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도/ 김준한
어느 가수의 첫 소절이 가슴에 떨어지는 순간
살갗은 잠겼던 문을 열고,
금 간 나날에 묻혔던 기억들을 세웠다
한 음을 캐기까지
곡괭이는 얼마나 많은 나날을 두드렸을까
마른 숨이 목구멍을 찢고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어둠을 적실 때마다
검은 암반 속에서 한 음의 광맥을 캐냈을 것이다
일찍 배워버린 막막한 어둠의 깊이
사랑도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일이어서
한 삽씩 더 깊이 들어갈수록
삽날처럼 날카로운 무관심에 걸려 엎어졌다
가난은 오래도록 주머니 속에 초라한 손을 넣었지만
내 삶이 흙 벽처럼 무너진 자리마다 시의 씨앗을 묻었다
굳어진 손으로 낡은 펜을 쥐고
낮에 삼킨 모욕을 밤의 갱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새벽
내 안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묵은 슬픔을 꺼내 젖은 벽 사이에 새겼다
땀방울과 배고픔 베이지 않은 채
단지 별빛을 그워하는 마음과 꽃을 노래하기 위해
시인을 꿈꾼 것이 아니다
무너진 날들의 돌무더기 속에서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문장 한 줄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탄가루 같은 절망의 색이 묻었다
내 생은 오랜 상처를 닦으며 휘어진 철사로 버티며
부러지지 않는 문장의 갱목을 세우는 노동
더는 내려갈 곳 없는 생의 밑바닥
손금 깊어진 맨손을 움켜쥐고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말을 캐기 위해
오늘도 너의 등불도 없이
내 생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옆구리 터진 나날/김준한
김치찌개 된장찌개,
언제나 주목받는 것들이
빈 숟가락을 채우고 젓가락을 오만하게 세운다
입 안에 넣으면 금방 탄로 나는 맛이건만
거짓이 짙을수록 더욱 화려해지는 고명
가난이 찰지게 눌어붙은 자에게
허락된 자리는 귀퉁이뿐이었을까
투박한 손아귀에 짓눌려 돌돌 말린 세월
서로가 따뜻한 국물 같은 눈물 한 방울만
건네주었어도 나는 갈라진 목구멍으로
씹히지 않는 시간을 삼키진 않았을 것이다
옆구리가 터진 김밥 한 줄
아무리 꼭 눌러 말아도 안에서 부푸는 것들은
끝내 밖으로 밀려 나오는 모양이다
젊은 날 빈 호주머니 속을 돌돌 말아 쥔 손처럼
단추를 채우고 또 채워도
가난은 쉽게 접히지 않았다
하루를 몇 번씩 꾹꾹 눌러 말았지만
밤이 되면 어디선가 한 귀퉁이가 터져
밀린 슬픔이 삐져나왔다
옆구리 터진 나날
세상이 내 삶을 세게 쥐어서가 아니었다
안에 너무 오래 가둬 둔 것들이
더는 안쪽에 머물 수 없어
제 살을 조금씩 밀어내며 틈을 만들었다
밀어내야 했기에
조금씩 벌여 스스로 상처를 만든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오른 김밥
동전 대신 바람이 파고드는 호주머니
고개 쳐드는 물가 때문에
세상은 비명 지르지만,
이제 횡보하던 바닥 딛고 반등할 수 있을까
분주한 좌판 상인들
백열등이 자른 어둠의 단면 사이로
오색빛깔 환한 웃음 드러낸다
음판화/김준한
하늘은 무엇을 새기려고 저 토록 날카로운 칼을 들었을까
밤새 빗물이 새긴 자리가 더 깊이 파였다
삶을 새겨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날을 만져보면 손아귀에 힘주었던 순간들이 손 끝의 기억에 걸리지 않는다
