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을 떠나기 전 날 밤, 현곡이 모여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시겠다고. 그러니 기대해도 좋다고 말이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2024년 2월 26일, 삼무곡은 경상북도의 경주로 잠시 배움의 자리를 옮겨 갔다. 이번 여행의 첫 날, 우리는 경주에서도 깊은 산골의 한 공방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는 장인과의 만남을 가졌다.
도자기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조께서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었을때 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 사회에 이르기 까지. 도자기 또한 문명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변화를 맞이해 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곡물을 담고 보관하는 용도였던 토기가, 기술이 발전하고, 문화가 변하고, 장인의 손길이 들어감에 따라 하나의 작품으로서 거듭이난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에는 많은 도자기 문화재와 보물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가장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것이 바로 고려청자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만난 장인, 해겸 김해익 선생님은 이러한 고려청자의 비색을 구현해 낸 것으로 세간에 인정받는 분이셨다.
우리가 김해익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다 같이 모여 스승님께 삼배를 올리는 일이었다. 지금 현재 마주하고 있는 스승님을 향한 인사. 학생으로서 배움을 얻겠다는 뜻이 담긴 행위였다. 이후 김해익 선생님의 여러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서는 차를 달이고 계시던 분이 우리를 다도로 맞아 주셨다. 그분은 이용범 선생님이라는 분으로, 자신을 현재 김해익 선생님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글로 집필하는 사람으로 소개해 주셨다. 어려서 부터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러한 예술품을 만드는 장인들에게도 관심이 있어, 그들의 이야기를 남기는 중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 하시고는 이용범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도자기의 종류에는 천목, 청자, 백자 등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중에서 김해익 선생님이 만들고 있는 청자는, 고려시대 이후에는 만드는 법이 전승되지 않아서 이제는 만들지 못 하는 도자기라고 한다. 실전된 이유로는 고려시대 당시 만들기가 힘들고 대량생산이 어려운 청자가, 점차 도자기 시장의 주류에서 멀어지다가 결국 조선시대에 들어서 백자의 상용화와 함께 소실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로 요즘 유통되고 있는 청자들은 모두 유약을 통해 전기가마에서 색을 내어 만드는 것으로, 사실상 고려청자를 재현해 냈다고는 할 수 없으며, 고려청자와는 구별되는 차이 또한 나타난다고 한다.
반면에 김해익 선생님은 4대째 내려오던 도공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 일을 배워가며 도자기를 만들고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해 내는데 노력을 기울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스물 중반의 무렵, 김해익 선생님 또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셨다고 한다. 김해익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당시 지인중의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네 도자기에서는 비색이 안나잖아.' 사실 청자의 색깔은 만가지가 넘어간다. 보통 만가지가 넘는다는 말은 수를 셀 수 없다는 뜻이고, 이는 즉 고려청자의 비색을 추구하는 길에 끝이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김해익 선생님은 그 길을 걸으셨고, 지금은 도공으로서 살아온 삶이 50년이나 되셨다고 한다. 이 긴 시간동안 선생님은 고려청자 이전의 도자기들 부터 답습해 나가며, 도자기가 구워지는 원리를 파악하고, 무수히 많은 시도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간에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해 냈다고 인정받고, 또 인간 문화재로서 당신의 작품을 문화재로 인정받는 심사를 거치는 중이라고 한다.
정말 하나의 일에 몰두한다는 것은, 인생을 통틀어 살펴본다면 누구나 몇 번 쯤은 경험해 봤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인생을 오로지 하나의 일에 바친 사람은 전 세계를 뒤져 보아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온전히 나를 단 한 가지의 일에 맡기는 것은, 왠만한 각오와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한 분야에서 장인이라 부르며 스승으로 모시고 배움을 얻는다. 설령 우리가 처음으로 김해익 선생님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그저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해 냈다는 타이틀에 이끌린 것이라 할지라도, 그날 우리가 그 공간에서 만난 김해익 선생님은 오로지 자신의 길을 관철해 나가는 스승님의 모습이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도자기들의 뒤에, 마치 그 도자기들을 빚고 구워 오신 김해익 선생님의 삶이 드러나 있는듯 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나아가는 것. 그 길 위에 찍힌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이 우리 눈에 비춰보였다. 마지막으로 김해익 선생님은 자신의 길을 걷는데 어떤 주저가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결국 자신이 하는 일을 계속 해 나갈 수록, 그 일에 더욱 더 의미가 담기고 가치가 느껴져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라고. 듣기로는 정말 그 길을 거기까지 걸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 것만 같았다.
이야기를 다 나누고 난 뒤 김해익 선생님의 작업장을 둘러보고, 화로를 구경하고서 마지막으로 김해익 선생님과 이용범 선생님께 삼배를 올렸다. 그러나 처음 만남의 인사와는 언뜻 의미가 달랐다. 왜냐하면 우리가 김해익 선생님을 만나고 난 이후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날 우리가 만난 해겸 김해익 선생님은 도공이셨다.
