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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루살렘 성전은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예수님의 예언과 성취-예수님은 성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1-44)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인가에 대해 대답하셨는데,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이 예언을 하신지 약 40년 후인 AD 70년에 성취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만 해도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특히 이때의 성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를 보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 13:1-2)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 21:5-6)
예루살렘 성전은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 후 헤롯대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두 배 이상으로 크게 증축하였다. 주전 19년에 시작된 예루살렘 증축은 82년이 지난 후인 주후 63년에서야 끝났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모양이나 장식도 매우 아름다웠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성전 겉면이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그 위에 해가 비치면 사람들이 눈을 뜨고 바라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성전에 대한 사람들의 칭송은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의 기록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그는 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티토가 예루살렘을 에워싸자, 예루살렘의 기근은 극에 달했으며, 그들은 나중에 먹을 것이 없어지자 가죽 제품이란 가죽제품은 모조리 삶아먹을 정도였다. 심지어 어느 여자는 살아있는 자기 자식을 삶아 먹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나중에 로마군인들이 예루살렘 함락 후에 약탈하러 각 집을 방문했다가 굶어죽은 시체들이 방에 가득한 것들을 보고 망연자실할 정도였다.
티토는 몇 번이나 항복을 권유했지만, 강경파 유대인들에게 장악된 예루살렘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로마군에 의해서 죽은 사람보다 굶거나 강경파에 의해서 살해된 사람이 더 많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무려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결국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으며, 성은 초토화되었고, 성전의 돌은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파괴되었으며, 이스라엘 국가는 와해되었다. 남은 백성들은 병약한 자들은 로마군에 의해 학살되고, 건장한 자들은 노예로 끌려갔으며, 나머지 유대인들은 나라없이 떠돌게 되었다. 이후 예루살렘은 1967년에 유대인들이 되찾게 될 때까지 무려 1,900년간이나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그동안 예루살렘에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로마 군대의 힘을 이용하여 성전을 철저히 파괴해 버리신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인 유대 사람들의 죄악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의 파괴에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구약 제사가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는 바(히 9:12 ; 10:12), 이제 더 이상 구약 시대처럼 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성전 파괴의 사건을 통하여 확실히 보여 주신 것이다(히 7:27 ; 10:18).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시대의 흐름이요, 우리는 겸손히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오늘날 파괴된 과거 예루살렘 성전터에는 황금돔 모스크 사원이 서 있다. 시오니즘(Sionism)을 추구하는 자들이 성전 재건 운동과 제사 부활 운동을 벌이며 성전 탈환을 목적으로 분주히 활동하고 있지만, 구속의 원리로 볼 때 거기에서 또 다시 속죄를 위한 제사가 드려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2. 교회는 유대교와 결별하였다
유대교 그리스도인의 문제-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를 보면 유대교를 믿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중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특히 약속의 표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세기까지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소아시아 안디옥에서 토요일은 복음서의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바울처럼 유대인의 한 분파로서 회당에 갔다. 그리고 주일에는 헬라그리스도인들과 교회로 모였다. 그런데 4세기에 이르러 숫적으로 우세해진 헬라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영적 형제인 이방교회와 육적 형제인 유대인 회당 사이에서 한 가지만 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민족을 버리고 교회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그리스도인들은 그때부터 유대적 뿌리로부터 끊어졌고, 철저히 헬라적 토양의 교회에서만 존재하게 되면서 사도행전의 주역이었던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3. 성전의 시대가 끝났음을 확실히 말해주는 히브리서의 가르침
십자가 이전에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 시대였으니, 구약 시대는 제단(祭壇, altar)이 필요한 시대였다. 그러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희생 제사를 온전히 드리셔서 제사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제사를 완성하신 시대인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이 신약 시대에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 자체가 단번에 제사를 드려서 제사 제도 자체를 완성하시고 구약 시대에 제사하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의도를 다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그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가 된다는 놀라운 인식이 생겼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 의식을 제사와 가깝게 이해하여 여러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 아님을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이제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그 앞부분을 제단이라고 하지 않으며, 그 위에 십자가나 촛대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제단(altar)이라는 용어를 온전히 버리고, 떡과 포도주가 놓여 있는 곳을 성찬상(table)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그저 단순히 용어만 바꾼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는 제사가 이루어진 후에는 더 이상 제사 드릴 것이 없음을(히 10:18) 성경에서 바르게 배워서 그것을 온 세상에 선언하면서 이로써 십자가 이전 시대와 십자가 이후 시대를 완전히 “구별하는” 일, 그야말로 “획기적(劃期的)”인 일을 한 것이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나 교인들이 ‘제단’이나 ‘성전’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데, 결코 성경적이지 않고, 개혁자들의 가르침과 맞지도 않은 것이다.
