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역으로 가는 길은 인생의 쉼표이다. 청량리역 플랫폼에서 춘 천 방향의 청춘열차를 기다린다.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가고 마음은 먼 저 기차를 타고 청춘의 시간으로 달린다. 기차 여행은 늘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처음 타보는 ITX 청춘 기차 2층에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푸른 산과 연둣빛 들판이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차 안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송사리 떼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차창 가에 앉자 스쳐 가는 들녘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차창 유리에 비친 그림자 음영 속에서 며칠 전에 읽었던 김유정의 작품〈봄·봄〉, 〈동백꽃〉 소설 속 인물들이 나의 마음과 생각으로 무시로 드나든다. 100년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유정과 교류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은 문학의 힘일 것이다. 그가 살았던 세상이나 지금이나 삶의 양상과 형태는 많이 달라졌지만, 희로애락의 본질이 같아서인지도 모른다. 김유정의 문학은 희화화된 인간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기에 시대가 지났어도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남춘천역을 거쳐서 김유정역에 내렸다. 따사로운 봄볕이 역 주변에 가득 쏟아지면서 영산홍 꽃빛으로 물들어 새색시의 볼처럼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김유정역 바로 옆에는 폐역이 된 구(舊) 김유정역(신 남역)이 공원 안에 있었다. 입구에서 첫 번으로 마주하는 것은 나신남 역장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파란 제복을 입고 화단에 물을 주고 있는 조형물이지만 넉넉한 마음을 지녔던 지난날 역무원을 생각나게 하였 다. 아담하고 소박한 역사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나이와 같은 1939년생이다. 역을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자상한 얼굴이 떠오르면서 유년 시절로 돌아가 평온한 안식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주변은 분홍색의 향 연 꽃잔디 군단과 각종 꽃들, 과거 기차 그대로 철로에 전시 되어있었 다. 젊은 시절의 시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구내 작은 대합실은 옛 모습 그대로다. 실내 중앙에 연통이 있는 난로 위에 누런 양은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이것을 보는 순간 학교 친구들과 함께 군침을 흘리며 바라보던 당시의 눈빛들이 연상되었다. 살며시 눈을 감으면 점심 시간이 가까울수록 도시락 속 반찬과 밥이 누렇게 익어가는 냄새로 교 실 가득했던 그때가 생각나서 나의 콧구멍은 벌렁거렸다. 이 감정과 느낌을 담기 위해 셔터를 연실 눌렀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더욱 돋아났다.
역 건너편 김유정 문학촌은 여러 건물이 한 단지를 이루고 있는 형태였다. 멀리 김유정 선생의 동상이 보였다. 20대 청년의 모습이었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유정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젊은 날의 고뇌와 삶의 흘들림처럼 유정의 두루마기 자락이 봄바람에 나부꼈다. 실레마을에는 생강나무(동백꽃) 잎은 봄봄의 따뜻한 입김에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 옆에는 유정의 아픔을 연상 시키는 철쭉, 영산홍이 붉디붉게 피어있어 그리움을 더했다. 김유정 기념 전시관에서 선생의 생애를 생생하게 그려낸 회화 작품들, 사진과 서한 등의 전시 내용 하나하나를 가슴으로 읽고 있노라니 유정의 문학적 삶이 더욱 마음으로 가깝게 느껴졌다. 그가 암울하게 살았던 그 시대가 추스를 수 없는 연민으로 다가왔다.
김유정의 생가 옆 마당에 들어섰다. 소설 〈봄봄〉에 나오는 한 장 면이 상징적으로 서있었다. 장인 봉필과 데릴사위 주인공이 16살 점순이 키를 재는 구릿빛 조형물은 내 입꼬리를 저절로 올라가게 했다. 나는 그들 틈 사이로 슬며시 들어가 소설 속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 보았다. 그때 "글쎄, 이 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고 그랬냐. 왜 날 보고 떼 를 쓰냐?"라고 장인 영감의 호통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빙의되어 "장모님은 참새만 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 라고 말대꾸를 해보았다. 저절로 내 배꼽이 춤을 춘다.
김유정 이야기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학을 다차원의 매체로 구현해 낸 전시관이었다. 김유정 탄생 100주년 기념하여 세계 문인들이 남 긴 작품 평과 손바닥 조형물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들의 따뜻한 온기가 나에 손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영상실에는 유정의 작품 〈동 백꽃〉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있었다. 점순이는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꽃 냄새와 점순이 몸 내음이 내게로 와닿는 것처럼 다가왔다 간 동백꽃 사이로 흩어졌다. 일주일 내내 읽었던 유정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더욱 감정에 빠져 들어갔다. 슬픈 현실 속에서도 사랑을 꽃피우는 유정 문학의 백미를 느껴보았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푸르른 산도, 강물도 여전하고 100년 전의 청청한 유정의 모습도 그대로다. 시공간을 거슬러 찾은 실레마을 에는 당장이라도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라고 소리치며 점순이가 쫓아 나올 것 같다. "그럼 어떡해?"라고 읊조리며 나는 청춘 열차에 올랐다.
떠나는 김유정역 차장가로 다시 구 김유정역이 보였다. 이 역의 모습은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간이역과 흡사했다. 기찻길 옆 논, 밭 두렁에서 여름에는 물장구도 치며, 펄떡이던 물고기도 잡았다. 겨울에 는 썰매 지치기를 하며 신나게 놀던 옛 생각이 소환된다. 몹시 추운 겨울날 새벽 눈이 휘몰아치던 날이었다. 3시간 걸리는 서울의 첫 직장 에 출근하기 위해 역 플랫폼 선로 가에서 외투도 없이 눈보라를 맞으 며 기차를 기다리던 내 젊은 날의 청년 모습이 되살아났다간 손끝으로 잡을 세도 없어 사라져 갔다. 이 잘 보존된 역은 나이 들어가는 내 모 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식의 웅장한 건물에는 비교할 바가 아 니지만 볼수록 소박하고 정겹다.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인 곡선처럼 느 껴졌다. 이 역을 바라볼 때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던 젊은 날의 나를 보는 듯하다. 세상의 현대식 건물들은 저마다 마음껏 뽐내지만, 몇 겹 의 날실과 씨실의 시간이 쌓여 있는 작은 역이 더욱 내 마음속의 일부처럼 소중하게 다가왔다.
김유정을 만나러 갔던 길을 되돌아오며 생각에 잠긴다. 내 삶의 속 도는 이제 들숨과 날숨의 간극이 벌어져가는 느릿느릿한 완행열차이지만. 내가 원하는 역마다 내려서 살펴보기도 하고 어루만질 수도 있는 넉넉함과 여유가 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넓고 깊 게 들어온다. 빠르면 빠른 데로 느리면 느린 데로, 기쁘면 기쁜 데로, 슬프면 슬픈 데로, 느끼고 표현하고 맞추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무엇 하나 소중한 날이 없었던 지난날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긴 터널 속을 빠져나온 화목 기차처럼 힘차게 기적소리를 내며 내 청춘 열차는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