향해 유카탄 반도가 멕시코만과 카리브해를 나눈다. 1846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북부 지역 일부를 잃었고, 1910~1917년 혁명으로 봉건주의가 무너졌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출범과 함께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다 미국의 긴급 지원에 힘입어 회복세로 돌아서는 등 대미 의존도가 높다. 행정구역은 31개 주(estado)와 1개 연방 구(distrito federal)로 이루어져 있다.
멕시코 역사
멕시코에는 1521년 에스파냐인(人)에게 정복되기 훨씬 이전부터 원주민 인디언에 의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미 BC 2000년 경 옥수수 농사를 기반으로 한 촌락이 각지에 발달하였으며, 기원 전후에 이르러서는 멕시코 중앙고원의 테오티우아칸에 태양과 달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구축되었고, 이것을 중심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멕시코만(灣) 기슭부터 오악사카계곡(溪谷)에 걸친 일대에 몬테알반의 사포텍문명, 유카탄반도에 마야문명이 꽃피고 있었고, 900년 경에는 군국주의적인 국가가 성립되었다.
멕시코 중앙고원의 톨텍, 마야에 뒤이은 치첸이차, 욱스말 등의 후기 고전문명이 융성하였으며, 멕시코분지 일대에서는 아스텍제국(帝國)이 일어나 1325~1521년까지 약 200년간 테스코코호(湖) 주변을 도읍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521년 8월 에스파냐 탐험대의 장군 코르테스에게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의 ‘누에바에스파냐’로서 에스파냐의 부왕(副王)이 통치한 식민지 시대가 전개되었다. 16세기는 식민과 포교(布敎)의 시기, 17세기는 혼혈화가 진전된 시기, 그리고 18세기는 고유의 혼혈문화를 형성하여 독립의 기운을 북돋운 시기이다.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은 1810년 9월 16일 혁명적 애국자인 미구엘 이달고의 유명한 ‘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을 계기로 기운이 일기 시작하여,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한 코르도바 협정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독립 이후 식민지시대가 끝나고 전제정치로부터 공화제로 이행하여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중앙집권주의파와 연방주의파의 대립이 심하여 혼란에 빠졌다. 1846년의 실정(失政)은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하여, 2년 후에는 영토의 북부를 상실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멕시코 주민
멕시코는 2006년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11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1억 이상의 인구를 가진 인구대국에 포함된다. 또한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는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국토의 14%를 차지하는 중앙고원에는 전 인구의 45%가 거주하는 데 비해, 북부 태평양지역은 국토의 21%를 차지하는데도 거주민은 전 인구의 8%에 불과하다. 전 인구의 약 76%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특히 수도인 멕시코시티에는 약 1,941만 명(2005년)이 거주하고 있어, 일본의 도쿄 대도시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대도시권이 형성되어 있다.
인구 추계에 따르면 멕시코의 전체 인구는 2025년경에 1억 3천만 명, 2050년 경에는 1억 4천만 명에 도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06년을 기준으로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16%이며, 평균수명은 75.4세(남자 72.6세, 여자 78.3세)이고, 15세 미만 인구의 비중이 30.6%에 달해 피라미드형 인구구조를 보인다. 조출생률과 조사망률은 각각 인구 1,000명당 20.7명과 4.7명이고, 합계출산율은 2.4명이다.
주민은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족인 메스티소가 60%, 인디언이 30%, 에스파냐계(系) 백인이 9%이고, 그밖에 물라토, 삼보 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다. 에스파냐어(語)가 국어이지만 인디언들은 아직 나우아틀·마야, 아스테카, 사포테카 등 그들 고유의 언어를 일상어로 사용한다. 전국민의 89%가 에스파냐 통치시대에 보급된 로마가톨릭교를 신봉하며 나머지는 기독교, 샤머니즘 등을 신봉한다.
멕시코인의 신앙
멕시코 시티의 상징은 소칼로에 있는 가톨릭 대성당이다. 모든 구역마다 성당이 있고, 하나 둘이 아니고 여러 개 있는 구역도 많다. 일요일이면 이 모든 교회에서 적어도 하루에 세 차례 이상 미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기는 하나 성당을 다니지는 않는다고 한다.
