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수준- 통상 대부분은 자신의 정신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다.
정신의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신이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가 자신의 정신의 수준을 파악하지도,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정신이 물질의 우위에 있으며 물질을 선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말하는 이유는 정신을 믿고 선택해야 정신의 발달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순간부터 정신의 발달은 시작된다 -그전에는 정신이 잠을 잔다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다-.
먼저 인간의 의식을 분류한 슈타이너의 주장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슈타이너는 인간의 의식을 '깨어있는 의식', '꿈꾸는 의식', '잠자는 의식'으로 분류하였다. 깨어있는 의식은 깨어서 사고하는 의식이고, 꿈꾸는 의식은 꿈을 꾸듯 흐릿한 의식이나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의식, 그리고 잠자는 의식은 무의식 상태이다. 인간은 늘 세 가지 의식을 지니고 삶을 영위하지만, 인간이 파악하는 의식은 깨어서 사고하는 의식뿐이다. 꿈꾸는 의식은 감정으로 짐작만 할뿐이고, 잠자는 의식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이런 세 가지 의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변화하였다. 과거 15세기 이전, 인류의 의식은 지금과는 다른 상태, 약간 꿈꾸는 듯한 의식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밤에 꿈을 꿀때를 생각해 보면 그 꿈이 그대로 전달되지, 그 꿈에 대해서 어떤 의문이나, 왜 그런지에 대한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렇게 정신이 -꿈을 꾸듯이- 전달되었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이 꿈을 꾸는 상태는 아니고, 꿈에서의 상이 분명하고 명료한 상태에서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정신이 상으로 전달되고 또 그 상을 그대로 전달받은 것이다. 예를 들어 아기가 어머니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사랑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과 같다. 요컨대 사랑의 정신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인류의 의식은 이런 꿈꾸는 의식 상태에서 지금과 같이 '나' 의식이 분명한 상태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현 의식 상태를 '의식혼'시대라고 한다-.
필자가 이를 이해하게 된 계기는 과거 '역사책'이나 '신화'를 읽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이다. 역사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생각, 행동들을 보면 지금 우리들과는 많이 다르다. 만약 지금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도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의 명령이나, 유교 풍습 등을 거역하지 못한다. 왜 거역하지 못할까 생각하는데, 거역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가 정신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불현든' 든 것이다. -그래서 정통성이 중요했던 것이다-. 정신이므로 거역하면 역모이고, 누구도 그 정신을 뛰어넘을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 당시 의식이 꿈꾸는 의식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꿈꾸는 의식이 점차 깨어서 사고하는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현 인류는 '나'의식이 분명해서 더 이상 정신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여담으로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성덕임'이 '이산'에게 '안보는 데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은 그 시대에서는 감히 할수 없는 말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고를 하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받아들여지면 거역할수가 없으므로 그렇다. 마찬가지로 만약 지금 시대 우리에게 -정신이 전달되지 않지만-, 정신이 전달되었다면, 거역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할일은 나의 정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어떻게 발달시켜야 할지를 파악해야 그와 같이 매몰된 정신을 구할 수가 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어떻게 나의 정신을 파악해서 구할 것인가가 질문이다.
