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암 안공 묘갈명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默菴安公墓碣銘 幷序
안환규(安煥奎) 군이 대구의 우사(寓舍)로 나를 방문하여 그 선친의 유사(遺事)를 보여주면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늙고 문장의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처방(處邦), 자는 성우(聖佑), 자호는 묵암(默菴)이다. 성은 안씨(安氏)이고 선계가 순흥(順興)에서 나왔으니, 고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의 후손이다. 문성공 이하는 문순공(文順公) 우기(于器), 문숙공(文淑公) 목(牧), 문혜공(文惠公) 원숭(元崇), 공양공(恭襄公) 조동(祖同)이 대를 이어 군에 봉해지고 시호를 받았다. 후손이 전국에 널리 퍼져 나라의 드러난 문벌이 되었다. 여러 대를 지나 휘 팽수(彭壽)가 있으니 호가 여강(旅岡)이고 황간으로부터 성주 대암(臺巖)으로 이사하여 대대로 살았다. 세봉(世鳳), 명권(命權), 택검(宅儉), 병건(柄建)은 곧 공의 고조, 증조, 조부, 부친이다. 모친은 성산 배씨(星山裵氏) 모의 따님이다.
고종 무진년(1868) 모월 모일에 공은 대암리(臺巖里) 집에서 태어났다. 외모가 단아하고 성품이 온후하였다. 어려서부터 여러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항상 어른 곁에서 모시면서 능히 말을 알아들었다. 진사 노서(老棲) 여공(呂公)에게 배웠다. 재주가 조금 더디고 둔한 듯하였으나 오직 근면하여 문예가 일찍 성취되었으나 오로지 사장에 힘쓰지 않고 자신을 닦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양친을 봉양함에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맛있는 음식을 드림이 부족하지 않고, 겨울에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을 반드시 알맞게 하였다. 선친이 만년에 병들었는데 정성을 다해 간호하여 3년을 시탕(侍湯)하는 동안 옷의 띠를 풀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제사를 받들 때는 반드시 재계하고 제복을 차려 입어 혼령이 계신 듯한 정성을 다하였다. 여러 대의 선대 묘소에 석물을 갖추고 제전을 마련하였다.
아우와는 우애의 정이 늙도록 더욱 돈독하였다.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충신(忠信)하고 관후(款厚)하게 하니 한 지방의 사우(士友)들이 모두 추중하였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와서 배우는 이들이 매우 많았는데 재능을 따라 가르쳐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가난하여 공부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또한 학자금을 도와주니,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기묘년(1939) 7월 20일에 정침에서 천수를 다하니 향년 72세였다. 묘는 벽진 가암 당산 갑좌(甲坐)에 있다.
배위는 경산 이씨(京山李氏)이니 원준(元埈)의 따님이고 백천(白川) 천봉(天封)의 후손이다. 계배는 성주 도씨(星州都氏)이니 한룡(漢龍)의 따님이고 운재(雲齋) 균(勻)의 후손이다.
2남 4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환규(煥奎)·형규(炯奎)이고, 딸은 한기석(韓基錫)·유종술(兪鍾述)·여상경(呂相卿)·이석구(李錫九)의 처이다. 환규의 아들은 용선(容善), 용식(容植), 용달(容達)이다. 형규의 아들은 용근(容根)이다.
명(銘)을 붙인다.
행실은 효제에 돈독하고 行敦孝悌
본업은 농사와 독서에 근면했네 業勤耕讀
스스로 일가의 바탕을 이루었으니 自成一家坏樸
후손에게 끼치고 쇠퇴한 풍속에 모범이 되겠네 可以遺後昆而範衰俗
노서(老棲) 여공(呂公) : 여태진(呂泰鎭, 1853∼1922)을 말한다. 자는 명구(命九), 호는 노서(老棲),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1891년(고종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白渚文集(下), 배동환 저, 김홍영, 남계순 역, 학민문화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