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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평화를 주소서
나의 아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아주 심하게 입덧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아주 가난한 부부였고, 먹는 것도 부실하였지만 나는 정성을 다하여 아내를 보살필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아내는 거의 음식을 먹을 수 없고 굶으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면서 매일을 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출근하는 아내는 물만 먹어도 토할 지경이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쓰러지면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들쳐 업고 가서 포도당 주사를 맞고 다시 근무하러 학교에 가곤하였습니다. 지금처럼 의료보험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병가를 받을 수도 없고, 출산 전후에 휴가를 받지도 못하여 아기를 낳기 며칠 전까지 학교에 출근하고 출산휴가는 꼭 30일을 넘지 못할 때였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정말 가난하게 살 때 아내는 입덧 때문에 너무도 고생하면서 그렇게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지긋지긋하던 입덧은 임신 8개월까지 끌고 가서 앙상한 뼈만 남은 아내를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아이를 낳다가 혹시 나는 아내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체격도 작고, 골반도 좁은데다가 입덧으로 너무 몸이 약해져서 걱정이 되어 도무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하여 죽기 살기로 첫 아이 젬마를 낳았습니다. 혼절해 있는 아내를 보면서 나는 주님께 매달리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아이는 바짝 마른 채 태어났지만 새까만 머리하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 아이를 보면서 밤을 꼬박 새우는 것입니다. 너무 아파서 잠을 못자는 줄 알고 걱정이 되어서 안절부절 못하였는데 아내는 자신이 낳은 애기가 너무 신비롭고, 사랑스러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배냇저고리를 입은 아기를 품에 안고 정말 신비한 듯 바라보면서 모든 아픔을 잊고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 그렇게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내는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와서 그 죽음을 잊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한 아기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는 새벽녘에 겨우 눈을 붙이고 깊이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이를 보면서 나는 참 평화를 느꼈고 또 보았습니다. 잠든 애기와 엄마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모습은 5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가슴에 짙고 깊게 간직된 평화스런 모습이고, 행복한 모습이랍니다. 그렇게 아주 어렵게 낳은 큰 딸 젬마가 병원에서 제왕절개수술을 하여 손녀를 낳을 때 아내와 똑 같이 그렇게 행복해 했습니다. 그 모든 아픔을 잊고 정말 평화스럽게 잠드는 것을 보고 엄마의 자리를 다시 가슴에 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 때 천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라고 노래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착한 목자들은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뵈면서 그 평화를 느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견디며, 자신을 갈기갈기 찢는 아픔을 체험한 엄마들은 아기를 보면서 참 평화와 행복을 간직하고, 사랑스런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주님께서 주신 평화와 행복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평화'(平和 ; Peace)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다시 찾아보았는데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남기고 주신다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엄마들이 죽음을 이기며 아기를 낳은 다음에 느끼는 그 행복과 평화를 뛰어넘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으면서 얻을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 평화는 말 그대로 하느님과 사람을 서로 이어서 본드처럼 붙여서 하느님과 사람을 당신을 통하여 대등하게 이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평화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얻은 사랑의 새로운 생명을 다시 우리에게 송두리째 주시고자 하시는 평화인 것입니다. 엄마가 자신의 피와 살과 뼈를 빚어 태안에 있는 아기에게 나누어주고, 그 아기를 죽음과 같은 아픔을 통해서 세상에 낳고, 자신의 피와 살을 다시 품에 안을 때 간직할 수 있는 그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군인들이 주님을 잡으러 오는 데도 주님은 ‘조금도 마음이 산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지만 죽음과 같은 아픔을 마다하고 아기를 낳으려고 하는 엄마들의 마음으로 주님은 평화를 남겨두시고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그 평화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가슴에 새기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지금 잡혀서 온갖 수난을 당하실 주님은 아버지께 다녀오는 것이라고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기를 낳으려는 엄마가 집안 식구를 안심시키며 기뻐하라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주님의 평화를 받아 누리려고 하는 나의 부끄러움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죽음을 넘나들며 낳아 준 아이들이 사랑과 평화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고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살았음을 반성합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나, 아내가 아이들을 낳았을 때나 그 평화와 사랑을 나는 언제나 잊고 살았답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축일4월 30일 성 비오 5세 (Pius V)