4.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이름들과 그 의미
신약성경에 나타난 아름다운 이름은 ‘교회’이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영광스런 존재요, 사탄이 흔들 수 없는 견고한 구원의 방주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신약성경에서는 이 교회를 몇 가지 표상(表象)들을 사용하여 그 성격이 어떠함을 가르쳐 준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이라는 말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If one part suffers, every part suffers with it; if one part is honored, every part rejoices with it)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Now you are the body of Christ, and each one of you is a part of it)”(고전 12:26-27)
에베소서 1:23은 보편의 교회에 적용하는 말로 이 말을 썼는데, 고린도전서 12:27에서는 보이는 하나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로 표시했다. 그러므로 보이는 이 지방의 지교회 하나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더라도 도무지 성경에 비춰서 잘못된 말이 아니다.
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고 이 통일이라는 것은 믿는 사람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신비의 연합’을 이루었다는 터 위에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통일성이라는 것은 조직체(organization)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organism)를 의미한다. 유기체라는 말은 마치 한 사람과 같이 하나의 생명으로 전체가 하나의 구체적인 격(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체라는 것은 하나의 격을 이룬 존재 여럿이 모여서 하나의 단체를 조직한 것이라는 말인데, 교회는 그러한 단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말할 때 비록 사람은 여럿이지만 그 지향하고 요구하는 바 통일성이라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의 통일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썼고, 그 머리는 물론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러 군데에서 말씀했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며,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몸을 이룬다고 가르쳤다.(롬 12:3-8; 고전 12:12-31; 엡 1:22-23; 5:23). 교회를 생각할 때에 ‘성전’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의미를 잘 살려 지체의 역할을 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둘째로 ‘하나님의 성전’ 이라는 말로 교회를 표시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고 하였는데, 이 이름은 장래의 이상적인 교회, 완성된 교회, 보편의 교회에 적용하지만, 또한 베드로전서 2:5에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여 성전을 예상하면서 그런 것을 썼는데 이 표상은 교회는 지극히 거룩한 불가침의 것으로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는 까닭에 지금도 지극히 높은 성격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때에도 꼭 본상의 교회만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한 교회에도 이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에베소서와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전’이나 ‘신령한 집’은 교회로 모이는 교인들 즉 신앙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지, 예배당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두 곳 모두 ‘너희도’라고 말한 것을 주의해 보라.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건물은 ‘예배당’ 혹은 ‘교회당’ 혹은 ‘예배 처소’라고 부르면 족하다. 다시 말하지만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의 ‘성전’은 사라졌다. 어느 교회에서는 건물에 ‘대성전’ 소성전‘ 등의 이름을 붙인 것을 보는데 이는 옳지 않은 일이다.
셋째로 디모데전서 3:15에서는 “너로 ‘하나님의 집(God’s household)’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라고 말했다. 집이라는 말은 건물도 의미하고, 가정도 의미하고, 한 민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윗의 집” (시 7:13: 슥 13:1)이라고 한 것은 다윗의 가계(家)를 말하는 것이요, “이스라엘의 온 집”(렘 2:4: 겔 20:40: 행 2:36)이라고 할 때는 이스라엘의 한 민족을 집이라는 말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집’이라는 말이 때에 따라 어떤 것을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집’이라 할 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가정이요, 집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가장으로 계셔서 친히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통재하시고 주장하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지지하시는 가정이라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식이 분명하면 교회의 행정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자기의 꾀를 부리지 않고, 자기는 그 집의 어떤 일을 부분적으로 맡아서 봉사하되 그것을 자기 힘으로 지지해야 하겠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 교회 즉 ‘하나님의 집’을 세우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여호와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이 집에서는 가장이 하나님이신 것이 확실해야 한다. 목사나, 장로가 가장 노릇을 해서도 안 되고,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다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자가 가장 노릇을 해서도 안 된다. 목회자도 성도도 모두 가장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경을 통하여 말씀으로 가르친 바를 따르고, 충성되고 진실한 청지기로, 그리고 가족의 일원으로 자기의 본분을 다하면 된다.
