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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기는 삶-전에는 너희가 그러나 이제는
1. 기도 시간에 늘 울면서 죄를 자백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항상 죄를 짓고 허물이 많은 저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엔 울며 회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고개를 쳐들고 떳떳해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항상 그렇게만 한다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의 전부일까 궁금해집니다. 만약 거기에서 끝난다면 기독교는 참 슬프고 괴로운 종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 그에 따르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말씀하시지만,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시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 모든 죄와 형벌을 다 해결해 주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셔서 이제는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전에는 너희가 그러나 이제는”의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에서 “그때에”: 혹은 “전에는” 이라는 말씀과 “이제는”이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13)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놀랍게 변했는지 신비롭기만 합니다. 이제 슬퍼하며 울고 있을 수 없고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합니다.
2.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다음 찬송을 대단히 좋아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나서 죄를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평안이 느껴지고, 감사가 넘쳐나는 찬송입니다. “나의 모든것 다 변했네”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라고 증거합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를 믿는 자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가는 참 자유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가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찬송가 421장 내가 예수 믿고서
1) 내가 예수 믿고서 죄 사함 받아 나의 모든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가 씻겼네
2) 주님 밝은 빛 되사 어둠 헤치니 나의 모든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주 앞에 온전케 됨은 주의 공로를 의지 함일세
3) 내게 성령 임하고 그 크신 사랑 나의 맘에 가득 채우며
모든 공포 내게서 물리치시니 내 맘 항상 주 안에 있겠네
<후렴> 나의 모든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3. 갑자기 사도신경을 기억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아름답게 나타나 있는데 간단히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에서는 창조와 섭리를 고백하고 의지합니다. 창조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특히 섭리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 믿어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바른 기독교 신자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말하며 우리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은혜를 고백하고, 장차 심판하러 오실 것까지 고백합니다.
다음에는 성령님의 사역과 교회에 대하여 고백하는데 이미 이루신 것을 확신하며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을 다시 살피면서 여기에는 우리가 죄와 비참함에 대하여 한탄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보이지 않고, 오직 삼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장차 영생에 들어가기까지 교회 안에서 은혜를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신경은 세례를 받을 때에 가장 기본적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들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하고 통곡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어떤 놀라운 일을 하셨고, 지금도 하시고 계시는지를 바르게 알고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의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자를 보내주시고, 그가 피흘리기까지 고난을 당하사 이루신 구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가볍게 여기고 계속 자기 죄만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을 만난 자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것과 찬송가의 찬송을 부를 때마다 고백하는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가사 내용을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저는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제1문을 자주 생각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의 목적이 잘 설명되어 있고, 우리는 날마다 시간마다 이 목적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잘 설명한 다음 내용이 너무 좋아서 좀 길게 인용합니다. 이 설명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해하고 있는 시간보다는 하나님을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기를 힘쓰는 삶을 사는 데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에서 가르치듯이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순서로는 ‘나의 죄와 비참’(Misery)을 바르게 깨닫고, ‘나의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의 구원’(Deliverance)에 대하여 온전히 깨달으며, 그리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삶’(Gratitude)을 힘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불교나 샤머니즘의 정서가 남아있어서 ‘나의 죄와 비참’(Misery)에 머물러 있으면서 울부짖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제는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는 바른 것을 배워서 잘못된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탕자가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푸는데 아들이 자기는 죄인이라면서 그런 것을 거절하며 울고만 있으면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요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 확신하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1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1-3)
장로교회의 대/소요리문답 제1문
대1문) 사람의 제일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충만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소1문)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1.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 섬김과 즐김
장로교회의 대/소교리문답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가르치는 문답으로 시작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하나님 중심주의적’ 특징을 첫 교훈부터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본분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섬김과 그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 그러므로 장로교회가 이해하고 가르치는 성경의 교훈은 ‘하나님 중심주의’야말로 ‘인간의 참된 행복’과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을 균형 있게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구원을 무엇보다도 앞세우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분리되어 삶의 즐거움은 교회 밖에서 찾는 이원론적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구약과 신약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의 본분을 강조하여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친히 선포하시며(사 43:12; 60:21),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도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릴 것’을 서원합니다(시 86:8-13). 사도 바울은 모든 만물의 기원이자 결국이 되시는 주님께 세세에 영광을 돌리며(롬11:36), 구원받은 성도는 그 몸으로, 즉 모든 삶을 드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권면합니다(고전 6:20). 사도 요한은 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천상의 예배 장면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계 4:11). 구원의 참된 은혜를 온전히 받아누리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의 진정한 의의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서 찾습니다! 신앙의 성숙, 참된 경건은 바로 이런 삶의 목적이 바로 서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2)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기는 삶
인생의 참된 목적의 다른 측면은 하나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두 교리문답들이 이런 정의를 뒷받침하는 성경의 증거구들을 살펴보면,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기업으로서 누리는 축복들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죄와 사망에서, 환란과 고난에서, 심령의 고뇌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주님, 우리가 의지하고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주님, 우리를 친 백성으로 삼아주셔서 이땅에서의 복락과 영원한 나라에서의 축복을 맛보며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고백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기는 삶’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사도 요한은 장래의 일을 비전으로 보는 중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곧 임마누엘의 축복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그 결과 타락으로 말미암은 죽음과 그 모든 악한 결과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을 기대합니다(계 21:3-4).