신분 : 교황
활동 연도 : 1504-1572년
같은 이름 : 비우스, 피오, 피우스
교황 성 비오 5세는 1504년 1월 17일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 교외 보스코(Bosco)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본래 이름은 안토니오 기슬리에리(Antonio Ghislieri)였다. 그는 어린 시절 목동으로 양을 치며 지내다가 14살 때에 보게라(Voghera)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1521년 5월 18일 수도서원을 하고 미카엘(Michael)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한 다음 1528년에 제노바(Genova)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파비아(Pavia)에서 16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며 교수로 재직했다. 1550년에 이단자들의 피신처로 스위스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코모(Como)와 베르가모(Bergamo)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어 성실히 직무를 수행했고, 당시 교황청 검사성(檢邪省) 장관인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a) 추기경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검사성의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555년 카라파 추기경이 바오로 4세(Paulus IV)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그는 신임 교황에 의해 네피(Nepi)와 수트리(Sutri)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어 1557년 3월 15일 추기경이 된 그는 다음 해에 검사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566년 1월 교황 선거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마지못해 교황직을 수락하면서 교황명을 전임자인 비오 4세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비오 5세로 정했다. 교황 성 비오 5세는 즉위 이후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 트리엔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년)의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교황이 된 후에도 수도자의 절제된 생활 양식을 지켜나갔는데 교황복 안에 수도복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그는 추기경단의 개혁을 시작으로 주교와 사제들의 상주 의무를 비롯해 공의회의 개혁 규정들을 각 교구 내에 도입하고, 수도회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다. 그가 교회 개혁을 하면서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전례서의 개혁이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정신에 따라 1566년 “로마 교리서”(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를 출판하면서 젊은이들에 대한 교리교육이 모든 본당 사목자의 의무임을 강조했다. 이어서 1568년에 “로마 성무일도”(Breviarium Romanum)를 개정하고, 1570년에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을 새로 출판했다. 그는 또한 불가타(Vulgata) 성경 개정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e Aquino)의 전집을 새로 발간케 하는 한편 1576년 3월 11일 그를 교회 박사로 선포하였다.
교황 성 비오 5세의 재임 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와의 갈등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에 종교 재판소를 설립하고, 영국 가톨릭 신자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애썼지만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의 화해에 실패하면서 1570년 2월 25일 회칙을 통해 여왕을 파문하였다. 그는 또한 서유럽 그리스도교 전체를 위협하던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Osman Empire)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동맹을 호소하여 1571년 8월 8일 베네치아(Venezia)와 에스파냐와 함께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결성된 연합군은 1571년 10월 7일 그리스 남쪽 코린토스만에서 터키군과 대적하여 레판토(Lepanto)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교황 성 비오 5세는 전투에 참전하는 군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묵주 기도 바칠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신자들과 함께 로마에 있는 도미니코회 본부인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Santa Maria sopra Minerva) 성당에서 승리를 위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묵주 기도를 바쳤다. 그는 레판토 해전의 놀라운 승리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로 인해 가능했음을 믿으며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선포하였다.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는 이 축일의 명칭을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하였다.
수십 년 동안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정신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교황 성 비오 5세는 1572년 5월 1일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혔는데, 1588년 1월 교황 식스투스 5세(Sixus V)가 그의 시신을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Maggiore Basilica)으로 옮겨 화려하게 장식한 새 무덤에 안치하였다. 그는 선종한 지 100년이 지난 1672년 5월 1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712년 5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전통적으로 매년 5월 5일에 기념했었는데, 1969년 전례 개혁 이후 4월 30일로 변경하여 보편 전례력에서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비오 5세 (Pius V)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