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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Epimetheus
이강산
프로메테우스는 현명한 자 였지만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는 어리석은 자 였다고 전해진다. 태초에 신들은 이들 형제에게 만물들이 삶을 영위할 능력을 한 가지씩 나눠주는 일을 맡겻다. 그런데 어리석었던 에피메테우스는 짐승들에게 모든 재주를 나누어 주어 정작 인간들에게 아무 능력도 주지 못했다. 이에 프로메테우스는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또한 앞선 사건으로 분노한 신들의 복수를 경계한 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아내로 삼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세상에 만악이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인류와 어리석음은 태초부터 함께해 왔다고 전해온다. 불로 대표되는 인간의 힘의 전래가 어리석음으로부터 기인하며, 인류최초의 여성인 판도라의 어리석음으로 인류의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어리석음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신화는 그 의미가 현실적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는 가장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버린 역설에 직면해있다. 가속화되고 다양화되는 변화로 인하여 인류는 역사상 가장 불확실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무지는 필연적으로 어리석은 상태를 낳는다. 구체적으로 개인은, 내가 속해있는 2016년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는, 이 불확실성은 큰 두려움이다. 미래직업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불안한 보고, 그리고 막연해서 와 닿지도 않는 전문가들의 대안, 변해가는 인구구조와 산업구조로 이 시대 청년들은 불안하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처럼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시금 두려움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과거 유망직종으로 여겨지던 많은 직종들이 변하는 시대에 사장되어 왔다. 예컨대 산업 분야에서 자동화가 추진되면서 유통 기록원. 비행기 항법사, 등의 직업이 사라졌다. 청년들에게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는 두려움의 동의어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피엔스`를 통해서 나마 통찰력을 얻기를 바랬다. 인류역사의 방향성을 조망해 나마 올바른 방향을 잡는 혜안을 얻고 그로 인해 불안함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사피엔스`의 구성을 통해서 그 방향성을 살피고, 각 시대에 인류의 대응을 알아보고자 했다.
우선 책의 구성을 통해 인류역사의 방향성을 살펴봤다. 이 책은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통합, 과학혁명이라는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4부에 걸처 종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4장에 걸친 추보식 구성을 통해 살펴본 인류역사의 방향성은 명징했다. `힘의 증대와 어리석음` 이었다. 저자는 4부에서 이 점을 강조하며 독자들의 고민을 촉구한다. 신의영역을 넘볼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인간은 아직도 어리석음을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다. 이는 1부에서 Homo sapiens라는 네이밍이 뻔뻔하다는 저자의 언급과 맞물리는 바였다. 생각을 촉구하는 훌륭한 문제제기였다. 그러나 인류역사의 방향성이 `힘의 증대와 어리석음`이라는 통찰은 나의 선택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혜안은 아니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오히려 가중되었다. 인류가 이카루스처럼 추락할 운명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각 시대를 살았던 인류의 대응을 알아보기로 했다. 조상들이 문제를 극복해온 과정을 통찰해서 다가올 미래에 대응하는 혜안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어리석음을 순응할 용기를 가지기로 했다. 이는 처음 책을 읽을 때와 상반되는 태도이다. 어리석음을 물리칠 혜안을 얻어 두려움을 물리치기보다 받아들일 용기를 얻기로 한 것이다. 이는 무지와 변화의 필연성에대한 이해에 기인한다.