멕시코 시티가 아직 호수였을 때에는 테노치티틀란과 텍스코 호수가 나뉘어져 있었다. 두 곳을 육지로 연결하는 부분이 바로 틀랄텔롤코(Tlatelolco)였다. 여기서 가장 뚜렷이 보이는 곳이 작은 언덕인 테페약(Tepeyac)이었다. 이 곳에는 대지의 여신인 토난친(Tonantzin)의 신전이 있었다. 토난친은 대지의 여신이며, 생명과 죽음의 신이었고, 아버지 신인 토타흐친(Totahtzin)도 함께 표현되는 신으로, 아스테카 종교의 통합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 에스파냐가 아스테카를 정복하자 이 신전은 즉각적으로 허물어졌다.
대신에 그들은 가톨릭의 신을 믿어야만 했다. 신부들에게 인신공양을 매일매일 하는 원주민들이 악마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에스파냐의 아스테카 정복의 표면적인 또 다른 목적은 가톨릭 복음의 전파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원주민의 종교관에 새로운 신을 심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복자들은 우선 원주민 지배 계층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개종을 하면 지방의 지배자들이 누리던 권력과 부를 인정해주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이미 300년 가까이 내려오는 순환철학과 희생의식을 없애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복음화를 정복의 명분으로 세운 에스파냐로서는 어찌되었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멕시코시티 [Mexico City ]
정식 명칭은 시우다드데메히코(Ciudad de Mexico)이다. 에스파냐어(語)로는 메히코라고 한다. 멕시코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멕시코고원 중앙부의 해발고도 2,240m에 있는 고지(高地)도시이다. 동쪽 교외에 테스코코호(湖)가 접하고, 남동쪽에는 포포카테페틀산(5,451m)·이스타시와틀산(5,286m)의 두 화산이, 서쪽에는 톨루카 화산(4,577m)이 솟아 있다.
열대에 위치하나 고지에 있기 때문에 월평균기온은 최고인 5월에도 17.4℃, 최저인 1월은 12.1℃, 연평균기온은 15.1℃이다. 연교차는 작으나 일교차가 커서 하루 중에 4계절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연강수량은 726mm로 5∼9월이 우기, 10∼4월이 건기이다. 고원의 경작지와 목장, 계곡과 산록의 삼림에 둘러싸여, 열대 고원도시로서는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멕시코고원은 옛날부터 집단거주지로 이용되어 왔다.
거대한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테오티우아칸 문화가 7세기 중엽에 붕괴하자, 톨텍·아스텍 두 문명이 잇따라 테스코코 호반에 자리잡았다. 아스텍족(族)이 건설한 테노치티틀란은 ‘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으로 인구 20만∼30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였다.
고대 도시 테오티우아칸이 폐허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새로운 나라, 아스텍 제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 등의 도시가 들어섰다.
아스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부족의 지도자 테노치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테노치티틀란이 도시로서 틀을 갖춘 시기는 1324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아스텍 사람들이 남긴 그림을 통해서 밝혀졌다.
테노치티틀란이 세워질 당시의 자연환경은 지금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오늘날 멕시코시티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지만 당시에는 드넓은 호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호수의 크고 작은 섬에 도시를 건설했다. 테노치티틀란과 버금가는 도시 틀라텔롤코 역시 섬이었다.
아스텍 제국이 수도를 섬에 건설한 이유는 적의 침입을 쉽게 방어하기 위해서이며 도시를 건설한 아스텍 사람들은 주요 섬과 육지 사이에 둑길을 만든 다음 출입구를 단 세 곳만 만들었다. 이 역시 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발전한 아스텍 제국은 에스파냐의 침략으로 멸망하기 전까지 약 200년 동안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수도인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에 살았던 사람만도 20만 명이 넘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보다 많은 식량이 필요하게 되자 사람들은 호숫가에 갈대와 나무를 엮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흙을 채워 작은 농토들을 만들었으며,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호수는 차츰 육지로 바뀌었다. 현재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멕시코시티는 호수에 흙을 채워서 건설한 일종의 매립지이다.
1521년 에스파냐 장군 코르테스의 정복으로 이 도시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고, 그 위에 에스파냐에 의해 멕시코시티가 건설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멕시코시티는 중세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아니라, 소칼로 광장을 중심으로 가로가 동서남북으로 정연하게 구획되고 광장과 공원이 배치된 근대적인 시가였는데, 이곳은 누에바 에스파냐(새로운 에스파냐)로서 에스파냐에 의해 통치되었다.