정신의 수준을 네 가지로 구별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나쁜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더 좋은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자신의 정신 수준이 그와 같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나의 정신도 발달하지 않는다. 정신의 속성인 '모든 사람이 같은 존재이다'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므로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가만히 자신을 성찰해 보면, 어려움을 겪을 때, 나의 정신이 헤쳐나가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다. 만약 파악하지 못하면 정신은 그와 같은 상황을 계속 제시하고, 그와 같은 상황을 계속 만나게 한다는 것도 진리이고, 이 역시 정신의 속성이다.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이와 같은 경우도 만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만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나의 정신의 수준이 그와 같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의 정신의 수준이 이와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정신의 수준을 높여야 하는 것만이 진리이다. 묵묵히 성찰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이런 자신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째, 상대방을 도와주지도 해롭게도 하지 않는 수준, 자신의 삶만을 그냥 살아간다. 그나마 자신이 노력한 정도로는 발전한다. 이럴 경우에는 어려운 일이 있을때, 모두 내가 헤쳐나아가야 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는 거의 어렵다. 안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세상의 삶은 나 혼자서 살아가지 못하므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잘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 세 번째, 내가 만나는 사람이 힘들면 외면하지 않고 도와준다. 물론 그 사람이 어느 정도 힘든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도와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능력, 물질이 아니라 그 사람 정신을 파악하는 수준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마지막 네 번째,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주는 삶이다. 가장 어려울 듯하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지금 하는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꾸준히 자신을 성찰하다보면 어느 새 자신의 정신 수준을 파악하게 되고, 자신의 정신 수준도 알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정신을 발달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선택이라는사실도 알게 되는 것이다. 또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이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이해이다.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정신이 아니고, 도와줄 때 어떤 정신인지가 가장 중요하므로 이를 파악해야 한다. 결론은 그 상황, 현재 처한 상황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닫는 일이다. 이것을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고 '지혜'라고도 말한다.
요컨대 핵심은 물질 측면이 아니라 정신측면이다. 위 네가지 분류도 모두 정신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첫 번째 경우에도 정신이 그렇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떡이 있다고 하면, 그 떡을 내가 먹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줄수도 있다. 그런데 그 떡을 이용, 다른 사람의 정신을 현혹시키는 경우가 문제이다. 되풀이 하지만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정신이 발달하기 때문이고, 정신이 발달해야 나의 삶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 역시 필자의 정신이 필자의 삶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필자는 어려움이 닥쳐도 크게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당할 때에는 정신을 잃을 만큼 괴롭기도 하고 힘들어 한다. 그런데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용기가 나와서 담담히 이겨낸다. -이는 누구라도 그렇고, 또 지나고 보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을까하고 생각해 보니, 평소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나왔음을 안 것이다. 또 늘 긍정적인 생각이 의식 밑바닥에 깔려있어서 언제나 희망적이다. 이 역시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은 존재다라는 생각이 필자의 무의식에 깔려있어서 그렇다. 이는 필자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다 그렇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모두가 부처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동안의 업, 카르마 때문이다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론은 우리가 무의식은 알지 못해서 어떻게 하지 못하지만, 의식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으므로 의식에서나 이런 정신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정신이고, 이런 정신이 우리 모두의 삶을 이끈다. 문제는 이런 정신을 무의식에 지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깨어있는 의식 상태에서는 -절대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인간의 무의식은 깨어있는 의식으로 끊임없이 솟아 들어오므로, 나의 의식 -무의식-의 상태를 파악하도록 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여담으로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성덕임이 왜 정조의 청을 거절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성덕임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청을 받아들이면 자신보다 임금이 우선 순위가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덕임의 평소 성품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상품이었고, 이를 정조가 사랑한 듯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성덕임도 자신의 이런 성품을, -무의식에서 나오지만- 파악했던 듯. 누구라도 자신을 다 내어주면,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어려움으로 망가지기가 쉽다.
이렇듯 덕임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성품을 정조가 사랑했고, 성덕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정조의 청을 거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 -자신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을 일찍 마감한 듯하다. 성덕임의 이런 성품은 성덕임의 무의식에서 나온다. 그리고 무의식이지만, 자신이 파악했기 때문에 정조의 청을 거절한 것이다. 만약 성덕임이 지금과 같은 시대, 꿈꾸는 의식이 정신을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나', 자아가 분명한 시대에 살았다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이 지배 당하면 지배 당한 정신을 -인간은-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또 이는 꿈꾸는 의식이 지배하는 시대기 때문에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을 지킨다는 의미는 '나'가 행복해야 상대의 행복도 가능하지 '나'가 없는 상태에서 상대의 행복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현 우리 시대, '나'의식이 분명한 시대가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신의 이치를 깨달아서 물질에 매몰되지 말고 정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