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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집기독교서점[문화선교/기독교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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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글 스크랩 버러지 같은 야곱
기쁨지기 추천 0 조회 56 08.12.05 22: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버러지 같은 야곱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성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가운데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일들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인간들이 수동적으로 혹은 기계처럼 반응한 것은 아니다. 신적이고도 위대한 하나님의 행하심과 인간적이고도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이 서로 날줄과 씨줄로 교직하면서 짜내려간 천이 다름 아닌 성서다. 그러니 성서는 가장 신적인 책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책이기도 하다.

 

성서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 가장 인간적인, 그래서 땀 냄새가 나고 좀 만만해 보이는 사람은 누굴까? 교우들에게 물어 보았다. 한 자매는 베드로라고 답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모습이 가장 인간적이라고 했다. 한 형제는 가룟 유다나 데마라고 했다. 인간적으로 치자면, 예수님을 믿었지만 끝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간 그들이 가장 인간 냄새가 날 것이라나.

 

우리 집 딸아이는 다윗이라고 했다. 초등학생이니 ‘그냥’ 이라고 했다. 다윗은 가장 매력적인 인간형이지 않을까 싶다. 음악을 사랑하고, 시를 즐기고, 용맹무쌍한 무장이고, 일국을 다스리는 왕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가장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은 누가 가장 인간적인가? 아마도 그것은 당신 자신을 반영할 거다.

 

어찌되었건, 나는 단연코 야곱을 꼽는다. 야곱이야 말로 인간 내면의 숨은 속살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품었던 야망, - 다른 사람들은 비전이라고 하지만, 나는 야망이라는 단어가 더 야곱스러울 듯하다. - 그 야망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벌인 천연덕스러운 거짓과 사기극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족장의 반열에 든 사람, 야곱이 평범한 인간의 전형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서의 백성들을 이스라엘이라 불렀다. 아다시피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 이름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 건국과 왕국의 영웅 다윗도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런 위인들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역사와 신앙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이스라엘이 민족적 정체성을 예시하고, 그들의 진면목에 이스라엘이 가장 어울린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야곱의 인생 회고이다. 삶은 고난이다. 이것이 삶에 관한 거짓 없는 진실이다. 고난 없는 생을 누군들 바라지 않을까마는, 피하거나 건너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도 고난 속에서 울부짖고 기도했거늘 하물며 우리랴. 그런 우리네 범인들은 야곱이 말한 바,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야곱도 나처럼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구나.” 우리는 야곱이고, 야곱은 우리의 이름이다.

 

그런 야곱의 삶을 읽어내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야곱을 야곱답게 한 것, 야곱의 생애를 험악하다고 말하게 한 것,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이어 자신의 이름을 추가하게 만든 것, 한 민족의 이름과 국가의 이름이 되게 한 것, 그 동력과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나와 너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세 단어이다. 야망, 방법, 은혜.

 

야곱의 야망

 

야곱은 야망의 사람이다. 야곱은 그의 야망으로 인해 야곱이고, 이스라엘이 되었다. 야곱의 숱한 약함과 악함,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족장의 반열에 올라선 것은 그의 야망 하나로 설명된다. 이 야망이 없었다면 야곱은 더 이상은 야곱이 아니다. 야곱을 야곱답게 한 것이 야망이었고, 야망 때문에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에서와 비교해 보면 안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다 잃어버린 에서와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다 얻은 야곱의 차이는 야망이 있고 없음, 단 하나다.

 

성서의 수많은 인물과 야곱을 구별해 주는 것이 야망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십 수 년 간 미적거렸다. 모세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발을 빼려고 했다. 요셉과 다윗은 나이 어린 탓에 자신들을 향한 부르심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연단의 과정 속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서서히 깨달아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형과 씨름했고, 나면서는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다. 그는 단연코 야망의 사람이다.