깊이 새길 수록 더 많이 뜯겨 사라지는 삶이라니
일어나지 않은 일과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칼끝 하나 대지 않은 기대였으나
이별로 새겨진 음각은 텅 빈 흔적일 뿐
한낮의 태양은 양각이 되지 못한 꿈을 닮았다
젖은 허공 위에 그은 전선은 아무리 제 속을 길게 끓어도 어제와 오늘을 이을 수없다
퇴근길 전철은 하루 종일 깎여나간 사람들을 싣고
삐뚤하게 그린 피로 위에 졸음을 꾸벅꾸벅 새긴다
깊어진 그리움은 점점 그 모양을 잃어 이제는 그날의 체온을 느낄 수없다
쉬는 날이면 아무런 약속 없이 무뎌진 칼을 내려놓는다
조그만 식당에서 한 끼를 새겨 넣는 일도
그 한 장면을 남기는 순간
파이지 않는 가난이 나무판 위의 여백처럼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긁어도 닳지 않는 이 권태와 무료는 어쩌면 좋을까
하루를 새길 때마다 깊이 파인 저녁 안엔 또다시 어둠이 차오른다
먹장어 / 김준한
야행성인 그녀는 해가지면 생의 바닥으로 내려가
죽은 것들의 체온을 더듬는다
제대로 배운 뼈대 없어 곧게 세우지 못한 몸
꿈틀거리는 꼬리뼈 하나로 건넌 망망한 세월,
벗어나기 위해 제 손으로 당긴 그물에
가늘고 길게 버텨 온 생을 묶었다
펄 같은 골목에 먹빛이 질척하게 차오르면
낡은 간판들이 감았던 눈을 부릅뜬다
허기진 그물들이 골목을 펼치고
선창 같은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이 선명해지면
그녀는 고국에 남겨둔 식구들의 허기까지
제 몸에 감고 물의 저울 위에 오른다
손마디 하나는 방세가 되고 핏줄 몇 가닥은 약값이 된다
문이 열릴 때마다 웃음 한 조각이 칼등에 벗겨지고
문이 닫힐 때마다 한 토막의 시간이 거스름돈 없이 접힌다
칼등이 지나간 자리마다 짜디짠 시간이 벗겨지면
몇 근의 웃음이 물컹한 살 속에 남을까
미끈한 몸을 훑는 손을 허락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더 세게 몸부림칠수록 싱싱한 값이 붙는다는 것을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기름진 살을 찾거나 누군가는 질긴 껍질을 찾는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거칠어지는 칼끝
그녀는 끝내 버텨온 등줄기를 베어 준다
첫차가 골목을 쓸고 지나가면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둠의 좌판을 거둔다
밤새 팔리고도 아직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건
미끈한 점액 묻은 어둠 한 줄기
꿈꾸는 마천루/김준한
젊은 날 뜯겨나간 꿈의 단면이
가슴속에 수갈래 골목을 꺾는다
수직의 몸을 세우는 도시는
또다시 허공의 턱을 한 층 더 넘고
옆으로 걷는 가난은 제 그림자에 발목이 잡힌다
용역 사무소 앞 줄담배 끝에 매달린 이름들
호출을 기다리는 동안
물 한 모금 없는 시멘트 가루처럼
서로의 걱정을 비비며 오늘의 품삯을 반죽한다
누군가는 고층의 층계를 따라 올라가고
매달리지 못한 꿈들은
배정받은 지하로 스며들었다
이마등을 켜자 빛의 추궁에 달아나는 어둠
삽 끝이 찍은 자리마다
한때 들끓던 청춘처럼 솟는 샘물
깊이 파인 지난 시절 곳곳에
출렁이는 망치 소리 고인다
출구를 더듬던 슬픔도
하루를 세운 철근에 엉겨 붙으면
세상의 찬 바람을 미는 벽이 될 수있을까
가슴 깊은 곳 하루를 버티는 힘이 기둥처럼 박힐 때
지상을 들어 올리기 위해
오늘도 지하는 깊어진 어둠의 밀도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