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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의 동심이 존재하는 그곳
이 창 훈 (시인)
앞을 못 보는
17세 소녀 김지선 양이
바이올린 켜는 걸 TV에서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는데,
며칠 후 똑같은 시각장애인인
11세 유지민 소녀가
피아노 치는 걸 보고서는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음악은 사람을 그렇게 잘 울리는가.
이목구비가 멀쩡한 채
반백 년 넘게 詩를 썼는데도
사람 한 번 울려 보지 못한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김대규, 「나는 그날 실컷 울었다」 시인정신 2015년 겨울호>
고속도로 톨게이트 외진 한켠에 잠시 시동을 끈 늙은 차를 기대어 둔 채 말없이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더 많이, 더 빠르게’를 강조하며 쌓아올린 문명의 이기(利器)들 속에 치여 점점 그 사물들처럼 물화(物化)되어 버리는 것만 같은 일상이 고요히 잦아드는 시간.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타자들을 뒤돌아보고 들여다보게 하는 저물 무렵의 시간. 무섭도록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속도감이 광폭한 질주를 하고 있는 구석 한켠에서 지고 있는 노을, 그리고 저 너머 언저리에 벗은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순간 어떤 통증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며 핑글 눈물이 맺혔습니다. 내 내면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무언가를 자꾸만 채우고 보여지는 외면에 무언가를 덧씌우며 살고 있다는 자괴감. 순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미안함이 아니었습니다. 한 잎의 손도 없이 다 벗고 서 있는 나목에게 그저 참담한 부끄러움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여기에서의 ‘시’란 바로 저 지는 해 속에 팔 벌리고 선 겨울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당면한 장애와 불편을 해소하고 제거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온 문명. 그 점점 더 화려해지는 문명의 대척점에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앙상한 빈 몸을 드러낸 채 견디고 있는 게 바로 저 겨울나무이고 이 시대 시이고, 시인의 운명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지금 이곳의 문명의 역사는 외면의 결핍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충만의 공간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려 애써왔습니다. 심지어 공허하고 허한 사람들의 내면마저도 외부의 것들이 채워 줄 수 있다는 충만의 환상을 심어주었고, 그 환상은 유효하고 강력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에게 늘 말하지 않고 보여줍니다. 충만과 조락과 결핍은 이 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게 깃들인 필수조건이라고… 완벽한 조락과 황폐한 죽음의 풍경이 반드시 도래하는 모습을 증명하는 고통의 겨울나무는 그러므로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도 팔 벌리고 흔들리는 자에게 다시 봄의 풀꽃들이 피어날 것이라는 자명한 진실을 자연은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는 어느 시점에서 한 명민한 비평가는 ‘시인은 더 이상 숲으로 가지 않는다’라고 슬프게 말했지만,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가서 자연이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결핍과 부재의 아픔을 문명의 인간들에게 말해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듣지 않아도, 잘 전달되지 않아도 나직한 목소리로 울려야 하는 공명통 같은 존재입니다.
노시인께서는 시각 장애를 입은 두 10대 소녀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나직이 말합니다. 단지 앞을 못 본다는 ‘장애’ 때문에 파생하는 슬픈 연민이 아니라, 장애라는 결핍을 가진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과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으며,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고 고백합니다. ‘앞을 못 보는’ 장애란 분명 불편하고 부당한 존재의 외적 조건입니다. 그건 분명 치명적인 결핍이구요. 생래적으로 외적 결핍을 안고 가는 존재가 그 결핍의 몸으로 자기 내면의 무늬를 음악이라는 형식으로 아름답게 켜고 치는 걸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시인은 ‘음악은 사람을 그렇게 잘 울리는가’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울림은 심미적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표현하기까지 아프게 안고 갈 수밖에 없을 존재의 지난한 고통에 있습니다. 너무도 절망적이었을 외적 결핍을 내적의 충만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존재가 벌였을 그 처절한 싸움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화자는 ‘이목구비가 멀쩡한’ 자신의 충만한 외적 조건에 대해 얘기합니다. 불편부당하지 않은 몸으로 ‘반백 년 넘게’ 써온 자신의 시에 대해 성찰합니다. 그리고 진솔하게 ‘사람 한 번 울려 보지 못한’ 부끄러움에 대해 고백합니다. 시인의 고백은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겸손함의 한 반어로 읽고 싶지만, 일기처럼 진솔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왜 이렇게 아픈 울림을 주는 걸까요.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저 겨울나무에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그저 문명이 그어 놓은 일직선의 도로 갓길에서 한참을 서서 상념에 젖은 한량에게 굉음으로 질주하는 차들이 클랙션을 울려댔습니다. 아~ 눈이 온다는 예보. 오늘 밤에 내린다는 눈이 온다는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고 차에 올랐습니다.
