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연남생과 연남산의 묘지명이 남아있고, 다른 기록도 풍부하여 이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첫째 연남생은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 군의 앞잡이를 한 댓가로 당나라에서 우위대장군변국공에 임명되어 잘 살다가 679년 46세에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식읍도 3천호나 받았습니다.
둘째 연남건 - 끝까지 당에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당나라에서는 그를 먼 검주땅으로 유배를 보냈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물론 언제 죽었는지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셋째 연남산 - 마지막에 보장왕과 함께 항복한 그는 당나라에 가서 사재소경 벼슬을 받고 이후 금록공록대부 원외치동정원을 거쳐 상호군에 이어 요양군개국공에 봉해지기도 합니다.
그는 63세인 701년에 죽습니다. 남생보다는 덜 대접을 받았지만 그 역시 당나라에서 이용가치가 있었던지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당나라에서 주는 작위나 벼슬, 식읍으로 그들이 행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완용이 일본국 귀족이 되었다고 행복하게 삶을 마감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차라리 귀양을 가서 살지만 끝까지 변절하지 않는 남건의 삶이 더 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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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세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이 세사람은 고구려가 망한후 어떻게 되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