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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명백한 사실에 대한 증거들을 무시하는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몇 군데만 살펴보기로 한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마 28:11-1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시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시킨다. 과거에나 오늘날에나 이런 거짓 선전에는 돈을 사용한다. 돌무덤에 넣어지고 큰 돌로 봉해졌으며, 경비병들이 철저히 지키고 있었는데 도둑질하여 갔다는 거짓말이 믿어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 속고 속이는(딤후 3:13) 세상의 모습이다. 대제사장들이 말하는 것이니 무조건 믿자는 마음이 강하다. 정상적인 대제사장이라면 당연히 진실을 말할 것이니 모든 말을 믿어주어야 마땅할 것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대제사장은 그런 정상적인 대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선생님의 말, 판검사의 말, 목사의 말, 신문 기자의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이런 사람들의 말이 훨씬 교묘한, 그리고 훨씬 위험한 거짓말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 아닌가. 물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 믿고 싶지 않지만 믿으라고 강요하는 압력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믿는 척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거짓말은 오래 갈 수는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나중에 제사장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서 도망쳤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와서 40일 동안이나 확실하게 증거하셨을 때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용감하게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자를 세울 때도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을 뽑았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행 1:21-23)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일 동안 기도하면서 오순절에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능력을 받아 담대하게 부활을 증거하되 구약성경을 증거로 내밀면서 증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눅 24:25-27; 44-48)을 반복한 것이다(행 2:14-41).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29-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진실에 대해 입을 막으려고 하였다. 반대로 마음이 열려 있는 백성은 진실이 보이고 들릴 때에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누렸다. 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복 있는 자가 된다(마 5:3).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행 4:1-22)
계속 자기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실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며 감옥에 가두고, 나중에는 죽이기까지 하는 불의를 보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세상 나라의 많은 불의에 대하여, 거짓에 대하여 타협하고 혹은 지지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이런 일을 하기가 쉬운 것 같다. 권력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앞세워 자기네 선전자로 삼아야 백성들을 속이기 쉽기 때문이고, 또 종교 지도자들 중에는 의외로 돈이나 세상의 유익에 쉽게 넘어지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남들에게는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자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세상에서 좀 더 쌓을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들이 아는 한도 내에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을 본다. 조금은 아는데 전체를 알지 못하니 왜곡된 판단을 하는 것을 본다. 특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을 주의하여 살펴보라.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잡아오라고 하는 것인가. 이 말에 대해 아랫사람들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의 진실함을 보라.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는 지도자들의 말은 니고데모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그 무식함과 거짓됨이 모두 드러나 버렸다. 그들은 남들을 정죄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자기들 자신을 정죄한 것이다. 열왕기하 14장 25절은 요나 선지자를 갈릴리 지방 가드헤벨 출신임을 분명하게 말하 고 있으며, 학자들은 호세아, 나훔, 아모스, 엘리야, 엘리사 등도 갈릴리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임을 알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수의 강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이런 예수님을 모함하고 잡고자 계획하고 있으니 얼마나 죄악된 일인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 7:37-52)
마지막으로 살펴볼 곳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어 살다가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셨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여 기록된 이야기를 읽어보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끈질기게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맹인이었던 사람을 공격하는지를 보면서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된다. 마지막에 그 맹인을 쫓아내어 버리는 것은 정상적인 법 절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충동적인 행동이요, 그 결과는 회당에서 ‘출교’해 버리는 무서운 조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맹인이었던 자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성경을 훨씬 적게 알고 있었을 그 맹인이었던 자의 다음의 말이 훨씬 성경을 아는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백성들의 지도자라고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종교의식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실제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들을 섬기고, 자신들의 유익을 찾는 모습이었다. 오늘날에도 그 전통은 변함없이, 중단없이 이어져 간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긴다고 찬송을 부르지만, 실제 삶에서도 그렇게 사는 분들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진 오늘날이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요 9:24-34)
제발 사실을 알아보고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 좋겠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부활을 비롯한 이 시기의 사건들이 한낱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추적을 시작했다가 3년여의 집요한 탐색 끝에 처음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을 만나보자. 그는 처음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고, 부활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책을 쓰겠다는 마음을 갖고 철저히 준비하여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진실한 마음으로 판단할수록 성경의 기록이 진실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나온 책은 처음에 의도했던 부활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책이 아니라 부활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책이 되었고, 그의 『누가 돌을 옮겼는가』는 부활 사건에 관한 가장 훌륭한 변증서 중 하나가 되었다. 무조건 부인하고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와 공관복음을 참으로 공정하고 진실하게 비교 분석하고 파고 들어간다면 예수의 부활이 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하버드 법대의 토대를 닦은 사이먼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예수의 부활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강의를 듣던 세 명의 기독교인 학생들의 도전을 받아들여 법정 증거를 채택하는 방식으로 문헌 증거들을 조사하다가 결국 회심하고 말았다. 당시 그가 조사한 내용을 『전도자의 증언』이라는 책에 담았다.
영국의 재무장관이었던 리틀턴 경(Lord Littleton)과 그의 친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는 기독교의 허구성을 증명하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다가 『바울의 회심과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보고서를 책으로 내놓으며 자신들의 회심을 고백하였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사실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은 좋은 자세가 아니다. 마음을 열고 “과연 그러한가” 하면서 알아보아야 한다.
요즘 2030 세대의 계몽이라는 말이 많이 들린다. 이전에는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되었다는 고백을 한다. 부정선거니 전자개표기에 의한 개표 조작에 대해 무관심하였고, 잘못된 극우 시위자들의 음모라고 조롱하였었는데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에 알아보니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60억 연봉을 포기하고 이 중대한 사실을 알리려고 나선 유명 학원 강사도 있다. 심지어 전라도에서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지지율이 30%를 넘었다는 불가사의한 일도 일어났다.
나도 불과 몇 년 전부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새롭게 배우고 있다. 그의 진정한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어 왔고, 그래서 그가 붙들어 세운 대한민국이 얼마나 왜곡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울러 누가 이런 왜곡을 시키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거의 50년간을 이런 왜곡을 계속해 온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아니 북한에 혹은 중국에 넘겨주려는 반국가 세력들이 오히려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이전에는 국보법 등으로 벌을 받던 사람들이 지금은 민주화 운동을 한 유공자들이 되어서 국가의 세금을 엄청 챙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물려준 한미동맹이 없다면,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없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공산국가가 되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다.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누가 죄인이고, 누가 내란을 주도하는 자인지를 바르게 보아야 한다. 사실을 보면서 겸손히 증거에 굴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정당한 계몽령은 수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