저녁의 등 뒤쪽으로 내리는 눈
허공에 발을 딛고 내리는 눈
천지분간도 못하고 사락사락 쏟아지는 눈
다음 생애엔 저렇게 태어나리라
가볍지도 않고 결코 무겁지도 않은 홀로라는 귀찮은 외로움 따위 목숨이랄지 그리움이랄지 위로랄지 서푼어치도 안 되는 세간 따위 죄 벗어버리고
잔 바람에도 맘 놓고 흔들리리라
-<이선옥, 「내리는 눈 속에」 시인정신 2015년 겨울호>
문 밖에 누가 서 있다.
귀가 예민한 개가 쉬지 않고
짖은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문 밖에 서 있는 것은
혼자서는 올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뚜렷하다.
문 밖에 어떤 이가
입었던
옷자락이 휘날린다.
차마 거두지 못한 껍질,
의복은 목소리와 같아서
죽은 이가, 입던 옷을 장롱 속에
남기고 가듯
서걱거리는 목소리도
캄캄한 기억의 진공관 안에 남아 있다.
누구든 자신의 목소리를
평생 걸치고 살지만
차마 다 데리고 갈 수 없는 것들이
문 밖에 서서
폭설을 담은 구름을 부른다.
그것은 휘날리며
오래도록 서 있다.
-<김도언, 「폭설」 시인정신 2015년 겨울호>
길 위의 일상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은 제 손과 머리에 이미 프로그램화된 세속과 일상성의 길. 그렇기에 그 어떤 자의식도 성찰도 필요 없이 기계적으로 가게 되는 길. 그저 달리고 또 달리는 길. 아침 출근길에 예보된 눈이 제발 내리라고… 내려달라고 내 안의 마음은 자꾸만 입을 열어 속울음처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벗어나고 일반국도를 지나도록 오지 않는 눈. 등뼈처럼 굽은 골목길에 접어들어서야 ‘저녁의 등 뒤쪽으로’ 서서히 내리는 눈. 헐떡이는 시동을 끄고 문명의 이기 속에서 오래도록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희끗희끗 내리던 눈이 삽시간에 ‘천지분간도 못하고 사락사락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곳이 점점 더 깊어가는 어둠인지도 모르고 눈이 펑펑 새하얗게 퍼붓고 있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결코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은’ 외로움, 언젠가는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죽음이라는 운명, ‘서푼어치도 안 되는’ 저 지상의 방 한 칸 등등… 내 안과 밖을 이루고 있는 목록들이 주마등처럼 부유하며 내 안을 들끓고 있었습니다. 나고 자라며 조금씩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어떤 책임의 무게들 속에 ‘맘 놓고 흔들’릴 수도 없었던 무거움들을 저 내리는 눈들로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지금껏 살아오는 일이 ‘죄’를 지어 온 일들이라 그 ‘죄’를 ‘벗어버리고’ 싶다는 열망이 순간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너는, 우리는 저 지난한 내・외부의 삶의 세목들 속에서 ‘잔바람’에도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속의 삶에 ‘그리움이랄지 위로랄지’ 그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저 연민의 따스한 눈이 퍼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어떤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지며 눈을 떴습니다. 시동을 꺼뜨려 히터도 와이퍼도 작동하지 않는 기계의 몸을 서서히 뒤덮고 삼키려고 하는 눈.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고요함과 불안이 공존하는 마음의 동굴…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찰나. ‘문 밖에 누가 서 있’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고요함 속의 더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실오라기 같은 호흡. 현존이 아닌 부재와 결핍의 존재. 그 존재의 부름. 두렵도록 어두워 ‘캄캄한 기억의 진공관’을 열어야만 비로소 울리는 소리. 