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거 1-3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학습한 경험이 있다. 그 변화에 동참하지 않으면, 개인의 생명, 나아가 나라의 존폐까지 달려있음을 -우리 모두는- 충분히 학습하였다. 결과, 현재 누구 할 것없이 모두가 이 변화에 모든 촉각이 가 있다. 그래야만 겨우 이 변화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교육이 백년대계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미래가 아이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도 거의 식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집중해야 하는지를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 정신과학적 관점이다.
인간의 의식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변화를 눈치채기는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교육이 '백년대계이기 때문에'라는 문장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문장이 유교적인 관점, 임금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나라를 걱정해서,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하기 위하여, 그런 아이들을 기르고자 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이는 바탕에는 그 시대의 인간의 의식이 깔려있고, 또 그 시대 인간의 의식은 인류의 진화에 따르는 의식이 바탕이 되어서 그 -조선-시대의 의식이 형성되었다.
인류의 의식은 꿈꾸는 의식 -15세기 이전-에서 '나'의식이 분명한 의식으로 발전하였다(슈타이너의 주장). 꿈꾸는 의식과 '나'의식의 차이점은 정신이 전달되는 상황이 다르다. 꿈꾸는 의식은 꿈처럼 흐릿한 의식이지만 분명히 체험되는 의식이다. 정신이 이처럼 꿈처럼 흐릿한 의식으로 체험되어서 전달되므로,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신이 이렇게 전달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유교 풍습 등이 정신으로 꿈처럼 흐릿하게 체험되어 전달되므로, 그 정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사고하기가 어렵다. 꿈처럼 그냥 받아들여져서, 그 정신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과 같이 인간의 '나' 의식이 분명한 시대라면 조선시대의 정신은 다르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70년동안 재임하여서 여러가지 행사가 열린다고 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반면 해체하자는 주장도 있다. 여왕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의식이 과거와는 달라졌으므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지금의 의식시대에 맞게 구현해야 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의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 역시 그 시대에 받아들이는 인간들의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란 질문이 든다. 시대에 맞게 받아들이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새로운 가치, 미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가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결국은 정신이다. 정신은 다른 말로 인간이 가진 의식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 정신이 나를 지배하고, 시대를 창조하며 나아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다. 언제나 보이자 않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간과하지만, 이것은 진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왜 인간의 정신이 발달하는 시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지. -그것이 궁금하기는 하다-. 인간의 정신도 태어나자 말자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일정한 발달단계를 거쳐야 완성된다.
인간의 발달단계를 인간의 내부 관점으로 보면, 정신이 발달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정신이 온전하게 발달할려면 이 시기에 아이들의 본성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정신으로 시대의 의식도 보고, 새로운 미래 가치도 창출한다. 문제는 말은 -아이들이- 그래야 한다고 해 놓고 하는 행동은 정 반대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대의 조류, 인간의 내부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로 인하지만, 이런 시대의 조류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하면, 현재 아이들의 정신이 대부분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한다. 거의 망가져서 학교를 나온다고 해도 된다. 필자가 과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발달하는 시기에 내부를 보호하지 않고 외부로 문을 열게 하면, 아이들의 정신이 자라지 못하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정신이 온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이 발달하는 시기에 아이들은 자신의 정신의 발달을 모른다. 주위에서 아이들이 발달하도록 돌봐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그냥 주위에 따라서 자신의 정신이 망가지기도 하고, 대부분이 망가진다. 두 번째, 이런 주위의 상황이 시대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아이들 역시 시대에 맞는 교육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인간 정신의 발달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따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 따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부분이 가장 문제이다. 사람들의 의식이 모두 시대의 조류에 지배를 받아서 따라가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본성을 고집한다면, 살아남기가 어려울 듯도하다. 과거 '조르다노 부루다노'가 시대 정신에 저항하여 화형을 당했듯이,
다음의 글을 보면 그의 심정이 이해된다.
"그러니 그가 노예가 되거나 사악해지지 않도록 하소서. 쇠사슬에 묶이거나 쓸모없어지거나 눈이 멀거나 옥에 갇히지 않게 하소서. 그의 육체는 그에게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니.... 그리하여 그는 운명에 강인하게 맞서고 고통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가난과 질병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니... 저에게 내리소서. 하느님, 제가 불꽃으로 화하려 합니다(발도르프 학교이야기, 8년간의 교실여행, 2017, 171)."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가 된다. 시대의 조류는 인간의 의식이고, 이 의식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 교육의 결과이며, 가장 중요한 것,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을 모른다는 것이다. 항상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세 번째, 인간의 정신이 형성되는 시기에 어떻게 형성되었든 그렇게 평생을 살아간다.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 내지는 정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정신에 이끌려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자신의 의식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할려면 아이들의 정신이 발달하는 시기에 절대로 내부를 보호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시대의 조류에 따른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맞는 교육이다.
마지막, 인간의 본성은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고, 반드시 자신의 본성을 이해해야, 비로소 이해하기 때문에 교육이 교사 자신의 본성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교사가 자신의 본성을 파악해야 아이들의 본성에 다가간다는 말이다. 더불어 아이들을 통해서 교사 자신의 정신이 발달하기도 한다. 슈타이너는 이를 '교사의 업이 아이들을 통해서 해소된다'고까지 표현하였다. 현재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로 전락한 교육이 과연 방향을 틀 수 있을까란 의문은 들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도 없다. 다른 대안을 마련한다는 것도 외부에서 지식의 관점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역시 같은 결과가 된다.
결론은 인간의 본성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따른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성은 교육자 자신의 본성과 함께 가야 교육이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로, 언제나 우리의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준칙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담으로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산과 성덕임의 사랑이야기가 나온다. 배우들의 의식이 쭈욱 연결되어야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촬영을 나누어서 하므로 의식이 쭈욱 이어지기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 특히 세손 때의 이산과 정조 때의 이산,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이산의 의식을 표현하기는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의식을 표현해야 시청자들이 그 인물에 몰입한다.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인물의 의식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정신은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결과로 보여주고, 반면 겸손하지 않고 오만하면 그 결과 역시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갔지만, 이 원칙만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삶을 살았던 이 결과에 어긋나지 않았던 것이다. 책에 나온 지식으로 알면, 자신의 삶(정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신의 무의식에 이러한 원칙이 내재되어 있어야 자신의 삶을 그렇게 살아간다. 누구라도 자신의 무의식을 알지 못하므로,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삶에서 이런 마음을 간절하게 갖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이 아직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먼저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 아이들이 우리들의 미래이지만 곧 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잘 보살핌으로써 나의 정신이 성장하는 것이다. 정신은 모든 존재가 같은 하나의 존재일 때 비로소 -정신이- 발달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게 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인류의 의식이 발달해야- 할 것 같다. 결론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아이들의 정신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이 발달하는 시기에 절대로 보호해서 망가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이런 문장이 생각난다.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보살피는가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준다(위 책,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