칼빈과 사돌레토 추기경
칼빈과 파렐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교회 헌장 및 성찬과 권징을 둘러싼 문제로 제네바에서 추방된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추기경이자 온건한 에라스무스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던 사돌레토(Jacopo Sadoleto)는 제네바를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 진영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제네바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거기서 사돌레토는 ‘오직 자신의 영예와 이익을 위하여 책동하였던 자들에게 유혹을 받은’ 시민들이 이제 ‘영원한 구원’을 생각하여 다시 ‘어머니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친절하게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노선을 유지하기를 원하였던 제네바 시 당국은 염치불구하고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칼빈에게 사돌레토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칼빈은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를 전해 받은 지 엿새 만에 자신의 답변서를 완성하였고, 시 당국은 칼빈의 답변서를 추기경의 편지와 함께 묶어 출판하였습니다. 칼빈의 답변은 아주 훌륭하였으며, 나중에 루터조차 그 글을 읽고 아주 감탄하면서 ‘상대방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훌륭한 답변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이 답변서에서 우리가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과 관련하여 주목할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칼빈은 ‘영생의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도 높이 강조하는 사돌레토의 태도를 비판합니다:
“사람이 오직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이 그의 삶의 기초가 되지 못하는 그런 신학은 결코 좋은 신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지,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롬 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에서 말하듯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면,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사람들이 마음에 더 잘 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그 일을 촉진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열망을 우리의 구원과 불가분리하게 연결시켜두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정이 우리 자신의 유익과 복락을 위하는 모든 생각들을 능가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단지 그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하여 씨름하는 것보다 더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칼빈은 우리의 구원이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며,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인간의 구원과 인생의 참된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따로 떼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칼빈은 잘 지적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신앙은 ‘인간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라는 인식입니다!
사돌레토 추기경의 편지에 대한 답변서에서 칼빈은 이신칭의의 교리와 같은,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여러 교리들에 대해서도 아주 뛰어난 표현들을 들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는 이 부분을 이 답변서의 백미로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일찍부터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을 ‘우리의 구원’보다 더 높은 가치로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바로 그런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신실하게 전수받아 파수하고 있습니다.
김진흥, 『교리문답으로 배우는 장로교 신앙』, 21-24
5. 세 가지 구원의 지식
개혁교회의 유서 깊은 교리문답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유일한 위로’라는 주제로 시작합니다. 살거나 죽거나 간에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나의 몸과 영혼이 모두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유명한 고백을 맨 처음부터 가르칩니다(HC 제1문답). 그것이 왜 강력한 위로가 되는지, 성경의 증거구절들에 근거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들을 들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성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주시는 확신과 순종의 마음이 바로 그 유일한 위로가 근거하고 있는 든든한 기초입니다.
두 번째 문답에서는 이런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또 죽기 위하여 알아야 할 세 가지 지식을 가르칩니다: ‘나의 죄와 비참’(Misery), ‘나의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의 구원’(Deliverance), 그리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삶’(Gratitude)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세 가지 지식은 로마서의 구조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구원의 지식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경의 네 가지 용법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줄 뿐 아니라(HC 제3-4문답), 동시에 그 뜻대로 살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드러내고 책망합니다: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HC 제5문답). 그러나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죄와 비참의 처지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긍휼이 유일하신 중보자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우리는 에덴동산 이래로 인류에게 제시된 이 구원의 은혜, 곧 ‘하나님에게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다’는 사실을 성경에 기록된 거룩한 복음을 통하여 알고 믿고 의지합니다(HC 제18-19문답).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회개의 삶을 열심히 실천합니다(HC 제88-90문답). 그래서 십계명의 교훈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고 벗어버리고,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런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마음에 새기고 삶에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훈련하는 성경의 기능과 유익을 풍성하게 활용할 때, 우리는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서 살아가는’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김진흥, 『교리문답으로 배우는 장로교 신앙』, 3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