그토록 겉으로는 지우고만 싶었던 소리. 어릴 적 함께 뛰놀던, 요절한 셋 누이의 음성. 그 소처럼 커다란 눈. 젖은 눈망울이 문(차) 안의 나를 지그시 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누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지껏 나고 자라며 지내온 삶의 변곡점마다 예기치 않게 다가와 목격해야만 했던 죽음들이 비로소 부재의 존재증명을 하듯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올 수 없는 / 것이어서’ 내리는 눈을 데리고 온 부재의 실루엣들이 똑똑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생각. 오한이 들며 잠시 몸을 떨며 창 밖을 보니 잠시 잦아들었다 다시 퍼붓는 눈발. 순간 희끗희끗 성긴 눈 속에 ‘입었던 / 옷자락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면 ‘폭설을 담은 구름’을 불러 온 저 부재의 ‘목소리’들이 재처럼 바스라져 사라질까봐 함부로 열지 못했습니다. 문명과 일상성의 제국 속에서 영원히 살 듯이 살아가는 저 같은 인간이란 그 얼마나 가련한 것입니까. 부재와 결핍의 상처와 기록은 이토록 가까이 문(창) 하나를 사이에 둔 샴쌍둥이 같은 존재였던 것을요. 시시각각 다가오는 소멸하는 죽음. 그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두고 살아가는 나, 너, 우리들의 유한성에 대해 문 밖에 서 있던 부재의 목소리들이 속삭였습니다. 그런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결국 지금 여기 ‘있음’의 소중함과 ‘있음’을 무화(無化)시키려는 어둠의 절망과 싸우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일상과 세속의 세계 속에서 소멸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자꾸만 마주보게 하여 영원에 대해 꿈꾸게 하는 실존의 기록, 그를 위해 부재와 결핍을 부르는 목소리. 그것이 바로 ‘시(詩)’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뒷머리를 ‘탁’ 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문(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으며, ‘그것은 휘날리며 /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무섭도록 퍼붓던 눈발이 서서히 고요한 몸짓으로 고운 자태를 드러내며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의 부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손전화(휴대폰)가 부르르 부르르 떨립니다. 지상의 방 한 칸에서 토끼 같은 새끼들과 함께 이 무용하고 보잘 것 없는 가장의 귀향을 간절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보입니다. 안으로 침잠하던 내면의 고요한 의식의 여행은 내일 이른 아침에 어딘가로 떠나야겠다는 짧은 여행의 다짐을 부르고 그래 들어가야지~ 하며 눈에 덮인 문을 엽니다. 삐그덕거리는 낡은 몸. 문 밖은 고요히 눈밭이었습니다. 뽀드득 뽀드득… 육체의 무거움을 가볍게 밀어올리는 발걸음. 잠시 맴돌이하며 걸음을 디디고 있었습니다. 저편 주차장에서 막 다른 문을 열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은 한 엄마와 다섯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와아~ 눈이다~!’라고 놀라움의 탄식을 내뱉는 아이의 발걸음은 자꾸만 쌓여가는 눈밭을 종종거리고 싶어하고, 종잡을 수 없는 아이의 걸음을 따라가며 필사적으로 우산을 씌어주려는 어머니의 모습. 순간 서글퍼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눈은 내릴 뿐이었는데… 지금 이곳의 어른들이 쌓아오고 만들어 온 문명의 진화 속에서 오염되어 버린 눈은 이제 낭만적으로 팔 벌려 맞을 수도 없는 그런 두려움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오래 전, 산성눈이 내리는 도시의 한 구석에서 ‘순간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던 이문재 시인의 시 구절이 아프게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와아~ 눈이다~!’