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하루에 네 번뿐인 산골이었다. 눈이 쌓이면 길이 막혀 하루가 조용히 갇히곤 했고,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지면, 홀로 마당을 지키는 우리 집 강아지 여덟이의 구슬픈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이곳에서 일곱 남매와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열한 식구가 같은 지붕 아래 모여 살았다. 아버지의 외벌이는 언제나 빠듯했고, 우리 밥상은 늘 사람 수에 비해 작았다. 그런데 그 작은 밥상이 가장 넉넉해지던 순간이 있었다. 엄마가 “라면국수”를 끓일 때였다.
언제나 그랬듯 엄마의 찬장 속 라면은 늘 모자랐다. 아껴놓은 수프 봉지 하나와 반쯤 부서진 면 뭉치가 전부인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김치를 한 대접 꺼내오고, 찬장에서 국수 한 움큼을 찾아냈다. 양은 냄비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김치가 먼저 들어갔다. 김치 국물이 퍼지며 국물 색이 깊어졌고, 곧 라면 면발이 잠시 출렁이다가 사라졌다. 라면이 풀리려는 찰나,엄마는 국수를 턱 하고 풀어 넣었다. 그러면 국물이 묘하게 진득해졌다. 라면보다 김치와 국수가 훨씬 많은, 엄마만의 가짜 라면.그런데 우리에겐 가장 진짜 같은 따뜻함이었다.
큰 대야 같은 양푼에 라면 국수가 옮겨지면, 숟가락과 젓가락이 달그락거리며 모였다. 누가 먼저 먹겠다고 다투기보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가운데 모두가 동시에 “호” 불었다. 열한 입이 내는 소리는 그 자체로 합창처럼 들렸다. 국물이 부족하면 엄마는재빨리 주전자 물을 조금 더 부어 맛을 다시 맞췄다. 어쩐지 싱거워졌을 법도 한데, 그때마다 김치가 남은 힘을 다해 국물을 다시 붉게 물들였다. 엄마는 늘 마지막에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괜찮다.” 하면서도, 일곱 남매 그릇마다 국수 한 올이라도 더 얹어 주던 손길. 그 손길이 집안의 법이었고, 사랑의 순서였다.
라면 국수에는 각자의 몫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김치를 더 얹어드셨고, 할머니는 면보다 뜨끈한 국물을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퇴근 후 무거운 어깨를 풀듯, 마지막 남은 국물을 들이켜며 “살 것 같다.”라고 하셨다. 막내는 라면에서 건져 올린 파 조각 하나를 보물처럼 씹었다. 나는 그 모든 모습을 말없이 훔쳐보며, 집이라는 게 꼭 넓은 방이나 많은 반찬에서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배웠다. 배를 가득 채우지 못해도 마음은 이상하게 배불렀으니까.
라면 국수 한 그릇은 우리의 수많은 겨울밤을 데웠다. 특히 눈이 와 길이 끊긴 날엔 더욱 그랬다. 바람이 문틈으로 파고들 때, 냄비 속 국물은 우리를 서로에게 더 가까이 앉게 했다. 그 순간만큼은 가난이 우리를 작게 만들지 못했다. 모자람은 서로의 그릇으로 흘러가 채워졌고, 작은 그릇들이 모여 하나의 큰 온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도시에 나와 바쁘게 살아도, 쌀쌀한 바람이 불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엄마의 라면 국수다. 편의점 라면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진득함. 그 국물 속에는 한입 덜어주고, 마지막 숟가락을 미루던 마음이 녹아 있었다. 온도를 높이는 건 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가끔 나도 냄비에 물을 올린다. 김치를 먼저, 라면을 조금, 국수한 줌. 톡톡 끓는 소리를 들으면 부엌 공기가 옛집처럼 변한다. 그리고 엄마처럼 누군가의 그릇에 면 한 젓가락을 더 얹어 준다. 길게 위로할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따뜻함이 국물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라면 국수는 내게 가난의 상징이 아니라, 나눔의 문법이다. 적으면 나누고, 모자라면 보탠다. 한 그릇을 열한 그릇처럼 나누는 일, 그 소박한 기적이 우리 가족을 이어 주었다. 우리는 라면의 면발처럼 각자 뻗어 나갔지만, 한 냄비에서 시작한 국물의 맛을 공유한다. 그래서 내게 집밥의 다른 이름은 “엄마의 라면 국수”이다. 식으면 다시 데우면 되고, 모자라면 조금 더 보태면 된다. 우리의 행복은 늘 그렇게,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