숙소에서 휴식을 가지고, 늦은 저녁 야식으로 치킨을 먹었다. 한 방에 둘러앉아 배를 채우고 있던 도중, 현곡이 우리에게 김해익 선생님을 만나고 난 소감을 물어보셨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감상을 말하고 나자, 현곡은 삼무곡의 교육 철학 세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첫 번째는 진리를 찾아가는 영성, 두 번째는 이를 표현하는 예술, 세 번째는 삶으로 직접 살아내는 경험. 이 세 철학을 기반으로 삼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삼무곡에서 뜻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당신께서 가장 자랑스러운 때가, 바로 우리들에게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스승님들을 소개시켜 주는 순간이라고 말씀하셨다. 몸소 자신의 철학을 직접 살아내고 있는 참된 자. 그 자체로서 배움을 추구하는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어주는 스승님. 삼무곡이라는 마음의 자리에서, 배움을 향하여 나아가는 학생들에게 현곡은 자신이 모신 스승님을 소개시켜 주셨다. 현곡은 평생 학생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되고자 하는 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랬기에 오늘 김해익 선생님과의 만남은, 이 여행은, 여행을 떠나기 전 현곡께서 말하신 대로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인 것이였다.
이튼날 아침, 우리는 9시에 차 앞에서 모여 1시간 동안 이동해 경상남도 양산시의 영축산에 있는 통도사에 도착했다. 통도사는 불교의 보물인 불, 법, 승을 대표하는 한국 3대 사찰중에서도 불을 대표하는 큰 절이다. 왜냐하면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보사찰이라고도 불린다. 절의 창건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신라시대 때 자장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대국통이 되어 왕명으로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통도사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들려서 통도사에 돤한 여러 이야기 및 유물들을 구경했다. 이후 절에 들어가서는 여러 보물과 건물들을 둘러보았고, 무엇보다 이른 시기에 활작 핀 매화를 구경하였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제 자리를 지켰을 매화나무는 사람의 손길을 받아 잔가지만이 하늘을 찌르듯 뾰족하게 솟아있었고, 그 틈틈이 매화꽃이 피어있었다. 이른 계절부터 이미 시들어가는 매화를 뒤로 하고, 우리는 금강계단에 들어섰다. 금강계단은 대웅전 북쪽에 있는 건축물로, 석가모니 불의 진신사리가 있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랬기에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옆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놓여져 있기 때문에 불상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보통은 이 대웅전만이 출입 가능하고, 금강계단에는 시간대를 잘 맞춰 오지 않는다면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운이 좋게도 시간을 잘 맞춰와서 출입이 가능했다.
신발을 벚은 뒤 들어난 발로 우리는 금강계단에 발을 들였다. 옆에 신발을 잠시 내려놓고서, 석가모니 불의 진신사리가 담겨져 있는 사리탑을 향해 삼배를 올린 뒤 그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여기서 신을 벗는 행위는 부처님 앞에 나를 감싸는 모든 것을 풀어헤친 채 온전한 상태로 마주하기 위함이다. 부처님이라는, 진리를 상징하는 존재와 금강계단에서 하나되는 것. 여기서 금강이란 일체의 것을 다 깨트릴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이처럼 언제나 진리를 추구하는 공간인 절에는, 언뜻 보기에는 알 수 없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무수히 많은 상징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절에 들어가는 대문부터 시작해 절 구석 구석까지. 사람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모르고 찾아온 손님에게는 그저 화려한 절의 모습만을 비춰줄 뿐이지만, 조금 더 관심이 있고, 조금더 깨달음의 노래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그 안의 진의를 내비쳐 주는 것이다. 통도사는 기원후 646년에 창건된 절인 만큼, 한 절 안에 지어진 사찰들도 각기 다른 시대를 배경에 두고 있다. 그만큼 아주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모이고, 그 손길 안에 있을 지혜를 향한 마음이 모여 지금의 모습을 띄게 된 것이다. 불교는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 불교의 실체는 어쩌면 그 가르침을 향해 앞서 나아갔던 무수한 선배들의 발자국 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불교가 가지고 있는 언어가 정답이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배움의 길을 나아가는 삼무곡의 학생들에게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불교라는 이름 아래 펼쳐진 수행자들의 마음의 자리. 그 날 통도사에서 우리가 보낸 시간은 이런 한 공동체를 마주하는데 있었다.
앞서 말했듯, 불교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상징들이 존재한다.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제 나름대로 자신이 마주한 진리를 표현해낸 작품들이다. 하지만 삼무곡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현곡이 말해 주시길, 과거 불교를 믿는 대부분의 신도들은 이러한 공부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세세한 상징 하나하나를 배워 나가며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찾아 나서는, 그러한 사치를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어찌보면 고단한 삶에서의 의지처와 같은 역할이어야 했던 거 같다. 물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안에서 불교가 가진 위치 또한 계속해서 달라졌겠지만, 결국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불교의 공부는 다가가기 힘든 것이었다. 그랬기에 결국 스님들은 가장 단순한 언어로, 그들에게 자신이 들은 진리를 노래했다. 기도하면 극락왕생 할 것이다, 죄를 뉘우쳐야 다음 생에 축생을 살지 않을 수 있다 등등. 설령 같은 것을 말할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어떠한 말로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지는 다 다른 법이다.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만난 큰 스승이신 김해익 선생님과 통도사 사찰을 방문해 석가모니 불을 마주했던 것은, 어찌보면 인생의 선배들을 마주한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보다 먼저 자신의 길을 나아간 자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물어보는 것. 이번 1박 2일간의 경주 여행 동안 잠시 배움의 자리를 옮겨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환경에서 잠을 잤지만, 결국 여행의 끝난 후에는 다시 이 질문으로 우리의 집에 돌아온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 자고 일어난 후에는 다시 삼무곡에서의 일상이 시작되고, 그날의 질문을 던지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때로는 다양한 상징들 속에서, 때로는 단순하고도 담백한 한 마디를 새기며. 우리는 우리의 길을 걸어간다.
첫댓글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