라고 말하는 어린 동심의 모습에서 수십 년 전의 저 어린 시절, ‘와아~ 눈 온다~!라고 누이들에게 말하며 발정난 개처럼 마당과 골목으로 뛰쳐나갔던 제 모습이 놀랍도록 오버랩 되며 기뻤습니다. 눈이나 비가 오면 이제 우산을 꺼내 들고 하늘을 가리는 저 엄마와 저 같은 어른들에게 ‘워매, 눈 오시네 / 뭔 일이다냐, 요것이 대체’(「눈 오시는 날」, 안도현)라는 아름다운 탄식을 계속 들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아무리 오염되고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이곳이라지만, 아직도 이 지상과 저 천상을 하나로 연결하며 어둠의 세상을 새하얗게 만들며 눈은 내리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아프고 소외된 자리에서 홀로 떨고 있는 겨울나무 같은 사람들에게 눈은 치유의 힘으로 포근히 내리고 있다고 쓰고 싶었습니다. 밀리고 밀리는 자동차 속에서든 사람들에 치이며 돌아오는 만원버스에서든 성냥곽처럼 빼곡이 들어찬 도심의 아파트 안에서든 내리는 눈을 보며 사람들의 마음은 ‘아~ 눈이다~!’, ‘야~ 눈 온다~!’라고 밟아지는 얼굴로 추임새를 넣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동차에 치인 눈사람’을 그려 보인 뼈아픈 최승호 시인의 시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그 누군가는 계속 눈사람을 만들고 있듯이…
발걸음이 잠시 멈추어야 하는 곳
거친 숨소리를 삭여야 하는 곳
불빛도 고개를 숙이고
바람도 되돌아가야 하는 곳
배반의 음모가 새어나지 않는 곳
나팔꽃 칭칭 감아 비겁한 사랑을 위장하는 곳
비명은 재갈을 물어야 하는 곳
나를 가두는 경계이기도 하는 곳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는 곳
내가 허물고 내가 다시 쌓아야하는 곳
쉼표같이 멈추어야 보이는 곳
휴대폰을 지우고 매무새를 한 번 더 살펴야 하는 이곳
-<주강홍, 「현장일지- 담장」 시인정신 2015년 겨울호>
사방이 열려 있는
계절이 노크도 없이 들어와 익어가는
노루 토끼 아침저녁 들락거리는
큰 눈 치운 겨울밤
쪽잠을 깨우지 않겠다고 뒤꿈치 들고 다녀간 노루의 허방 짚은 아침
죄송죄송 발자국 편지를 읽는
대문을 떼어낸 자리
읍내 시장 골목마다 머리 조아리며 받아 온 푸성귀 몇 줌 내어놓은
사방이 길이고 문인
그런 집이 되고 싶다
양평 어디쯤 살고 있을,
-<김남수, 「양평 어디쯤」 시인정신 2015년 겨울호>
이른 아침. 다소 이른 아침을 먹고 가방에 몇 권의 시집과 계간 시인정신 잡지를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꼭 어딘가로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세속의 답답함을 다소 벗어난 곳으로 잠시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나선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것만 같은 눈밭이 이 도심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무언가와 무언가를 누군가와 누군가를 구별 짓고 구획 지으려는 담들이 쭈욱~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눈을 맞고서도 견고한 성처럼 서 있었습니다. 세속의 인간들은 결국 우리가 만들고 쌓아 온 것들을 인지하고 확인하기 위해 담을 두르고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원심력의 작용으로 길에 나서려는 집시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어야 하는 곳’, ‘거친 숨소리를 삭여야’ 하고, ‘배반의 음모가 새어나지 않는 곳’, 때로는 화려한 조화의 꽃들로 칭칭 감아 ‘비겁한 사랑을 위장하는’ 위장해야만 하는 곳, 아프다고 슬프다는 ‘비명은 재갈을 물어’ 이 악물고 악다구니로 살아야 하는 곳. 