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金宗直)의 ‘영화모란(寧畵牧丹)’에 얽힌 사연
오늘 사기영선 강의에 앞서 홍두표 유생이 멋진 필체로 칠언절구 두 구절 '雪裏寒梅雨後山(설리한매우후산) 看時容易畫時難(간시용이화시난)'을 칠판에 적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나는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16세 때에 지은 시제 ‘寧畵牧丹: 차라리 모란을 그릴 것을’임을 알았다.
사실 칠판에 적은 두 구절은 ‘寧畵牧丹(영화모란)’시의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에 해당한다. 전구(轉句)와 결구(結句)가 누락된 셈이다.
이 시에는 사연이 있다.
1446년(세종 28년) 청년 김종직이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소과에서 白龍賦(백룡부)를 지었다.
시관들이 시류를 비판하는 글이라는 이유로 낙방시켰다. 이때 당대의 대학자인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대제학이었다. 대제학은 직분상 시관(試官 :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 관계한 관원)을 겸하게 된다. 당시 김수온은 세종의 총애를 받는 집현전 학사중 한 사람이였다. 당대의 석학인 신숙주, 성삼문 등과 비견될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영중추부사를 지냈고, 훗날 ‘식우집(拭疣集’)이라는 문집도 냈다.
김수온은 낙방한 시험지들을 응시자들에게 돌려주다가 김종직의 ‘백룡부’를 읽게 되었다.
‘백룡부’를 읽고 탄복했다.
'비록 낙방했어도 장차 대제학이 될 만한 글 솜씨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심끝에 김수온은 김종직의 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세종에게 아뢰었다.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학문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세종이 김종직이 지은 ‘백룡부’의 깊이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세종은 과거에 급제하지도 않은 김종직에게 영산훈도(靈山訓導 : 고을 시학관)를 제수하며 학문에 더욱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김종직이 고향으로 돌아오려면 한강을 건너야 한다. 한강가에는 제천정(濟川亭)이 있었다. 그곳에 쉬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寧畵牧丹: 차라리 모란을 그릴 것을'
雪裏寒梅雨後山(설리한매우후산) : 눈 속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은
看時容易畫時難(간시용이화시난) : 보기는 쉬우나 그림으로 그리기는 어렵구려.
早知不入時人眼(조지불입시인안) : 진작 사람들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알았다면
寧把臙脂寫牧丹(영파연지사목단) :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이나 그릴 것을
이 시의 시제는 ‘차라리 모란을 그릴 것을(寧畵牧丹)’로 알려져 있다.
김종직이 16세 때에 과거에 낙방하고 귀향하면서 한강의 제천정(濟川亭) 벽에 붙여 놓았다고 알려진 시다. 세상에 대한 열정도 컷지만, 그에 비례하여 실망감도 컸던 그가 젊음으로 인해 직설적으로 표현한 글을 보고 혹자는 가벼운 처신이라고 흴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인생의 경험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詩)는 은근한 맛이 있어야한다.
슬픔을 표현하는 경우 슬프기는 하지만 겉으로 슬픔을 나나내지 않는 표현 즉 ‘애이불비’(哀而不悲)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돋보이는 시적표현이다.
김종직의 경우 눈속에 핀 매화와 비온 뒤 산을 보면서 이것들은 보기엔 쉽지만 그리기엔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작 많은 사람들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않았다면 차라리 여자들이 화장할 때에 입술에 바르는 연지로 그리기 쉬운 모란을 그려보았을 것을 하면서 후회는 모습이 읽혀진다. 직설적으로 표현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다.
김종직은 시심도 대단하지만 시문 속에서 풍기는 화자의 은근과 끈기도 놀랍다. 연지로 모란을 그리기는 쉽지만, 매화와 산을 그리기엔 어렵다. 그것을 몰라주는 세인들의 마음의 눈을 안타까워 하는 듯한 생각도 내포되어 있다. 이 점에 이르러서는 ‘애이불비’를 벗어 난 표현처럼 느껴진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시관들의 안목이 눈 속의 매화를 볼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는 추측도 든다.
그후 김수온이 제천정을 지나다 현판의 시를 보았다. 김수온은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시를 읽었다. 담백하면서도 대가의 향기가 풍기는 시였다.
"이것은 반드시 지난날에 ‘백룡부’를 지은 사람의 글 솜씨일 것이다."라고 했다.
김수온이 시를 읽고 몇 번이고 감탄했다. 뒷날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과연 김종직이군 하고 되뇌었다고 한다. 이렇듯 인재를 알아보는 식감(識鑑)을 볼 때 김수온도 특출한 인재였음이 틀림없다.
예나 지금이나 선수가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김종직의 인물됨을 살펴보면,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일선(一善)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은 사림파의 거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