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시계 / 김행숙
흉기가 되도록 뾰족해졌다, 그러나 어떤 시간도 공기와 같아서 삼켜야 하는 것.
꺽꺽, 네가 시간을 뱉었을 때,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무거워진 물방울이 떨어질 때, 함께 깨지고, 합쳐지고, 한 줄기처럼 흘러가자,
물방울의 형태로 매달릴 수 없는 무게와 물방울의 형태로 매달리지 않는 무게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너는 조금 일찍 떨어져도 돼,
어떤 새가 제 무게를 견디며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겠니?
밤에, 나무에 깃든 새와 아침에, 나무를 떠나는 새는 같은 새의 다른 가능성,
다른 꿈들. 어떤 시간은 새와 같아서 구부러진 발톱으로 붙잡고, 부리로 쪼고,
작은 몸통을 울리며 신기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그때도 그랬지,
시끄럽고 끔찍한 소리를 낼 때도 우리는 귓속의 새소리를 이해하지 못했지.
새는 구멍으로 이루어진 짐승, 시간이 그런 가벼운 짐승 같아도,
물방울은 어둠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 시간을 끊으며 물방울 소리를 낸다,
그것은 참으로 끈질긴 노크소리 같구나.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죽을 때까지, 무엇을 계속하겠다는 건가, 시간의 방문 너머,
누가 앉아서 다 듣고 있는가, 중간에, 누가 아파서 누워 있는가,
바야흐로, 누가 인간의 시간을 떠나려 하는가.
몸이 죽기 전에 몸이 아플 것이며, 가벼워지기 전에 무거울 것이며,
온 세상이 침묵에 빠지기 전에 물방울 소리를 들을 것이니,
맑은 물, 뾰족한 물, 정확히 우주의 급소를 찌르는 물.
그 이후로부터 너는 시든 입술에 단 한 방울의 물도 축이길 원치 않을 것이다.
내 모서리에서 피를 흘리며 싸워 마침내 벗어나게 된다면, 돌아올 때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물방울 시계」는 일상적 세계에서 우리는 시간을 삼키며 살지만,
시의 시간은 뱉어냄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꺽꺽, 네가 시간을 뱉었을 때,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이 비유가 의미심장한 것은 뱉은 시간이란 일상적 세계에서 삼킨 시간이기
때문이다. 즉 시를 시적이게 만드는 것은 시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적
세계에서 삼켰던 것을 시적인 것으로 내뱉는 과정이다.
이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적인 순간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게 뱉어진 우리의 모습은 마치 나무에 무겁게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물방울과 같다.
마침내 나무를 벗어난 물방울은 “함께 깨지고, 합쳐지고, 한 줄기처럼 흘러”간다.
2연에 이르러 물방울의 생동감은 새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새 역시도 마치 물방울처럼 매번 다른 가능성으로 가득 찬 존재이다.
“밤에, 나무에 깃든 새와 아침에, 나무를 떠나는 새는 같은 새의 다른 가능성,
다른 꿈들”인 것이다. “새는 구멍으로 이루어진 짐승”이고,
“물방울은 어둠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 시간을 끊으며 물방울 소리를 낸다,”
놀라운 것은 다음의 구절. “그것은 참으로 끈질긴 노크소리 같구나.”
즉 시는 물방울이 나뭇가지를 벗어났다는 것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떨어진 물방울이 나무를 벗어남으로써 발생시키는 ‘노크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노크소리는 단순히 물방울이 ‘우연히’ 내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지속하겠다는 선전 포고이며,
“몸이 죽기 전에 몸이 아플 것이며, 가벼워지기 전에 무거울 것”을 각오하겠다는
선언이며, “온 세상이 침묵에 빠지기 전에 물방울 소리를 들을 것이니, 맑은 물,
뾰족한 물, 정확히 우주의 급소를 찌르는 물.”로서만 존재하겠다는 예언이다.
시는 현실의 논리를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다르게 돌아오느냐이다. 또한 돌아와서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치지 않고 다시 두드리고 두드리려는 의지이다.
그러니 시는 하나의 부메랑. 새처럼 벗어나고 칼로 되돌아온다. 시를 읽는 우리는
돌아오는 칼을 위해 스스로를 과녁으로 내모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계간 <애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