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나 선인이라는 말은 고구려와 관제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sbs에서 조의선인을 고구려 특수부대로 등장시키는데요.
몇몇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무예수련집단은 존재했던것으로 압니다. sbs의 조의선인처럼요.
단군조선대 천지화랑제도가 기초로 고구려에는 조의선인 백제에는 무절 신라는 화랑도가 되었고 일본에는 사무라이의 기원이 된것으로 압니다.
제가 카페는 기억이 안나는데 밀리터리 게시판에서 퍼온것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무예수련집단에 대해서 제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조의선인이라고 알고 있고 또 지금 밑에 써있는 글대로라면 믿고 있어서요.
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十또는 七임>服) 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 선배는 머리를 박박 깍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킨다. 선배는 화랑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
화랑은 원화(源花)라는 여성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좋은 가문의 청년 중에 덕행 있는 자를 곱게 치장하여 화랑으로 만든 것에서 보듯이 외모와 몸치장을 중시하여 여성적인 반면 선배는 매우 남성적이다. 선배의 독특한 외양 때문에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의 병사들은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숭상(崇尙)한 고려의 최영 장군조차 '당이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나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라고 선배를 찬양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보고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에 나오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은 선배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조의선인의 눈부신 활약이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 안시성 전투였다. 당태종의 당군(唐軍)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많은 공성기구(攻城機具)를 사용해 안시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을 치는 바람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해 버리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기록은 이 장면을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뛰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검은 옷의 용사(勇士)들을 조의선인이라 부른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한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었고, 우리 문화전통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구려 제22대 안장왕(安臧王)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多勿邦之歌)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일본의 사무라이(武士)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내용이 더있습니다만.. 환단고기 내용이 있어서 위서 진서 논란이 있는 책의 이야기라서 뺏습니다.
첫댓글 나그네님 여기서 또 뵙습니다만... 조의(?衣)는 고구려 10관등 중 9위에 해당하는 직책이고 선인(先人)은 위지동이전에서는 대가 밑에 있는 벼슬 이름이라고 합니다. 조의는 4세기 이후에는 조의두대형으로 나타난다고 하네요. 고구려에 전투집단인 좌식자 집단이 1만명 있다는 것으로 봐서 명칭이 조의선인인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구려에도 신라의 화랑 같은 고유 무술 집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10관등 가운데 제9위에 해당된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대가(大家)들도 조의·사자(使者)·선인(先人)을 두고 이들의 직함을 왕에게 고하였다. 이로 미루어 조의는 사자·선인과 함께 원래는 족장층의 가신집단에 속한 관리였으며, 경(卿)이나 대부의 가신에 속하는 조의는 왕가의 사자의 반열에 앉을 수 없었고 걸을 때도 왕가의 사자의 행렬에 낄 수 없었다.
고구려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전환화는 과정에서 조의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화된 관등체계 속에 편입되었으며, 그 명칭은 흑색의(黑色衣)를 입은 데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의의 직임은 후세의 사령과 같은 것으로 호위 무사들의 관등이었다. 4세기 이후 고구려의 관계조직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조의는 관등명 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다만 그 흔적만이 14관등 중 제5위 관등의 조의두대형으로 남았다. 조의두대형은 고구려 최고의 신분과 계급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맡고 정사를 의논하며, 병사를 징발하고 관직을 주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하 네이버 백과사전 -조의(?衣)- )
고구려왕 아래의 지배기구로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 승, 사자, "조의, 선인"이 있으며 각 대가들이 독자적으로 사자, 조의, 선인을 설치한 것이 그것이다(한길사 한국사 이야기).. 그러므로 조의선인이 아니라 조의, 선인 구분해서 봐야 할 듯 .. 그리고 조의가 전문무사집단이나 특정한 조직체였다는 증거는 아직 확실치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름이 제대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자드님?..
그렇죠.
일본의 사무라이 기원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봐야 되죠.. ==;; 엄연히 일본 역사 내에서 파생 된 단어인데.. 너무 국수적인 생각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