17세기가 되면서 남부의 푸에블라에서 만들어진 다채색 타일을 이용한 건물이 증가하고 인디언의 거주도 허락되었다. 시민은 정복자인 에스파냐인(人), 원주민인 인디언, 이들의 혼혈인 메스티소, 그리고 신대륙 태생의 에스파냐인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시내는 바로크식 건축이 늘고 18세기에는 에스파냐의 신고전주의가 도입되어 궁전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독립 이후 1917년에 헌법이 공포되어 일단 혁명의 목적이 달성되자,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예술 운동이 건축물에 반영되었다. 북부는 공업지역, 남부는 새 단지, 서부는 고급주택지이다. 남북으로 뻗은 인수르헨테스 대로는 남부의 개발을 촉진하여, 단지 외에 국립자치대학이 설립되어 있다.
근대 건축이 발전한 레포르마 대로에는 고급상점·영화관·각국 대사관·호텔 등이 넓은 가로의 양쪽을 메우고, 중심부인 알라메다·소칼로 주변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다.
이 밖에 남부에는 코요아칸 교회, 수도원, 소치밀코의 수향(水鄕) 지대가 있어 주말을 즐기는 가족들로 붐빈다. 동부에는 국제공항이 있고, 이스타팔라파에는 아스텍 시대의 생활양식이 남아 있다. 서부의 일각, 차풀테펙 언덕에는 멕시코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별장지이기도 하였다. 현재는 멕시코가 자랑하는 국립인류학박물관(1964년 준공)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 15km의 지점에서는 피라미드가 용암 밑에서 발굴되었고, 45km 북쪽에는 아스텍 이전의 주민에 의해 건설된 도시의 유적이 있다. 이러한 특유한 역사와 풍물, 주위의 웅대한 경관은 편리한 교통과 더불어 멕시코시티를 관광도시로 크게 부각시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공업도시는 아니나, 모·면방적과 직물·제지·식품·도자기·은기·은세공 등 경공업 및 공예가 성하다.
시내에는 환상(環狀)도로가 2중으로 둘러 있고 지하철도 완비되어 있으며, 멕시코만(灣)에 면한 베라크루스를 외항으로 하여 그 사이 320km는 철도·도로 등이 정비되어 있다. 1950~1970년대에 급격한 인구 증가를 겪었다. 1968년 10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최초로 제19회 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주교좌 성당
전쟁에서 승리한 에스파냐 사람들은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를 하나둘씩 파괴했습니다. 거대한 아스텍 제국의 흔적들은 폐허가 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에스파냐 침략자들은 아스텍 제국의 신전과 궁전을 파괴하고 그 위에 식민지를 다스릴 행정 기관과 사법 기관 등을 세웠다.
가장 먼저 건설한 것은 헌법 광장이었다. 헌법 광장은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드넓은 광장이며 에스파냐 사람들이 세운 주요 건축물은 헌법 광장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자리하고 있다.
코르테스는 아스텍 제국의 궁전을 부수고 그 위에 자신이 머물 궁전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헌법 광장 동쪽에 세워진 웅장한 국립 궁전이다. 코르테스가 에스파냐로 돌아간 후에는 에스파냐 국왕을 대신한 부왕 멘토사가 집무실로 사용했다.
이후 국립 궁전은 170년 동안 에스파냐의 권력자들이 머물렀던 식민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국립 궁전은 1692년에 화재로 사라진 것을 새롭게 지은 것이다.
국립 궁전 북쪽에는 에스파냐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세운 종교 건축물인 주교좌 대성당이 있다. 총 14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대성당은 공사를 시작한 지 약 250년이 지난 19세기 초반에 완공되었다. 건축 기간이 길어서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등 여러 양식이 섞여 있지만 전체적인 균형이 매우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성당은 아즈텍 원주민들의 신전을 허물고 연못을 매립하여 만든 성당이다.
대성당 옆에는 1768년에 완공된 사그라리오 성당이 있다.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사그라리오 성당은 멕시코에서만 볼 수 있는 멕시코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성당 마당에는 지하 신전터를 볼 수 있게 유리판을 얹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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