 

문제는 야곱의 야망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야곱의 그것은 비전이라는 고상한 단어로 색칠하기에는 축복이라는 단어가 걸린다.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욕망이라고 이름하기에는 그는 형 에서와 견주어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한다. 육체의 사람, 에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을 소망하는 이 사람이기에 야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얼추 드러나듯이 야곱의 야망은 이중적이다. 에서와 견주어 거룩한 것을 사모하는 영적인 사람이지만, 언제나 하나님과 조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는 상당히 육적인 사람이다. 벧엘에서, 그리고 얍복강 나루터에서도 그는 조건으로 내 걸었다. 순수한 듯하면서도 결코 순수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그는 인간적이고, 우리를 닮았다. 그렇다고 “이건 아냐, 너무 순수하지 않아”라며 내치기에는 순수한 사람, 그가 야곱이고, 우리는 야곱이다.

 

“이런 더티한 인간을 선택하다니 하나님도 참 이상하시다.”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만과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 기만이라 함은, 자기는 안 그런 척 한다는 것이다. 터놓고 말하자. 너나 나나 모두 약한 존재이고, 악한 자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왜 야곱을 사랑하는 것이 이상한가. 그런 못되고도 야릇한 야곱을 사랑하셨기에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야곱을 선택하면 이상하고, 나를 선택하면 이상하나?

 

오해라 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기준을 그릇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치고 완전한 사람 하나 없다. 하나님은 통(通)을 좋아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른 사람의 전부, 곧 통째로 사랑하시고 사용하신다. 하여 그의 악함과 약함도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의 장점 하나만으로도 능히 선택하신다. 야곱을 유별나게 하는 것은 야망이다. 열심과 욕심, 야망과 욕망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있지만 그의 야망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은 능히 그를 즐겨 사용하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예수 팔아 밥 먹지 않겠다고 만인 앞에서 호기롭게 장담하고 고백하던 순간을. 그리고 그런 나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던 많은 선후배, 친구들을. 그 순결한 순간마저도 나는 불결했고, 거룩한 간증의 시간에도 저속했고, 하늘을 말하면서도 나는 땅을 밟고 서 있었다. 나의 헌신과 섬김 이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이기적 욕심이 개입하고 있는지... 야곱은 나를 읽는 프리즘이고, 나는 그를 창으로 삼아 사람들을 본다. 야곱 같은 사람들을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야망 때문에, 비전과 욕망 사이 어디쯤엔가 위치한 야망 때문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고뇌를 본다. 파스칼은 인간을 천사이면서도 동물이라고 했다. 인간은 천사처럼 고결하면서도 동물처럼 야만적이다. 자칫 잘못하면 동물적 삶으로 전락하고, 잘 승화시키면 천사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양면성이 인간의 인간다움이자,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가장 골칫거리로 등장하는 까닭이다. 파스칼이 야곱을 알았더라면, 천사이면서도 동물인 인간을 야곱이라 했을 것이다.

 

야곱의 방법

 

야곱의 신앙에 이중적 야망과 포부가 혼재하여서 그런지, 아니면 나면서부터 생래적인 그의 성격과 성품 때문인지, 아니면 앞서 가는 자의 뒷덜미를 나꿔채기 위해 쫓아가는 자의 속성 탓인지, 아니면 그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부채질한 이후로 더 강화된 것인지, 그 어느 하나라고 딱히 단정할 수는 없고, 그 모든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인데, 어찌되었건, 야곱은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야망을 이루고자 한다.

 

세상에, 나면서부터 먼저 태어나지 못한 것이 서러워 형의 발꿈치를 잡지 않나, 형의 약점을 붙잡고 단팥죽 한 그릇으로 그것과 족히 견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장자권을 간단히 빼앗고, 늙으신 아버지의 눈과 귀, 손을 속여서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챈다. 그는 야망의 사람인 동시에 거짓의 사람이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 형과 아비를 속이고, 어머니마저 이용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가 야곱이고,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목전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예수고 뭐고, 가족이라도 뒷전이 아닌가.

