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선한 목자로 칭송받던 담임목사는 용마산 산마루에서 밤새워 기도하다 숨졌다. 목자를 잃은 양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교회당은 해가 바뀌도록 먼지 쌓인 빈집으로 남아있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목사가 여 집사를 범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웃 마을로 번져갔다.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잡초 우거진 ‘땅끝’만을 찾다가 후임으로 부임한 백형기도 오늘까지 살아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며칠 전 퇴원하고 돌아와 마음을 추스르고 늦어버린 새해 목회계획을 세우려고 책상 앞에 앉았으나 생각나는 것은 지난 일들뿐이었다. 백 목사는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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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어려움을 당하면 백형기는 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때도 살아난 것이 기적 같았다. 한낮의 봄볕이 달구는 시멘트 포장 고속도로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늘색 봉고차 룸미러에는 신나게 산을 올랐던 동료들이 뒤로 젖힌 의자에 몸을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삼대 적선을 해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의 감격을 늘어놓던 팀장도 조수석에서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조용하다. 백형기가 운전하던 봉고차가 지친 듯 한두 차례 비틀비틀했다. 차는 또 한 번 비틀하더니 왼쪽 중앙분리대를 쾅, 들이받고 오른쪽으로 튕기면서 한 바퀴를 굴렀다. 큰 양철판을 찢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길바닥엔 불꽃을 튀기며 시멘트 먼지가 연기처럼 일었다. 뒤따르던 SUV 한 대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뒤집힌 봉고차를 20여 미터나 밀고 나가 멈추었고, 잇달아 달려온 승용차들이 7~8중 추돌을 하며 길게 늘어섰다. 3·1절 연휴가 끝나는 월요일 오후, 부산 방향 남해고속도로에서 함안1터널을 벗어나자마자 일어난 사고였다.
사고를 당한 봉고차에 타고 있던 동료 7명 중 안전띠를 매지 않은 1명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나머지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담뱃갑을 구겨놓은 것 같은 차 안은 순식간에 붉은 페인트 통을 터뜨린 것처럼 피범벅이 되었다. 잠시 후,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경광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했다. 구급차는 다친 승객들을 부산의 한 대학병원으로 이송했다. 이 사람들은 대구 달성출판사 직원들로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지리산 종주를 3박 4일 동안에 끝내고 곧바로 귀가하는 길이었다. 지난해 가을에도 백형기는 낚시를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 통영으로 바다낚시를 갔다가 욕지도 앞바다에서 낚싯배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었다. 해경의 구조가 늦어지는 바람에 15명 중 6명이 익사하는 대형 사고였다. 일행 세 사람은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 그때도 백형기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생각하다 고향 교회의 일을 떠올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의 꿈이 늦어지는 동안 백형기는 마을 교회로 이끌렸다. ‘대학은 무엇 하러 가는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는 처음 뜨악했던 그의 마음에 삶의 의미를 깊이 심어주었다. 그러나 교회와 가까워질수록 생기는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설교 말씀은 가슴에 와닿지만 ‘처녀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다.’ ‘모세가 홍해 바다를 갈랐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씀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읽었던 슈바이처의 『나의 생활과 사상에서』는 그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슈바이처도 성경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의 실천에만 일생을 다 바쳐도 부족하다”고 고백하며 아프리카 원시림 속의 작은 자들을 찾아갔다. 그는 사랑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믿음이 깊어지면서 그도 그러한 사랑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길은 멀리 있었다. 외로울 때 마음의 의지가 되었던 소꿉친구 설자는 부산으로 간 뒤 얼마 안 되어 소식을 끊고 말았다. 백형기도 마침내 대학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경동대학 3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그는 대구에서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송전마을은 이미 철거되고 포항제철단지가 한창 조성되고 있었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가려면 영천역에서 중앙선 하행열차를 바꿔 타고, 경주에서 또 한 번 갈아타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20분이나 연착한 열차에 올랐다.
−여기, 자리 비었어요?
백형기는 혼자 앉아 있는 세일러복의 단발머리 여중생에게 물었다.
−네, 앉으세요.
백형기는 캐리어를 선반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학생은 어디까지 가는데?
−방학을 맞아 울산에 사는 오빠 집에 놀러 갑니다.
−나도 방학으로 집에 가는 길이야.
−학생이세요? 저는 안동에 살아요. 정안여중 3학년입니다.
−나도 경동대학 3학년이야. 오빠는 뭘 하시지?
−초등학교 교사예요. 지난봄에 태어난 조카가 더 보고 싶어요!
−부모님과 함께 가지 않고······?
거리낌 없이 얘기하던 그녀의 밝은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오래도록 병석에 계셨지요. 어머니도 안 계시고 고등학생인 오빠와 둘이 살았어요. 지금은 혼자서 자취하고 있습니다.
백형기는 뜻밖에 그녀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 미안했다.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혼자서 자취를 하다니! 어머니가 없다는 이유도 궁금했으나 화제를 돌려 방학엔 무얼 하며 보낼 거냐고 물었다.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가능하면 오빠와 함께 제주도 구경을 하고 싶어요.
−여행이란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좋은 기회이지!
백형기는 그녀의 옆모습을 한 번씩 훔쳐보며 여행이 주는 좋은 점들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그가 교회 얘기를 했을 때, 그녀는 친구 따라 성당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두 볼에 홍조를 띠며 친구 이야기도 재미있게 엮어 나갔다. 다른 사람들에게 두 사람은 아마 오빠와 동생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열차는 어느새 경주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름은 박정아. 형기는 정아가 혹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편지를 할 수 있도록 그가 출석하는 교회의 주소를 적어주었다.
방학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왔을 때 정아의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형기는 그때 대구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제일교회에 출석하며 교회학교 고등부 반사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주 편지를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한 달에 두어 차례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며 백형기는 마치 상담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사춘기의 고민은 그렇게 복잡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문제는 풀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사랑은 몰래 싹트고 있었다.
사랑스런 여학생으로부터 때때로 예쁜 편지를 받는 것은 타향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젊은이에게는 생활의 활력소로 작용했다. 정아는 설자가 떠나간 빈자리를 어느 정도 메워주고 있었다. 어느덧 겨울방학이 지나고 이듬해 2월에 백형기는 논산훈련소로 입대를 했었다. 그는 맨 먼저 정아에게 입대 후의 소식을 전했다. 정아의 답장은 그의 어려운 병영생활에 더없는 힘이 되었다. 백형기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는 고향의 부모님을 뵙기에 앞서 안동을 먼저 찾아갈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한동안 순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동안 고등학생이 된 정아는 체육 시간에 평균대 위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으나 백형기는 병영에서 제때 그 소식을 접하지 못했고, 위로의 편지 한 장 보내지도 못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편리한 스마트폰이 없었던 옛날의 이야기이다. 편지만으로는 서로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설자가 떠난 빈자리를 채워주었던 정아와의 사랑도 제대를 하기 전에 끝나고 말았다.
백형기는 응급실 침대에 누운 채 그곳이 부산이라는 말을 듣자 오래전 부산 외삼촌 집으로 간 뒤 소식이 끊긴 설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고향 사람들과는 거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은 모두 ‘제철단지’에 수용을 당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마음이 한가로우면 고향마을의 정경은 눈에 선하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모습은 낙엽처럼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설자 얼굴은 추억의 벽에 액자처럼 고이 걸려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