인간에게 무지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처음`사피엔스`를 읽었을 때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로인해 고통 받는 존재로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무지가 달리 보였다. 인간은 무지로 인해 고통 받는 만큼이나 무지로 인해 진보에 이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사기극 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류가 농업으로 인해서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악하게 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농업으로 인해 인류의 행복도가 떨어진 것이다. 또한 인류는 농업으로 발생한 집단생활로 질병에 취약해지고 농업이전 선사시대의 조상들보다 체구가 작아졌다. 실로 인간이 무지로 인해 고통 받는 존재로 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농업은 인류생존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70억에 이르는 인류대부분이 농업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국가들이 농업으로 인한 식량안보가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분쟁은 불가피하다. 또한 인류역사에서 농업이 없었다면 인류의 체계적인 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문명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이 농업이라는 `사기`(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덕분 이었던 것이다. 만약 초기인류가 농업으로 인해 불행해 질 것을 알고 있었다면 수천 년 후 후손들의 풍요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인류역사의 각 순간을 단편적으로만 보았을 때 고통을 야기할 뿐이었던 무지가 인류의 삶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물론 무지의 결과가 진보만을 이끄는 것은 아니다. 인류역사에서 무지로 인한 참혹한 결과가 초래된 경우도 빈번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지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지는 필연적으로 진보를 이끈다. 무지가 인류로 하여금 진보에 대한 가능성을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핍을 인지하는 자 만이 발전가능성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16세기 이전 유럽인들과 그 이후 비 유럽인들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가 무지에 대한 인정이라고 설명한다. 유럽인들은 무지와 함께 찾아온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과학과 경제 등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더 넓게 보면 이런 경향은 16세기 전후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스스로 결핍을 만들어서 그 결핍을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인간은 추위를 견딜 수 없다는 결핍을 느끼고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생물학적 공동체의 한계를 느끼고 종교라는 가상의 실체를 만들어서 더 큰 협력을 이끌어 냈다. 이는 추위와 생물학적 공동체의 한계를 결핍으로 인식하지 않는 동물들과 대조적이다. 결국 인류문명의 아버지는 에피메테우스였던것 같다. 인류는 스스로 결핍을 만들고 그 도전 상황에서 무지로 인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 실수를 부단히 극복하며 현명해져 왔기 때문이다. `에피메테우스`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인류는 `늦게 깨닫는 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무지와 실수의 가치를 재평가 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인류가 무지와 실수의 가치를 잘못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피엔스`를 통해 무지의 가치와 함께 재평가할 수 있었던 가치는 변화의 가치였다. 올해 3월초 이세돌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이 있었다. 세계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세기의 대결에 주목하였다. 결과는 예상과 달리 이세돌9단의 패배였다. 그리고 인류가 맞이한 것은 인공지능시대의 도래라는 현실감과 함께 두려움이었다. 인공지능이 인류의 능력을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따라잡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인류가 스스로 만든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도전에 진화론적 인본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능력을 뛰어넘기 위해서 인간이 인위적인 진화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치즘으로 말미암아 지난 60년 동안 금기시되어왔던 진화론적 인본주의가 생명공학의 발달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안은 격렬한 반대 또한 수반한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를 지적한다. 그는 `초인간`을 만드는 것이 사회문화적 혼란과 더불어 종국에는 사피엔스라는 종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음을 소개한다. 더불어 기술에 의한 가능성 또한 인정하며 멸망과 진보의 갈림길에 선 인류의 고민을 촉구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 노력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당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한 번 해답을 바랬던 나는 `사피엔스`를 인류의 변화에 집중하며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역사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버릴 것을 일러주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존재를 변화시켜온 존재였기 때문이다. 인류는 수만 년 전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를 통해 유인원과 차별화되는 존재로 변화를 시작했다. 이후에는 수십 명의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에서 `허구`를 만들어내서 그 이상의 협업이 가능한 사회동물로 변화했다. 또한 농업혁명을 통해 자연동물에서 문명을 이룩한 존재로 변화했다. 물론 현대인류는 종의변화에 직면해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근본적 차이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빅 히스토리(Big History)관점에서 보면 종이라는 것도 변하는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카(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에서부터 현생인류까지 어디부터가 `사피엔스`라는 종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학술적인 규정일 뿐 이다. 인류는 `주어`로써 항상성 있게 규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고 의미가 부여되는`서술어`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도구를 이용해서 어떤 존재로 `변화`할지는 인간이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불꽃놀이로 사용되었던 화약이 유럽에서 무기로 사용되고, 마야문명에서 장난감으로 여겨지던 바퀴가 타 지역에서는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같은 화약을 두고 누군가는 불꽃놀이구경꾼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군인이 되기도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인 것이다. 책의 저자가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다. 도구자체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을 두려워하기보다 어떻게 사용할지를 고민해야한다.
