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三世 참판공(參判公) 배천석(裵天錫)
公의 휘(諱)는 천석(天錫)이요 자(字)는 경수(景受)니, 승지공(承旨公)의 맏아드님이다. 중종 6년(1511, 辛未年) 3월 10일에 태어나셨다. 어릴때부터 평범하지 않은 자질을 보이셨는데, 순직근실(諄直謹實, 매사에 정성스럽고 정직하며 삼가면서 성실)하며, 불사표박(不事表襮, 겉치레를 일삼지 않음)하였다. 이에 승지공이 매우 기특히 여겨 장래 큰 성취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공의 나이 13세 때에 돌아가시니, 이때부터 집안의 大小事를 책임져야 했기에 공부에 전념할 수 없음을 아쉬워 하였다.
장성한 후에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음을 슬퍼하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책을 끼고 스승과 벗을 찾아 공부하였다. 나이 33세인 중종 38년(癸卯, 1543)에 외당숙(外堂叔)인 충재 권충정공(冲齋 權忠定公)의 천거로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제수되었다. 명종 원년(1546)에 선교랑(宣敎郎)이 되고 병절교위충좌위부사과(秉節校尉忠佐衛副司果)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그때 모부인박씨(母夫人朴氏)는 61세였고, 조모김씨(祖母金氏)는 89세였다. 평소 집에 돌아가 母夫人과 祖母를 모시고 받들려는 뜻이 있었기에[雅有歸養之志], 丙午年(1546) 가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이듬해인 1547년 7월에 숙부인정씨(淑夫人鄭氏)가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듬해 무신(戊申, 1548) 5월에 모부인박씨(母夫人朴氏)가 돌아가시고, 7월에 조모김씨(祖母金氏)가 돌아가셨다. 2년에 세 번의 상(喪)이 계속되었으나, 공(公)은 장례와 상례와 제사에 정성과 슬픔을 다하였다.
이후 살고 있던 봉화 내성현(乃城縣) 호평리(虎坪里)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시고 금계(金溪)의 옛집을 다시 고쳐 짓고, 임자년(1554)에 금계로 다시 돌아와 7년을 사셨다. 명종3년(1558, 戊午) 봄에 도목촌(桃木村)으로 옮겨 사시다가 선조 6년(1573, 癸酉) 정월 5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享年) 63세였다.
임종(臨終)할 때에 子 삼익(三益)에게 ‘우리 가보(家譜)를 완성하라’는 명을 남기셨다. 당시 공은 보계(譜系)에 매우 밝아서, 다른 집안의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 집안의 계보를 물으면, 자세히 알려주셨다고 전한다. 子 三益이 관찰사(觀察使)의 벼슬에 올랐기에 가선대부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벼슬이 추증(追贈)되었다.
配는 숙부인영일정씨(淑夫人迎日鄭氏)니 세호(世豪)의 따님이요, 祖父는 병절교위충좌위부사과(秉節校尉忠佐衛副司果) 벼슬을 한 승윤(承胤)이요, 曾祖는 선략장군충무위부호군(宣略將軍忠武衛副護軍) 벼슬을 한 맹아(孟雅)요, 高祖는 승의부위(承義副尉) 로(潞)이고, 가선대부검교한성부윤(嘉善大夫檢校漢城府尹) 벼슬을 한 원후(元厚)의 오세손이 되며, 外祖는 장연현감(長連縣監)인 조맹문(趙孟文)이시다. 중종 3년(1508) 9월 18일에 태어나셔서 명종 2년(1546)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40이었다.
나이 21세에 우리 가문에 오셔서 시조모(媤祖母)를 모시고 받듬에 유순(柔順)한 마음과 삼가는 행동이 잠시도 어긋남이 없었다. 2남 1녀를 기르시니, 長은 임연재 삼익(臨淵齋 三益)이고, 次는 유산공 삼근(儒山公 三近)이고, 여서(女胥)는 월성인 이응조(月城人 李應祚)이며, 또 사녀(四女)가 있으니 여서는 이적(李寂, 退溪 側室子), 금응남(琴應南, 奉化人)이다.
묘소는 내성현(奈城縣) 남쪽 호애산(虎崖山)에 있는 승지공(承旨公)의 묘 뒤에 부부를 함께 모셨다. 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삼익(三益)이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백담 구봉령(柏潭 具鳳齡)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興海裵氏世蹟』 147~148쪽, 1981년 6월 30일 발행
<족보 기록>