 

하지만 그 결과, 그가 얻은 소득은 대단했지만, 그는 참담한 날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의 노여움과 형의 증오, 그런 큰 아들이 행여나 자신이 편애하는 작은 아들에게 칼부림을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염려를 뒤로 하고 낯선 곳에서 사기라면 한 수 위인 외삼촌 라반 밑에서 수모와 경계 속에서 눈칫밥으로 근 이십년을 보내야 했다. 잠시 보낸 아들을 어머니는 영영 보지 못했다. 아, 모진 인생이여.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 백 삼십년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NIV는 힘들고 까다롭다(difficult)로, KJV은 악하다(evil)고, NASB는 불쾌한, 공동번역처럼 궂은 삶이라는 뜻의 단어(unpleasant)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의 일생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그가 바라마지 않던 야망들, 어려서부터, 아니 나기 전부터 품었던 포부를 이룬 다음에도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고되고 고생스럽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다.

 

왜 그런가? KJV의 번역처럼 악한 삶, 즉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의 삶이 얻은 것에 본인 스스로의 내면은 즐겁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쉬운 성경은 정말 쉽게 번역했다. “제 조상들보다는 짧게 살았지만 고통스러운 삶이었습니다.” 그렇다. 그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지만, 야곱의 고통은 일면 인간의 조건도 없지 않다. 허나, 그가 자초한 측면도 크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던가.

 

야곱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혹독하다. 도망가듯 고향 떠났고, 어머니와 생이별한 땅에서 다시 볼 수 없었고, 라반에게는 열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사기를 당했고, 자기 아들들도 야곱에게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것을 일러바친 요셉은 미움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종내는 그 옛날 에서가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대로, 그 아들을 죽이려고 했고, 노예로 판 다음에 능청스럽게 염소의 피를 바른 채색 옷을 들고 와서 그가 죽은 것이 맞지 않냐고 확인해 보라 한다.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대작하는 광풍을 만나 죽음 직전까지 간다. 그런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다. 전혀 외적 시련에 까딱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로마 황제 앞에 설 것이고, 승선한 사람 모두의 안전이 바다와 배에 관한 한 문외한인 바울 한 사람의 손에 맡겨놓으셨다는 간밤의 말씀이 있었던 탓이다. 그것만으로 바울의 의연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야곱에게도 약속이 있었지 않았나.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행 27:25) 야곱은 기다리지 못했고, 바울은 기다렸다.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때를 당기려고 했고, 바울은 다름 아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하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말씀을 믿었다. 생각해 보라. 야곱이 믿지 않았다면 그런 대담하고도 뻔뻔한 행동을 자행했겠는가. 다만 야곱은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으니 인생 고달플 수밖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았던 유혹의 본질도 따지고 보면 방법의 문제다. 마귀도 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만 마귀는 높디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무사한 이적을 보임으로 자신의 신성을 입증하라고 꼬드긴다. 어차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는 일점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는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쇼를 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그냥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를 향해 “왜 그러시느냐고, 꼭 이 방법 밖에 없느냐”고 거친 질문을 던지면서도, 사람들의 온갖 조롱과 멸시를 감내하면서도 그냥 계셨다. 피조물 전체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예언자 쟈크 엘룰은 에베소서의 영적 전투에 관한 구절을 해석하면서도 마귀가 아니라 마귀의 간계를 주목한다. 말이 통하는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하면 ‘방법’(method)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반하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애매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지점, 곧 대의의 정당성에 기대어 수단의 정당화를 꾀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본질이자 방법이다.