아울러 서로간에는 한 가족이라는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한 아버지를 통하여 형제자매가 되었으니 얼마나 가까운 핏줄인가. 요한사도가 그것을 잘 말씀해 주셨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자매된 다른 교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은 신뢰하기가 어렵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리고 자기 집안을 의식하는 자녀는 자기 집안의 명예를 존중하고, 집안이 잘 되기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자기 때문에 가장이나 가족이 욕을 먹지 않기를 힘쓴다. 교인이 자기 교회를 생각할 때에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의식이 분명해야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뜻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넷째는 또한 교회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the Jerusalem that is above)”(갈 4:26)이라 혹은 “새 예루살렘(the new Jerusalem)”(계 3:12 21:2) 혹은 “하늘의 예루살렘(the heavenly Jerusalem)”(히 12:22)이라는 말이 있는데, 구약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룹 사이에 거하시는 뜻으로, 표상적으로 거기서 그 백성과 만나신다는 뜻으로 썼다. 성막 안에는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의 뚜껑을 시은좌(座), 즉 속죄소라 하고, 속죄소에는 금으로 붙여서 친 그룹들이 있는데 거기에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쳐서 하나님의 쉐키나 구름이 그 위로 하늘까지 뻗어 올라갔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백성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표시하고,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은 특별한 영광이 있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교회를 말하면서 이 예루살렘에 대한 생각을 넣어 가지고 ‘새 예루살렘’이라고 한는 것은 ‘하나님이 거기 거하시며 자기 백성과 만나시는 곳이요,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이고 그 백성은 여기서 하나님과 교통을 할 수 있는 거룩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처소가 부분적으로 아직은 지상에 있지만, 이것은 원래 하늘에 속한 것이요, 위에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먼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란 표현 속에는 “아래에 있는 예루살렘”도 있다는 것을 상정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당시에 성전이 있었으며, 산헤드린 공회가 있고, 대제사장과 율법사들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운집해 있는 곳, 즉 율법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교회를 의미하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를 받았건, 아니 받았건과는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갈 4:25-26). 전자는 아직도 율법에 종노릇하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섯째는 디모데전서 3:15에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도 있지만 계속해서 “진리의 기둥과 터(the pillar and foundation of the truth)니라” 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교회라는 것은 그 각 부분도 다 그렇지만 교회 전체가 진리에 대해서 좌대(臺) 노릇을 한다는 뜻을 보여준다. 진리를 제고(提高)하고 선양하며, 보관하고 진리의 보루 노릇을 하고 그 수호자 노릇을 하며, 모든 하나님 나라의 원수 앞에서 진리를 지키는 자라는 말씀이다.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모든 교회는 역사를 통하여 흐르는 주류(主流)의 신앙과 그 신학을 이 시대에 받은 자로서 이것을 전파하고 또한 다음 시대에 전수(傳授)할 사명을 명심하고 이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거기에 따른 대소(大小)요리문답, 예배 모범과 교회 정치, 그리고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모두 중요한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칼케돈의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도르트 신조, 기타 교회가 가장 존중해 오던 역사적 문헌으로서 위와 같은 신앙을 잘 나타내는 문헌들을 존중하면서 늘 교회의 예배와 목회와 생활에서 그 뜻을 드러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본질을 버리고 혼합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많은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지금까지 교회의 이름을 살펴보았는데 그 이름 하나하나가 얼마나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놀랍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자꾸 ‘성전’이라는 이름을 교회라고 혼동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이런 아름다운 이름들을 사용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이 가진 깊은 뜻을 잘 살려내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루고 있는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은혜가 있고, 자유가 있으며, 영광스러운 성격을 드러내며 받은 사명을 잘 이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인 동시에 또한 승리하는 교회라는 사실이다. 땅위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정사(政事)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신들을 대적하여 싸워 나가는 것이니(엡 6:12). 우리 각 사람은 장성한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노릇을 하며(딤후 2:3) 주님이 보내시는 싸움터로 나가 마귀의 세력과 대결하여 힘써 싸워 이기고, 이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에 주님께로부터 의(義)의 면류관을 받아야 하겠다(딤후 4:7-8).
5. 용어는 사상을 나타내고 문화를 형성하니 주의하고 주의하여야 한다
우리는 ‘근로기준법’을 시행하며 ‘사용자’와 대비된 단어로 ‘근로자’를 사용하지만, 좌파 세력과 언론은 ‘노동자’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다. 일상 언어 철학에 영향을 미친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를 규정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러시아 공산혁명 지도자였던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동일한 사안이라도 동지와 적을 대할 때 각각 구분해서 용어를 사용하라. 적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부정적인 용어·언어를 구사해 비판하고, 동지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고 순화된 용어·언어를 사용했을 때 선전선동에 유리하고 혁명이란 목표 달성에 효과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우리는 어떤 용어·언어를 사용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시대를 살면서 계속 ‘성전’을 즐겨 사용하면 그의 사상이나 신앙에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아름다운 이름들을 사용하면 그의 사상이나 신앙도 그것과 같은 색깔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 기도할 때에나 찬송할 때에, 특히 설교할 때에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목회자들을 비롯한 직분자들이 먼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용어를 사용하면서, 잘못 사용하는 교인들을 잘 이끌어줄 수 있으면 교회의 성격도 달라지고, 생활하는 모습도 아름다워질 것이다. 아무리 오래 붙들어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것이 드러나면 기꺼이 버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을 바르게 배우려고 하고, 그 배운 성경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려고 하며 나아가는 겸손한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