물론 변화는 위험을 수반한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핵능력을 보유함에 따라 역사를 변화시킬 능력 뿐 아니라 끝장낼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말한다. 핵능력으로 말미암아 전쟁억지와 에너지수급능력증진과 함께 멸망위협을 안고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 맞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역사상 모든 종류의 러다이트운동( Luddite Movement)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그 대상 혹은 현상은 하나의 `밈(meme)`으로써 자가 복제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인류역사의 큰 방향성인 돈과, 제국, 종교 모두에서 일관됨을 `사피엔스`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서 본 인류역사에서도 한번 일어난 변화가 사람들의 거부로 사장된 사례는 없었던 것이다.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변화의방향성을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는 IAEA와 NPT를 통해서 핵확산의 방향성을 조정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경제제재 등 여러 수단을 사용해서 핵확산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잠제적인 핵보유국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것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 보다 이익이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핵무기보유를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스템이 완벽하지는 않다. 북한 같은 불량국가들이 이런 질서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이 대부분의 국가들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명징한 사실이다. 우리가 맏이하게 될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자세는 이와 같아야 한다. 1차 산업혁명초기에 많은 거부가 있었고 실제로 부작용의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이런 변화의 충격을 흡수하고 오히려 충격을 동력삼아 경제적 풍요를 이루어내었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한 인류가 대응할 자세는 거부가 아니고 변화의 방향성을 선택할 능동적인 대응인 것이다.
지금까지 `사피엔스`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내려 보았다. 그 결과 나는 `오버뷰이펙트`를(overview effect) 경험했다. `오버뷰이펙트`는 우주를 다녀온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여행을 한 뒤 가치관이 크게 변하는 경험을 이르는 말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며 지구와 우주의 장엄함에 경외감을 느끼고 보다 넒은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보다 넒은 관점에서 역사를 내려다본 결과 삶의 관점을 바꿀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무지와 변화를 순응할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사피엔스`를 통해 인류는 어리석은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역사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지와 변화로 인한 두려움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불안해하는 이 시대의 청년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용기를 가질 것이다. `사피엔스를`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용기다. 눈앞 현실에만 매몰되지 않을 용기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프로메테우스-에피메테우스 신화를 다시 살펴봤다.
널리 알려진 판도라의상자에 대한 신화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자가 열리는 부분까지만 알고 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이와 같다. 에피메테우스는 재앙을 불러온 판도라를 끌어안으며, 판도라의상자로부터 나온 재앙을 막는 수호자를 자청한다. 그는 어리석되 책임 있는 사내였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에피메테우스와 같이 늦게 깨닫는 운명이다. 늦게 깨닫는 인간 즉, (Homo-Epimetheus)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을 수용하되 책임감 있는 태도, 그것이 현실적 질문이 되어 돌아온 신화가 질문과동시에 주는 답변인 것이다. 이 오래된 지혜가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판도라의상자와 함께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는 잊혀졌다. 하지만 실수를 통해서 현명해진 에피메테우스의 유산은 인류가 마주친 또 한 번의 도전에 등불로 남아있다.
주)
ⅰ 데이비드 크리스천, 거대사, 김용우.김서형, 서해문집, 2009, 90
ⅱ 데이비드 크리스천, 거대사, 김용우.김서형. 서해문집, 2009, 105
ⅲ https://en.wikipedia.org/wiki/Last_universal_common_ancestor
ⅳ 수전 블랙모어, 문화를 창조하는 세로운복제자 MEME, 김명남, 바다출판사, 1999, 83
ⅴ https://en.wikipedia.org/wiki/Overview_effect
*참고문헌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균쇠, 김진준, 문학사상사, 2005
빌포셋, 역사를 바꾼 100가지 실수, 권춘오, 매일경제신문사, 2010
데이비드 크리스천, 빅히스토리, 조지형, 해나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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