 

요즘처럼 비전이 중시되는 때, 비전이 없으면 방자해진다고, 비전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윽박지르는 때에 그 누구도 비전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일러주지 않는 듯하다. 아직도 고지론이 횡행하지만, 정작 그 고지에 올라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들리지 않는다.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다름 아닌 평화라 했다. 야곱이 품었던 야망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분에게서 온 것이 맞는다면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했고, 하나님의 시간이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우리의 방법이 과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지 점검한다. 야곱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하나님을 향한 큰 포부를 품고 있는가, 라고. 야곱은 재차 묻는다. 너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과 명분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지 않는가, 라고. 그래서 너의 인생을 험악한 세월로 만들겠는가, 라고. 야곱의 야망을 예수의 방법으로 성취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나님의 은혜

 

야곱의 초상화에 걸맞는 이름은 지렁이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사 41:14, 새번역) 아예 공동번역은 구더기 같다고 했고, 개정판은 버러지라 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동물을 불결한 존재로 기억하지 않으신다. 우리 문화와 다르지 않나 보다. 지렁이나 벌레는 말 그대로 버러지를 의미하는 표상일 따름이다. 한 마디로 보잘 것 없는 미물이라는 뜻이다. 가치 없다는 말을 그리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구더기요 버러지라면,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라면, 야곱이 버러지라면, 하나님은 버러지의 하나님이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낮추어 말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너네는 정말 버러지 같은 존재야.” 이건 마귀의 말이다. 그렇게 읽으면 시험든다. 지금 하나님은 야곱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말하고 계신다. “나는 정말 버러지들의 하나님이다. 나는 버러지들도 사랑한다.”

 

기막힌 일이다. 성경에는 받을 만한 가치 없는 이들을 사랑하고, 크나 큰 선물을 공짜로 마구 주시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 은혜다. 야곱이 야곱된 것은 야망도, 방법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야곱의 야곱됨과 무관하게 베푸시는 그분의 미친 사랑의 결과가 야곱이다. 바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라 하지 않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야곱의 생애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축복을 얻기 까지 인내했던 야곱의 인내가 아니라 지렁이 같은 야곱을 참아 주셨던 하나님의 인내를 증거한다.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을 기념하여 받은 것이다. 정직하자. 야곱이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주셨다고 해야 옳다. 그러니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왕자’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앞서 버러지라는 단어와 연결하면 야곱은 하나님도 능히 이기는 사자라는 말이다. 어떻게 고약한 야곱이 왕자요 사자란 말인가? 이게 어디 될 법한 말인가?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가 있으니 바로 은혜다.

 

시편 22편은 어느 고통 받고 자아상에 큰 손상을 입은 한 사람의 슬픈 노래다. 그 6절은 이렇다.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일 뿐입니다.” 다윗일게다. 그런데 이 시편은 정작 이 시편의 주인공을 다윗으로 한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7절)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본 듯한 구절이고, 대목이 아닌가?

 

혹여 그래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한 가지 힌트를 더 주고 싶다. 이 시편의 첫 구절은 이렇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이제야 생각나는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은 자기 자신을 벌레로 인식한다. 공동번역은 적절한 단어로 번역했다. 나는 구더기요, 천더기라고. 다윗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고, 심한 고통 속에서 구더기만도 못하다고 탄식했다.

 

자신이 그러했기에 우리 예수님은 버러지와 구더기 같은 사람들을 귀히 여긴다. 어부, 세리, 여인, 죄인. 하나같이 좀 있다 하는 사람들 눈에는 지렁이 같다. 그건 단지 사람들 눈에만 그럴 뿐. 진실은 아니다.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어 본 분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내면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당신이 버러지가 되어보신 분, 그래서 버러지 같은 야곱을, 그리고 버러지보다 못한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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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2.06 15:54

    첫댓글 우리가 인간(야곱과 같은)임을 인정하는 것...인식하는 삶은..하나님 앞에서 아주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인간이기때문에)이 이유가 되는 삶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의 합리화를 위한 야곱의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또한 주의가 필요치 않을까?은혜..100번 공감. 그래도 우리는 열매처럼 익어야 하고.. 벼처럼 숙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학이 고개 숙여... 가만 있어도 찾아가고픈...그래서 공감하고...그게 이쉽다. 가슴없이 똑똑만 한 곳에서....정말 그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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