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회「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2018 여름호)
박재숙 시인 2018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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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타 외 3편
박재숙 알몸을 두드리고 늘리고 포개고 뭉친 근육을 풀어준 뒤 최대한 길게 뻗어가는 상상을 해요 그 속에 슬쩍 무언가를 넣고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게 해요
점점 더 부풀어 오르는 팽팽한 발효를 멈추고 비밀로부터 자꾸 멀어져요
지문에 묻어나는 표정을 폈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며 한때의 유순함이 외고집의 감정을 껴입어요
끈질기게 달라붙는 질문들 풍부한 기계의 취향들 전부 다 유쾌해져요
속도를 견디다 보면 소심한 감정에 탄력이 생기죠 뭉친 생각들에까지 찰기가 돌아요 생계의 틈새까지 잡아주면 그때부턴 매끈하게 혈기가 돌죠
호흡을 가파르게 치대고 어르고 달래면 맨살에 들러붙는 관능에 당신의 미각은 황홀해져요
가늘고 탱탱한 전신이 쫄깃하고 낭창낭창한 손길에 전율과 리듬을 품으면 삭제하고 싶었던 기억에까지 침이 고이고 말죠
지금 막 우산을 쓰고도 젖은 채 들어 온 당신 강력분을 원하나요, 중력분을 원하나요 떨림이 사라지기 전에 주문을 걸어보세요 그날 그때 당신 앞에 앉았던 그 사람처럼…
사정
내게 사정하지 말아요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어요 혼자 달아올라 지금 어쩌라는 건가요
애걸하는 당신과 나 사이 낡고 헐어진 기억 한 조각으로는 깊숙이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절대 허락할 수 없으니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요 적극적인 끌림에 약하다고요 내 왼쪽 뇌를 자꾸 실험하지 마세요
한 발 뒤로 물러나 주세요 지금은 정말, 정말 선택을 선택할 수 없어요 밤을 샐 작정인가요 당신의 몸짓 하나에 내가 흔들릴까 두려워요
제발 제발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나도 무너지기 직전이예요 자존심을 뭉개버린 나쁜 여자가 되기 싫어요
사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의 태도는 달라지겠죠 제발 무릎만은 꿇지 말아요 도장 없이도 우린 타인이 될 수 있잖아요
이 순간 당신의 여자는 어떤 남자에게 사정을 하고 있을까요
달아나는 취향
당신은 건조한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나는 부드러운 스타일을 좋아해요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 다른 취향이었는지 하나 남은 와인병에겐 물어보지 마세요 항상 따는 쪽은 당신이고 건배하는 쪽은 나였지만 오늘만은 아무것도 부딪히고 싶지 않아요 바디감은 입안과 입 밖에서 서로 다르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지요 오크 위쪽의 기분과 아래쪽의 기분이 다르듯 당신은 얼마나 내 표정이 숙성되고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식탁은 조심할 필요가 없지만 투명은 예민해서 매번 조심해야 돼요 천천히 번져가는 실금 따윈 없으니까요
일부러 휘청거릴 필요 없어요 당신은 침대를 원하고 나는 베란다를 원해요 잔과 잔 사이 찌푸린 미간이 강한 촉감을 삼키고 있어요 당신의 탁한 취향이 당신의 허물을 한 겹씩 벗기는 걸 느껴 봐요 첫맛과 끝 맛은 달라요 우린 서로 다른 원산지를 가졌지요 불현듯 발병하는 고독과 슬픔의 뿌리를, 그동안 깨져버린 와인 잔은 누가 치웠을까요 당신도 나도 익숙한 몸짓을 원한 것도 아닌데, 초대받은 난간과 추방된 육체 사이 떠도는 홀림이 있어요
파국은 늘 예고 없이 당당하게 찾아와요 저항을 흔쾌히 부수고 결말 이후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속수무책뿐인가요 묵직한 기분이 자꾸 허공을 향하고 있는데…
암막커튼 커튼 한 장에 바깥으로 밀려나는 대낮 적막 속에서만 읽을 수 있었던 표정 곁을 내주지 않던 의식 너머의 시간들이 한 번 더 알몸이 된다 불면과 불면이 겹쳐진다 위악 속에서 나는 무엇이 되고 있었던가 불온서적 같은 어둠을 찢고 창 앞으로 나온 눈물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하루 더 추가된 실업의 날들 심중에 박힌 문장 하나가 반복된다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껴안고 뒤척여도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는 문장 나만 알아주는 혁명을 내가 지켜보고 있다 달의 움직임만을 기억하는 눈동자는 왜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할까 햇살 속에서 극명을 실천하는 먼지들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편린들 허무처럼 잡히지 않는다 한 뼘 더 열어 제친다 나를 뺀 거실 속 사물들이 비밀 따윈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금방 눈부심에 적응해 있다 수면제가 없이도 잘 자고 잘 일어나는 것들 바깥이 차단된 후에도 완전해지지 못했다고 질책한다 외계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한 나는 여전히 풋사과다 다시 커튼을 친다, 모든 일조량을 거부한다 자의식을 봉쇄한다
*체게바라 [출처] 49회「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2018 여름호) 수타 외 3편 / 박재숙|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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