그런 세속의 곳이 바로 지금 대다수 문명 속 인간의 자화상이자 우리들의 현장일지를 쓰는 곳일 거란 생각이 불현 듯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담장’을 반드시 부정적이고 환멸의 시선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견고하게 서 있는 듯 보이는 저 ‘담장’은 분명 ‘닫혀 있으면서’ ‘나를 가두는 경계이기도’ 하지만, 그 갇힘이라는 불편과 억압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열려 있는 곳’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고 들여다보고 대하는 어떤 태도와 내면의 힘일 겁니다. 결국 저 ‘담장’은 ‘내가 허물고 내가 다시 쌓아야하는 곳’이며, 마침표로 꽉 막힌 골목인 듯 보여도 ‘쉼표같이’ 잠시 ‘멈추어’서 자신을 저 높은 담을 들여다보게 하는 성찰의 공간인 것입니다. 쉼표처럼 멈추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담’이라는 건 결국 열려 있는 문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장을 마주 선 우리는 결국 ‘휴대폰을 지우고 / 매무새를 한 번 더 살’피는 성찰의 진통을 통해 담을 부수거나 월담을 할 수 있는 비상의 힘을 내적으로 단단히 다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힘을 부르는 목소리를 아직 우리의 시가 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동을 켜고 예열을 하는 제 늙은 차가 쉼표같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담 앞에 있는 저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드르릉 부르릉거리는 몸의 체온에 녹으며 반짝 물기를 머금는 눈, 눈들. 순간 어딘가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세속의 도시를 벗어나 굳이 덜 오염된 자연의 공간으로 가야만 한다는 마음이 부질없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방이 열려 있는’ 곳, 인간의 잠을 ‘깨우지 않겠다고 뒤꿈치 들고 다녀간 노루의 허방 짚은 아침’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 그리고 그 노루의 ‘발자국 편지를 읽는’ 덜 죄 짓고 사는 순한 인간의 마을이 있는 곳, ‘대문(담)을 떼어낸 자리 / 읍내 시장 골목마다 머리 조아리며 받아 온 푸성귀 몇 줌 내어놓는’ 곳, 그래서 ‘사방이 길이고 문인’ ‘그런 집’이 있는 곳. 그런 순정한 공간이란 분명 아름답고 자연스런 공간일 테지만, 그곳 역시 그곳의 현장일지를 쓰고 있을 주체들에겐 보이지 않는 ‘담장’이 끊임없이 존재하는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세속과 자연, 환멸의 일상과 고요의 평화라는 이분법, 그 도식이 제 마음 속에 도사린 담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열을 마친 자동차에 제 몸을 바짝 붙인 채 길을 나섰습니다. ‘양평 어디쯤’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서글프게 낮은 자리에서 배고픈 길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가난한 밥 한 끼를 나눠 먹는 눈물겨운 연민의 동심이 존재하는 그곳으로 마실이라도 다녀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가서 밥 한 끼 보시하고 오리라 다짐했습니다. 거기 그곳에 이 화려하고 번잡한 문명의 중심 속에서는 도저히 써먹을 데라곤 없는 이 무용한 ‘시(詩)’를, 붙들어 떠나지 못하게 정성껏 모시는 한 사람이 순한 눈을 뜨고 있을 것이기에… 또한, 거기 죄다 벗어 알몸으로 선 겨울나무가 쓰러지지 않고 치유의 눈을 맞아 피어올린 눈꽃을 피워 여전히 거기 서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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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시인정신] 신인문학상. 시집 『문 앞에서』 외 1권.
현재 남양주시 심석고등학교에서 열정적인 문학교사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음.
ㅡ 「시인정신」 2016년 봄.여름 합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